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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58)화 (58/129)

58.

“이번에는 폐하께서 단호히 찾으셨습니다.”

로렌디스가 아직 헬렌에 머물고 있다. 전장으로 떠났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아직은 그러기 전이었다.

그럼 건국제에 참석해서 황실에 얼굴을 비추는 게 법도에 맞다. 그 사실을 떠올린 캐서린은 제도가 있는 남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나도 가야 할까?”

“주인님께서 혼자 가시기엔 모양이 이상하잖습니까. 결혼도 하셨는데, 그런 중요 행사에 홀로 참석하다니요?”

“하긴 내가 참석하는 게 맞겠구나.”

이제 결혼한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길다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짧다고 말할 시간도 아니었다. 넨시가 푸근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우리 마님께서 걱정이 많으시군요.

“마님께서 아직 바깥을 나가기 두려워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으음……. 그래 보이니?”

“내켜 하지 않는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래도 마님께서는 헬렌의 안주인입니다. 그러니 헬렌의 안주인이 누구인지 보여 주십시오.”

넨시가 헬렌에 큰 자부심을 느끼는 건 안다. 그 자부심이 넨시를 헬렌에 머물게 하는 것 또한 알고.

“건국제의 규모가 어느 정도일까.”

“칠일제로 이루어집니다. 그동안 황실에서는 창고를 열어서 술과 음식을 베풀고, 제국민들과 건국제를 같이 즐기죠. 외부적으로는 그렇고, 마님께서는 건국제 첫날 열리는 연회에만 참석하면 됩니다. 내로라하는 중앙귀족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거든요.”

“으음. 사람이 많이 오는구나.”

“그래서 황실에서도 크게 신경 쓰는 날이죠. 마님께서는 편히 다녀오셔도 됩니다. 폐하께서 주인님을 특별히 아끼시니 큰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캐서린은 어설프게 입가를 가렸다. 폐하께서 로렌디스를 특별히 아끼니까 걱정되는 거다. 그의 눈에는 캐서린이 여전히 부족해 보일 거니까. 아직도 네가 거기 있냐고 이야기할 것 같다. 그런데 폐하, 저는 지금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해요.

“찾아야겠지…….”

“누구를요?”

“아버지.”

넨시는 아차 하며 입가를 가렸다.

“이런. 죄송합니다.”

“넨시가 사과할 일은 아니야.”

“찾을 겁니다. 부친께서도 분명 길을 찾아서 오실 겁니다.”

넨시도 대강의 상황을 들어서 캐서린의 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그런데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진 못했다.

‘마님께서는 무슨 심정이실까.’

넨시로서도 섣불리 캐서린의 속을 끄집어내서 읽지 못했다. 부모를 잃은 자식의 마음을 읽어 내기란 어렵다.

부친의 소식이 들려오고, 마님께서도 거의 넋이 빼놓고 지냈다. 먼 허공을 바라보거나, 침실에 스스로를 격리하거나, 길 잃은 눈으로 내성을 거닐었다. 그리고 지금은 또, 평소처럼 돌아오셨다.

“전대 헬렌 공작께서 실종된 건 언제였는지 아니?”

“10년이 조금 넘었죠. 각하께서 워낙 어린 시절에 실종되어서 헬렌도 어수선했습니다. 지금이야 질서를 되찾았지만, 그때는 여기저기서 승냥이 떼가 헬렌을 노리며 달려들었거든요.”

10년 전이면 로렌디스도 어릴 때이다. 그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각하께서 오래 찾아 헤맸죠. 차마 말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분이 무슨 심정으로 전장을 떠돌고, 그곳을 지키는지 그 심정을 무슨 수로 이해하겠습니까?”

“그래서 내게 그런 이야기를 했구나.”

긴 기다림은 희망이 아닌 절망이 돼서 사람을 절벽으로 내몬다고. 직접 겪었던 로렌디스라서 꺼냈던 이야기다. 그는 캐서린에게 현실을 직시하라 이야기했다. 허상 속에 잡혀서 기대를 부여잡고 버티지 말라고. 그게 나중에 더 비참해질 거니까.

‘아버지, 그런데요.’

보고 싶다는 마음이요.

쉽사리 놓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없다고 여길 때가 좋았어요.’

차라리 죽었다고, 애도하며 떠나보낼 때가 나았다.

혹시나 살아 있는 건 아닌가? 고민하는 스스로가…….

‘비참해요. 아버지는 어떻게 버틴 거예요?’

그 길을 헤매며 차라리 죽여 달라 하지 않은 건 왜예요.

“나 같은 건 그냥 놓아도 됐는데.”

“마님…….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넨시가 캐서린 앞에서 우려를 표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 속에 너무 깊이 빠져드는 것 또한 위험했다.

“보고 싶어.”

그 마음만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냥 기다릴게요.

때가 되면 와 주세요. 그거면 돼요.

캐서린은 희게 웃으며 몸을 추슬렀다. 눌러 담고 눌러 담으면 된다. 그게 무어 어려운 일이라고. 자주 하던 일이었잖아.

* * *

캐서린은 화장대에 앉아서 머리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내일이면 제도로 간다.

“무슨 생각 중이야?”

로렌디스가 침실을 찾았다. 집무실을 늦게까지 지키는 것 같더니, 이제야 일이 끝난 모양이다. 캐서린은 화장대에서 돌아앉았다.

“제도는 여전히 낯설어서요.”

“재밌는 이야기네.”

“제도는 갈 일이 없잖아요. 낯설 수도 있죠?”

“그것도 그렇고. 너는 헬렌도 낯설어하잖아.”

“그렇게 이야기하면 할 말은 없지만요.”

당신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저도 할 말은 없네요. 캐서린이 화장대에서 머리를 다듬자, 로렌디스가 다가와서 흰 리본으로 묶어 주었다.

잘 때 머리가 걸리면 불편해하잖아. 묶고 자. 그런 이야기를 해 주는데, 목덜미에 숨이 닿았다.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처럼 굴면서 꿈도 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표정으로만 봐도 다 보여.”

캐서린은 리본으로 묶은 머리를 한쪽으로 넘겼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손끝과 닿았다. 스치듯 닿은 손끝에 시선이 머물렀다.

로렌디스의 굵은 손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캐서린은 머뭇거리다 로렌디스를 빤히 올려다봤다.

“왜 그런 표정이야?”

“내가 어떤 표정인데요?”

“나도 그걸 모르겠으니까 이야기하는 거지. 나는 당신 속마음을 읽기가 어렵다니까.”

이미 몇 번 꺼냈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는 건 그만큼 캐서린이 의미심장하단 뜻이겠지.

“씻었나?”

“씻었어요.”

“그럼 됐어. 이리로 와.”

화장대에서 뻣뻣하게 일어나는데, 허리에 감긴 손이 단단했다. 천천히 뒷걸음치자, 로렌디스와 보폭이 엉켜서 몸이 허물어졌다. 주저앉듯 다리에 힘이 풀리는데, 로렌디스가 허리에 감은 손에 힘을 더 단단히 주었다.

“왜 그래요?”

“안고 싶어서.”

담백하게 나오는 이야기에 어깨가 굳었다.

“당신 그런 이야기 잘 안 하잖아요.”

“너는 필요 이상으로 복잡해지는 경우가 많아. 그런데 꼭 그럴 필요도 없어. 부부가 부부관계를 이어 나가는 데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

아이를 가질 것도 아니면서, 밤마다 이루어지는 부부관계는 여전했다. 우리는 계속 이 관계를 이어 나갔다. 몸에 부담이 되는 건 아니지만, 유난히 집요하게 구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이를 가지고 싶은 거예요?”

“이야기했잖아. 당장 아이 생각은 없다고. 나는 솔직히 후계가 없어도 좋지만, 가문에 필요한 건 맞아. 그래도 당장 요구할 생각은 없어. 그럴 몸 상태도 아니잖아.”

로렌디스가 그런 이야기를 한 건 맞다. 아이는 당장 가지지 못한다. 나중에 때가 되면 아이를 갖긴 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다. 그래서 후계 계획도 뒤로 미뤘다.

그럼 부부 관계도 미뤄 두는 게 맞잖아. 왜 계속……. 캐서린이 헐거워진 침의를 붙잡는데, 로렌디스가 손아귀 하나로 어깨를 감싸고 다시 내렸다.

“그냥, 이렇게 지내고 싶어서 그래.”

캐서린은 물끄러미 시선을 내렸다.

“안 되나?”

“안 된다는 게 아니라요. 당신이 집요하게 구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서요.”

“다른 이유는 없어. 왜 계속 이유를 찾으려 들어?”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목덜미에 닿는 손끝이 서늘하면서도 따뜻했다. 모순적이다. 차가움과 따뜻함이 같이 공존한다는 게 가능할 리 없잖아. 그런데 그렇게 느껴진다. 그래서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그 몸이라도 잡아 두어야지.”

“…….”

“어디 떠날 마음을 덜 품을 것 아니야.”

캐서린은 흠칫했다.

“내가 떠나긴 어딜 떠난다고요. 당신이 이미 잡아 두었잖아요?”

“내가 잡아 뒀으니까 어딜 떠날 마음을 안 품지. 잡아 두지 않았다면, 너는 스스로 그 삶도 포기했을 애잖아.”

목덜미에 닿는 숨이 짙다. 질척해서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캐서린은 어깨를 웅크리며 피하려다가 그의 어깨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붙잡았다.

“안아 주세요.”

캐서린은 복잡했던 머릿속을 비워 냈다. 꾸역꾸역 밀려오던 잡념이 사그라졌다.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이리 와.”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무릎에 앉혔다. 캐서린은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몽롱하게 비워진 머릿속은 새하얀 도화지 같았다.

그냥, 이대로 지낼까? 이대로 지내도 되잖아. 캐서린은 스스로 삶을 놓았다. 그 삶을 부여잡은 게 로렌디스였다. 그럼 로렌디스를 따라가면, 다른 길이 보이려나?

어지러운 머릿속은 잠시만이라도 비워 놓자. 간단하잖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야. 그의 어깨에 뺨을 묻었다. 그러고 한참을 있었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허리를 쓸어내렸다. 커다란 손바닥으로 등을 쓰는데, 그게 묘한 안정감을 가져다줬다.

뺨을 기대고 숨을 쉬자, 그의 목덜미에 닿은 숨결이 흩어졌다. 얕은 심장박동 소리도 들려왔다.

“캐서린.”

그가 캐서린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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