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뎐트가 도포 자락에서 손을 빼냈다.
“인간의 살고 싶다는 욕망은 상상 이상이야.”
죽음 앞에서 사람은 쉽사리 생을 포기하지 못한다. 악착같이 버티며 그 명줄을 붙잡는 게 인간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
“본인은 인간이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네…….”
캐서린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뎐트가 호오? 하며 탄식했다.
“나름 눈치가 좋구나. 나는 그저 이곳에 있을 뿐이다. 너희와는 다르지. 아아, 혹시나 야만인들의 지배자가 모두 나 같다는 걱정은 말아라. 그 지렁이와 비교되는 꼴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으니.”
뎐트는 어딘가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저 홀로 존재할 뿐이다. 그런 느낌이 든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막연한 거리감.
뎐트가 뒷짐을 지며 캐서린에게 몸을 가까이 가져왔다. 고개를 숙여서 어깨 바로 옆에서 턱을 비트는 모습이 기괴했다.
“너는 흥미로운데 슬픈 기색이 다분해. 죽지 못해 사는구나. 이상하게 여길 것 없어. 그저 눈에 보여서 이야기하는 거니까.”
너는 여전히 슬프고, 현실 속에 안주하지 못했다. 그 다리로 바닥을 디뎠지만, 바닥이 언제 꺼질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보기가 안쓰럽구나.
뎐트가 끌끌대며 턱을 쓸었다. 뎐트는 젊은 외모를 유지 중이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괴리감이 흘렀다. 그 행동도 노인처럼 굼뜨고 느릿했다.
“그렇게 떠나고 싶으면 꺼내 줄까?”
“무슨 뜻이야?”
“도망가게 도와주지. 답답함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데, 여기서 꺼내 주는 건 해 줄 수 있다.”
캐서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여기를 떠나고 싶지만, 헬렌 공작이 억지로 잡아 둔 게 아닌가? 네 눈은 이미 도망가길 택했다. 어디든 도망가서 숨어 버리고 싶잖아. 헬렌 공작만 아니었어도, 어디 땅으로라도 꺼졌을 표정인데…….”
뎐트는 지적하고 있다. 로렌디스 때문에 떠나지 못했지만, 로렌디스 덕분에 이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고. 너의 의지는 삶을 포기했지만, 다른 누군가가 그 삶을 억지로 이어붙였다고.
뎐트는 기이한 기분이었다. 저 심정을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라기엔 지나치게 초연하다. 삶과 죽음이 오고 가는 전장이라면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는 헬렌이다. 헬렌 공작이 직접 지키는 북부의 성.
“그놈 아니었으면 진작 죽었겠군.”
“…….”
“스스로라도 목숨을 끊었을 녀석이야.”
이건 혼잣말이었다.
“못 들은 거로 하거라.”
“저기 있잖아.”
“이야기해라. 네 딱한 운명을 안쓰럽게 여겨서 질문 두어 개는 받아 줄 테니까.”
캐서린은 마지못해 참았던 물음을 꺼냈다.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요.”
“괜찮아. 이야기해.”
“몇 살이에요?”
“존댓말인가?”
뎐트는 옷소매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그 모습은 가벼우면서도 익살스러웠다. 입안에 마른침이 고였다.
“몇 살이든 일단 그대보다는 오래 살았지.”
“이방인들은 다 그래……요?”
“쯧쯧. 그런 갯지렁이와 누구를 비교하는 거냐? 아아, 물론 나도 야만인이 맞지만, 그렇다고 그들과 내가 같다는 건 아니야.”
이 대화를 오래 끄는 건 위험하다. 아주 위험해. 본능이 그를 멀리하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본능이 뒤이어 덧붙인다. 너는 멀리하고 싶어도 멀리하지 못한다.
“나중에 봐. 또 보게 될 거야.”
“싫어요.”
“아니. 너는 나를 찾게 될 거야. 그리고 울면서 빌겠지. 밑바닥에 처박혀 울음을 토해 내는 모습이 보여. 그럼 혹시 모르잖아? 우는 아이에게 뭐라도 하나 더 챙겨 줄지 말이다. 나는 우는 아이에게 관대하거든.”
뎐트가 조용히 읊조리며 턱을 쓸었다. 그의 손이 스치듯 캐서린에게 닿았다. 툭툭,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뒷짐을 졌다.
“진짜 몇 살이세요?”
“너보다는 오래 살았다. 성질 더럽다고 욕하지 말거라. 이 세월 살다 보면 심술이 고약해져서 말이다. 대화가 길어졌군.”
지겹다. 지겨워. 이 갯지렁이들 꿈틀대는 허리를 잘라다 묶어 버릴까. 중얼거리던 뎐트가 조용히 떠났다. 발걸음 소리도 고요했다. 뎐트가 작정하고 기척을 지운 듯, 기척이 사라졌다. 맥없이 몸이 허물어졌다.
“마님!”
그쯤 데보라가 서둘러 다가와 캐서린을 감싸 안았다.
* * *
뎐트는 턱을 쓸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살려 주십시오. 아닙니다. 나를 죽여도 좋습니다……! 나를 죽이겠다면 죽이되, 시체라도 헬렌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저는 돌아가야 합니다!’
‘어째서?’
‘저를 기다리는 아이가 있습니다.’
뎐트의 걸음이 멀어졌다. 헬렌을 떠난 발걸음이 설원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는 텅 빈 설원을 내다보며 그 위를 걸었다.
‘너는 사는 걸 택했다. 그런데 그 결정을 죽는 날까지도 후회할 거다.’
‘후회해도 좋습니다.’
‘그래. 살려 보내 주마. 저 길로 따라가면 된다. 너는 허망함만 좇다 스스로 말라 죽어 갈 것이다. 그 죽음은 절대 편치 못할 거고, 그 속에는 비참함만 가득하겠지. 그래도 한 번 버텨 내 보거라.’
너는 허망함을 좇다가 쓰러질 운명이다. 그 길에는 실망감이 가득하고, 목적지는 절벽이며, 너는 그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게 될 거다. 그런 운명이라도 좋다면, 악착같이 살아남아라. 그게 인간의 의지 아니더냐.
“둘째 도련님!”
“지겹군.”
뎐트는 상념을 지워 냈다. 지겹고 따분하다.
“지렁이야. 말 걸지 말아라. 불쾌감에 네 목을 꺾어 버릴지도 몰라.”
“수장께서 찾으십니다.”
“그 건방진 놈이 나를 오라 가라 하느냐? 그놈은 제 선조를 보필하는 법을 잊었어.”
뎐트는 웃으며 발을 뗐다.
그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그저 이곳에 있을 뿐이지.
이 지렁이들이 꿈틀대다 저들끼리 공멸하더라도, 그는 그저 이곳에 있을 뿐이다.
* * *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자 다시 아침이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캐서린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캐서린은 침대에 우두커니 앉았다.
“마님, 넨시입니다.”
넨시가 캐서린이 깼는지 확인하러 왔다. 문틈을 조심스럽게 벌리고 안을 확인하더니, 캐서린이 침대에 앉아 있는 걸 보고 들어왔다.
“깼는데 왜 답이 없으십니까? 세숫물을 준비해 드릴까요?”
“고마워.”
“기운이 없으십니다.”
넨시가 걱정스럽게 캐서린을 살폈다. 걱정하는 마음은 고맙다. 그런데 캐서린은 그런 시선조차도 버거웠다. 세숫물로 가볍게 씻고 침실에 홀로 남았다.
‘침실 안에서는 혼자 있어도 된다더니.’
이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된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캐서린은 픽 웃어 버렸다. 그 의미가 좋을 리 없다. 허망함에서 나온 탄식이었다. 이젠 어떡하지. 나도 내 마음을 읽어 내기가 어렵다.
뭘 원하는지도 어렵다. 캐서린 스스로도 원하던 게 크게 없었다. 기껏 해 봐야 이혼 뒤 요양을 떠나는 거나, 안식을 얻었으면 좋겠다던 게 다였다.
‘그냥 쉬고 싶은 게 다인데…….’
이제는 그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캐서린.”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찾았다. 캐서린은 침대에 앉아 있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침 일찍 어디 다녀오는 길이에요?”
“가볍게 연무장에 다녀오던 길이야.”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
“식사 아직 안 했지?”
“배가 안 고파서요. 안 해도 될 거 같아요.”
입안이 텁텁해서 입맛도 없는데. 캐서린이 어색하게 답을 피하자 로렌디스가 넨시를 불렀다.
“침실에 식사 자리를 마련해.”
“알겠습니다, 주인님.”
거절하고 싶다. 그런데 빤히 내려다보는 그 시선을 차마 피하지 못했다. 너 하나 먹이겠다고 일하다 말고 여기까지 왔는데, 뭘 거절하겠다고? 삐딱하게 삐뚤어졌다.
“기다려도 답은 없을 거야.”
그 이야기를 꺼내는 목소리가 담백했다.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고 건조하게 흘러나왔다. 그 건조함이 귀에 닿을 때, 캐서린은 탄식하듯 입가를 더듬거렸다.
“일말의 희망만 보고 달리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고, 긴 기다림이야. 거기서 지친다면 지금까지보다 더 지옥 같은 시간이 펼쳐질 거고.”
그건 이미 그 시간을 지나 본 로렌디스이기에 이야기할 수 있다.
“돌아온다면 좋지만, 아니어도 편히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만 여겨.”
그게 네 마음에는 더 편할 거니까. 모두 잊지 못하더라도 잊은 듯 지내고, 운 좋게 재회하게 된다면 그저 기쁨으로 여겨라.
이건 겪어 본 이만 할 수 있는 이야기며, 그래서 그 무게감이 더 묵직했다.
“차갑네요.”
“몇 년 지내 보니까 그렇더라고.”
그 말을 끝으로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식사만 챙겨 주고 나갔다. 로렌디스가 떠난 자리는, 넨시가 대신 채웠다.
넨시는 캐서린에게 과일을 챙겨 주며 시간을 되짚었다.
“곧 그날이네요.”
“그날?”
“제국의 건국제 말입니다. 연중에 황실에서 여는 가장 큰 행사라서, 주인님께서도 얼굴을 비추십니다.”
캐서린은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로렌디스가 참석한다면 같이 가야 되려나.
“사람이 많이 오니?”
“물론입니다. 제국의 중앙귀족들은 모두 모일 겁니다. 물론 주인님께서는 거의 참석하지 못했지만요…….”
“참석 못 하는 경우가 많았던가?”
“많다마다요. 참석하는 게 원칙적으로는 맞지만, 각하께서 자주 피해 다녔습니다. 그 시기만 되면 전장으로 가 버리거나, 성 순찰을 목적으로 설원을 살피시거든요.”
그럴 때면 테슬러는 ‘네 이놈! 네놈은 내가 죽어서야 얼굴 한 번 편히 보여 줄 작정이냐!’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런다고 별수 있나. 헬렌의 주인께서 영지의 안위를 살핀다는데, 그게 꼭 변명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넨시가 말끝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