59.
로렌디스는 잘못 들은 게 아니라고 확인시켜 주듯 한 번 더 이야기했다.
“당신이 좋아.”
사랑 없는 결혼이더라도 남들 다 이렇게 사니까 그렇게 지내자던 사람이다. 매매혼처럼 순식간에 이루어진 혼인이었고, 캐서린도 거기에 큰 반감은 없다.
“갑자기 무슨…….”
“갑자기는 아니지. 내 곁에 있어 달라 이미 몇 번이고 이야기했잖아. 당신이 그런 여유가 없다는 건 알아.”
로렌디스의 손이 갸름한 턱을 붙잡았다. 엄지로 턱을 쓸며 만지작거리더니, 캐서린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시선이 캐서린을 옭아매듯 붙잡아 두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아.”
아무래도 상관없다.
“사랑 없는 결혼이라면서요. 누구라도 이렇게 지내니까 이렇게 살자면서요.”
“더 욕심내면 안 되나?”
너를 헬렌에 잡아 두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이미 길은 정했다. 네가 너를 버렸다면, 내가 너를 가질 거다.
“독촉하진 않겠지만.”
“…….”
“너무 늦게까지 기다리게는 하지 마.”
로렌디스는 이미 그의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마음을 다잡지 못한 건 캐서린 혼자였다.
자작저를 떠나올 때만 해도 담백하게 마음을 먹었다. 요절한다는 미래를 보고도 휘둘리지 않은 건 지금 마음가짐 덕분이었다.
삶도 스스로 택했다. 그런데 막바지에 이르러 보니까, 캐서린은 마음먹은 삶과는 다른 식으로 살고 있었다. 스스로 택하기보다는 여기저기 휘둘렸다.
삶을 내던져 두고 스스로 택했다고 하다니 우습다. 로렌디스가 계속 해 오던 이야기가 이제야 이해됐다.
‘너를 놓지 마라.’
나는 나를 너무 일찍 포기했다. 미련이 나를 상처입힐까 그게 걱정돼서 숨었다. 그런데 그게 왜, 그게 왜 잘못됐어. 두려울 수 있잖아. 누구라도 두려울 수 있는 거잖아.
캐서린이 바르작대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로렌디스가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나, 이 사람에게 안겨 있었지.’
잊을 뻔했다. 익숙하게 받쳐 든 팔이 캐서린의 허리를 지탱했다. 캐서린은 그의 위에 앉아서 시선을 올렸다.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는데도, 캐서린은 로렌디스를 여전히 올려다봐야 했다. 그만큼 둘의 체격 차이가 컸다.
마른침을 삼켰다. 이 머릿속을 비워 내려고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럼 잡념으로 물든 머릿속이 비워졌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죄, 송해요.”
로렌디스는 가만히만 있어도 위압감이 흘렀다. 캐서린은 황급하게 몸을 비키려는데, 로렌디스가 척추에서부터 느릿하게 손끝으로 살결을 더듬거렸다.
“뭐가?”
“…… 제가 이 흐름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겠어요.”
“따라올 것 없어. 독촉할 마음 없댔잖아.”
캐서린은 다리 아래로 시선을 뒀다. 무언가가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옷 아래로 거대한 부피감이 느껴졌다.
캐서린이 잘게 움찔거리자, 로렌디스가 허리를 쥐고 다시 똑바로 앉혔다. 그러자 아래가 더 적나라하게 닿았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작은 반응들을 눈여겨보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다면.”
“…….”
“그 머릿속을 비워 내.”
로렌디스의 손이 척추를 쓸었다. 캐서린은 작은 손바닥을 쥐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눈을 질끈 감자, 쇄골에서부터 움푹 파인 골짜기까지 그의 입술이 내려갔다.
우리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익숙한 그대로다. 그런데 그 익숙함이 때로는 낯설게 느껴졌다. 다들 이러고들 지내나?
부부 사이라는 게 이런 거야? 애석하게도 캐서린에게는 ‘부부관계란 이런 이런 거다.’라고 이야기해 줄 사람이 없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이런이런 사람과 지내라고 이야기해 주었을까.’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 봤다. 아버지께서 계시다면 어땠을까. 물어볼 게 없구나. 아버지도 전장을 오래 떠돌았고, 캐서린은 계모와 지냈으니까. 캐서린에게는 보통이라는 게 어려운 일이었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으으응!”
“오래 앓네.”
“갑자기 그러니까 당황스러워서 그러잖아요!”
캐서린은 앓으며 그의 어깨를 긁었다. 손톱이 날카롭게 박혀 들었다. 신음 한 번 낼 법도 한데, 로렌디스는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더 줄 뿐이었다. 아득해진 감각이 머리를 휘어 감았다. 뜨겁고 짙었다.
몸이 섞일 때 풍기는 단내가 몸에서 피어올랐다. 땀으로 몸이 젖어 들고, 가느다란 팔이 헐거워졌다. 캐서린은 겨우 기대서 손을 뻗는 게 다였다.
‘으응.’
로렌디스가 미끄러지는 몸을 단단히 받쳐 안았다. 그의 팔이 등을 완전히 다 덮었다. 그 모습을 흘긋거리며 뒤돌아보려던 캐서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엉킨 모습이 적나라했다. 눈매를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자 몸이 다시 겹쳤다.
“당신 악질이에요.”
“그랬나?”
얕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입술을 겹치자, 그의 체향이 밀려들었다. 짙고 서늘했다. 가까이 오면 은은히 풍기던 그 체향이었다. 그래서 익숙한 만큼 자극적이었다. 이럴 때마다 가까이 붙어서 엉켜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니까.
입안을 음미하고 맛봤다. 쌉싸름한 향이 퍼졌다. 엉겅퀴처럼 감겨 오더니, 뿌리를 단단히 옭아맸다. 턱이 빠듯하게 벌어졌다. 입술 끝에 침이 고이자 그것까지 모조리 탐했다. 음미하듯 어르고 달랬다.
“하아…….”
* * *
제도로 가는 아침은 어수선했다.
남의 손길을 탈 때마다 어색하게 몸을 웅크렸는데, 오늘 아침만큼은 그럴 기운도 없었다. 맥없이 허물어지는 몸을 소파에 기대는 게 다였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넨시는 경악하며 혀를 찼다. 건국제가 다가오면서 피부부터 관리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바쁜 와중에도……. 넨시는 캐서린에게 옷을 입혀 주는 와중에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밖으로 보이는 곳을 피해 달랬더니 일부러 안 보이는 곳만…….’
어깨나 쇄골을 피해서 구석진 곳에만 흔적을 남겨 두었다. 이걸 배려라고 한 주인님께서도 대단하시지만, 꾸벅꾸벅 졸면서도 몸을 꼿꼿하게 유지하는 주인마님도 대단했다.
“피곤하십니까?”
“응. 엄청. 치장만이라도 서둘러 끝내 줘.”
연보라색 드레스를 꺼내서 입고 두꺼운 숄까지 덮었다. 보송보송한 여우 털이 어깨를 감쌌다. 뽀얀 숄에는 월계수 문양이 박혀 있었다. 마지막 흰 레이스 장갑을 끼고, 넨시의 손을 붙잡았다.
“마차까지 모시겠습니다.”
넨시와 데보라가 마차까지 마중 나왔다. 넨시와 데보라는 성을 지키고, 월계수 기사단 소수만 일정에 따라붙었다.
캐서린이 바깥으로 나가자 말끔하게 차려입은 로렌디스가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로렌디스는 바깥에서 기사단의 정비를 확인하던 중이었다.
“왔으면 가지.”
마차 문을 연 로렌디스가 손을 뻗었다. 캐서린이 그 손을 붙잡자, 넨시가 팔을 놓아주며 이야기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너무 늦지 않게 올게.”
“편히 즐기다 오십시오. 성은 걱정하지 말고요. 주인님과 주인마님께서 이만큼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도 처음이로군요.”
곧이어 마차가 내성을 벗어났다.
캐서린은 꾸벅꾸벅 졸며 마차에 기댔다. 제대로 잠들지 못한 몸이 피로감을 호소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로렌디스와는 딴판이었다.
캐서린이 앉은 자세가 불편해서 몸을 자꾸만 추스르는데, 로렌디스가 서류를 읽다 말고 시선을 뒀다.
“왜, 왜요?”
“왜 당신이 나를 어려워하냐는 그런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던 중이었어.”
어려워한다는 걸 알긴 아는구나. 캐서린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턱을 괬다. 그럼 다 알면서 그간 집요하게 굴었나?
로렌디스는 시큰둥하지만, 그게 그가 매사에 시큰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로렌디스는 무덤덤하되 집요했고, 지겨워하면서도 그 길만 고수했다.
캐서린 앞에서는 무덤덤하면서도 뒤에서는 집요하게 굴었고, 전쟁을 지겨워하면서도 그 길을 걸어왔다.
마차를 서로 마주 보고 앉아서일까. 그 시선이 적나라하게 꽂혔다. 그래서 캐서린은 창밖을 보며 시선을 피했다.
마차가 제도에 들어섰다. 제도의 건물 양식이 헬렌과는 달라서, 비교하기가 수월했다. 높은 건물을 지나자 광장이 나왔다.
“바로 타운하우스로 가겠나?”
“오늘 전야제가 있다고 그랬나요?”
“행사 전날 밤이니까 열릴 거야.”
로렌디스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저녁에 다시 나오자며 답했다.
* * *
야시장으로 거리가 어수선했다. 로브를 덮어쓰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팔뚝을 강하게 당겼다.
“길 잃어.”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예전에 헬렌에서도 이러면서 길을 잃은 적 있었는데……. 물론 그때는 제임스 박사를 찾느라 위험 의식이랄 게 없었다.
“겁도 없지.”
제도의 밤거리는 빛으로 수놓은 듯 화려하고 웅장했다. 등불을 밝혀서 가게마다 걸어 두고, 그 가게가 일직선으로 쭉 펼쳐져 있었다. 꼭 별빛이 땅 아래로 스며든 것 같았다. 캐서린은 피식 웃어 버렸다.
“홀린 듯 보게 되네요. 등불을 올릴 수 있대요.”
로렌디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저기’ 하며 낮게 읊조렸다. 상인들이 등불을 만들어서 팔고 있었다. 거기에는 제국의 황실을 나타내는 태양이 그려져 있었다. 등불에 불을 밝히자 황금빛의 태양이 붉게 물들었다.
“해 보고 싶나?”
등불을 밝혀 올리고 빤히 올려다봤다. 넋 놓고 보고 있자니, 온 신경을 다 빼앗길 것 같았다. 그쯤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원래도 어수선했는데, 거기에 거친 고함 소리가 겹쳤다.
“강도야!”
“강도다! 근처에 경비대가 없는가!”
로렌디스는 무심하더라도 기사였다. 캐서린은 등불만 올려다보며 로렌디스에게 물었다.
“다녀오실 거죠?”
“기사단을 보내도…….”
“그래도 신경 쓰일 건데요?”
캐서린이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호위대가 곧장 따라붙어서 캐서린을 경호했다.
“금방 다녀올 거야.”
“여기 있을게요. 다녀오세요.”
그의 뒷모습을 잠깐 흘긋거리고 가만히 올려다봤다. 등불은 밝고 깨끗했다. 검은 하늘을 은은히 수놓는 게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래서 바로 옆에 다가서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누가 캐서린에게 접근했다.
“오오! 이게 누군가?”
캐서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시죠?”
“뭐야. 나를 몰라?”
사내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카를로 캐빈! 나를 잊었다고?”
캐빈 백작가.
매매혼으로 얽힐 뻔했던 집안.
그 집안의 아들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