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그날 캐서린은 지독한 허상을 겪었다.
캐서린이 죽은 세계에서, 밀던 자작은 수십 년을 건너서 살아 돌아온다. 그런데 그 세계에 딸아이는 없다.
그 세계에서 딸아이는 죽었으며, 아이가 죽은 이유도 알아내지 못한다. 아이는 이미 땅에 묻혔고, 밀던 자작은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
아이를 닮은 여인이 주군의 곁을 지키고, 아이가 없다.
아이의 자리가 없다. 아이의 빈자리가 자작을 반겼다.
‘네가 왜 거기 누워 있냐.’
네가 왜.
네가.
거기 있어.
* * *
나한테 왜 그래. 다들 나한테 왜 그러냐고요.
작은 안식을 바랐다. 시한부 삶을 안 뒤에도 캐서린이 바란 건 안식 하나뿐이었다. 스스로 이혼 이야기를 꺼낼 때도 그랬다.
‘여기를 떠난다면 쉴 수 있겠지.’
그때 비로소 쉬겠지. 그런 마음으로 결혼에 임했다. 남편이 전쟁에 올라 자리를 비우고, 혼자 헬렌을 지킬 때도 그랬다. 그런데 왜, 왜 쓰라리지. 왜 바닥에 처박힌 기분이야.
“으으으…….”
어디서 기인해 오는 절망감일까. 폐부를 깊게 누른다. 가슴속이 뻐근했다. 바닥까지 처박히고 몸이 엉망진창으로 구른 것 같다. 캐서린이 울먹거리며 침실 벽을 짚자, 넨시가 다급하게 캐서린을 부축했다.
“마님!”
“잠, 잠시만 혼자 있고 싶어.”
로렌디스가 침실에서 지내라고 할 때, 그냥 여기서 안에서만 지낼 걸 그랬다. 캐서린은 더듬거리며 벽을 짚고, 침대 아래에 주저앉았다. 보송보송한 융단 카펫에 무릎을 대고 주저앉자, 시야가 좀 더 높아졌다.
‘나는 어쩌고 싶은 걸까?’
찾고 싶어? 찾으면 좋지. 그런데 찾지 못하면? 뎐트가 이야기해 준 건 아주 작은 희망이자 아주 작은 절망이다. 기대는 희망과 절망을 같이 가져다준다. 찾으면 다행이지만, 찾지 못한다면? 기대가 불러온 절망은 무슨 수로 감당하지.
“어떤 쪽이든 너무 슬프잖아.”
캐서린은 머리를 무릎에 묻었다. 그러고 잠든 것 같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가 눕혔지?’
누가 다녀가는지도 모르고 잠들었다. 시야가 어둑했다. 해가 졌구나. 캐서린이 침대 시트를 더듬거리며 짚고 일어서자, 누군가 침대 위에서 캐서린의 이마를 눌렀다.
풀썩.
몸이 침대 위로 꺼졌다. 긴 금발이 흩어지고, 캐서린은 맥없이 쓰러졌다. 옷은 이미 침의로 갈아입었다. 이건 또 누가 갈아입혔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점점 머릿속이 공허해졌다.
“아무 생각 말고 자.”
“로렌디스?”
“그래.”
“언제 왔어요?”
로렌디스는 답하지 않았다.
“찾는 시도는 꾸준히 하던 중이었어.”
캐서린은 움찔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건, 괜한 기대를 걸게 하는 건 아닌가 해서였고. 나 또한 그런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까.”
헬렌 공작이 야만족 토벌 중에 실종된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다. 선대 헬렌 공작이 실종되고, 로렌디스가 공작위를 이어받기까지. 그 모든 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로렌디스는 그 말을 끝으로 캐서린의 이마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캐서린은 숨죽여 울었다. 아파. 아프잖아. 이건 너무 하잖아.
‘혹시 살았을까?’
‘죽었다면 어떡해?’
혹시나 하는 가능성이 가장 지독하다.
“으으으…….”
1년이면 괜찮다. 2년이어도 괜찮다. 그 기간이 짧았다면 캐서린도 기다릴 수 있다. 기대해 볼 수 있었다. 그랬다면 일말의 희망을 품어 볼 만했다. 그런데 10년이다. 앞으로 시간은 더 흐를 거고, 그 기간 동안 살아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가장 지독한 건, 마냥 내려 두기에는 미련이 남았다는 거였다.
혹시나.
아주 혹시나 하는 가능성이 캐서린을 밑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 * *
“헬렌이 조용하군.”
뎐트가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소파에 앉았다. 배상금 협의가 끝나고, 이만 이들의 땅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뎐트는 곧은 손가락으로 목을 두들기며 로렌디스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이방인이 헬렌에 머물러 봐야 좋을 건 없지. 나는 이만 돌아가려는데, 용건은 다 끝났나?”
“실컷 들쑤셔 두고 떠난다고?”
“내가 못 할 이야기를 한 기억은 없는데?”
로렌디스는 서류를 덮어 두고 뎐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 이야기는 왜 꺼냈나? 살아 있을지 죽었을지도 모를 부친의 소식을 그딴 식으로 전해?”
“이봐. 헬렌 공작, 내게 인간다움을 바라지 마라.”
야만족은 싸우기 위해서 태어났다. 헬렌에서 이들을 토벌하려는 시도를 몇 번 했다. 그 부족의 맥을 끊으려고 토벌단도 보냈고. 그런데 그뿐이었다.
짐승 떼처럼 잡으면 하나둘 무리를 지어 모였다. 이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까웠다.
“기억 속에 묻어 둔 얼굴이 떠올랐을 뿐이야.”
뎐트는 됐다며 손을 저었다.
“원래는 못 만날 인연이었다. 엇갈리고 또 엇갈려서 네가 원한을 많이 사는구나. 잃은 자의 아픔은 네가 다 헤아릴 수는 없지. 이번에도 원한을 많이 살 듯 보이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그게 네 운명이지.”
“너…….”
“그런데 이번에는 모르겠어.”
뎐트가 희게 웃었다.
“무슨 뜻이지?”
“해석은 너의 몫이다. 내게 해석까지 해 달라 하지 말아라. 아이도 아니고.”
뎐트는 킥킥대며 도포 자락으로 입가를 훔쳤다. 검은색 연꽃이 그려진 도포는 이질적이면서도 뎐트에게 잘 어울렸다.
제 핏줄과 제 수하를 갯지렁이라 부르는 야만족.
스스로를 야만인이라 얕잡아 부르는 사내.
뎐트가 붉은 적안을 곱게 접었다. 헬렌이 여기에 자리를 잡기 전부터, 야만족은 존재해 왔다. 그 분쟁은 헬렌이 있기 전부터 이어져 왔다. 그 이후로도 야만족은 헬렌에 막대한 배상금을 가져다줬으며, 헬렌이 북부의 주인으로 자리 잡게 했다. 그래서 헬렌은 불가침의 영역이 됐고, 황제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이 됐지만…….
“그대들은 왜 싸우는 거지?”
“이유가 있나? 야만인은 싸우기 위해 태어났다. 태어났으니 싸우는 거지.”
뎐트는 떠날 채비를 끝내며 몸을 추슬렀다.
“하긴, 지렁이들이 꿈틀대어 봐야 지렁이지.”
야만족은 싸우기 위해 태어났다.
“쾌락과 흥분을 좇는 데 이유가 있나?”
“…….”
“충분한 설명이 됐나 모르겠어.”
“됐다. 이유 따위 없다는 거지.”
야만족의 이단아.
뎐트 칸.
스스로 제 핏줄을 죽여서 헬렌의 기사를 몇몇 살려 보내고, 그러면서도 야만족에 몸을 담은 인간.
“네가 이어받으면 안 되나?”
뎐트 칸은 저런 갯지렁이를 이어받아서 어디에 써먹냐며 거절했다. 배상금을 협의하러 올 때마다 느꼈지만, 뎐트는 스스로를 야만인이라 부르면서도 그 부족과 섞이지 않는다. 홀로 존재할 뿐이었다.
“헬렌 공작.”
뎐트는 뒷짐을 지며 일어섰다. 이만 가려는지 천천히 걷다 말고 로렌디스에게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황후를 조심해라.”
“뭐?”
“첫째 지렁이와 야합이라도 한 모양인데, 그게 그대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않을 듯하여서.”
뎐트는 이 지겨운 이야기는 이쯤 해 두자며 침묵했다. 정치 이야기는 따분하고, 거기에 얽힌 귀족들은 더더욱 따분하다. 뎐트는 이만 떠난다며 자리를 비켰다.
* * *
“뎐트 칸이 곧 떠난다더군요.”
넨시가 넌지시 캐서린에게 소식을 전했다.
“응. 배상금 논의가 끝났다더니 곧장 떠날 건가 봐.”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못할 이유도 없으니까.”
억지로 눌러 참는다면 참을 수 있다. 그건 캐서린이 평생 해 오던 일이니까. 이제 와서 어렵다고 할 것도 없다.
넨시는 차마 더 이야기하지 못했다. 잊고 싶다고 잊는 게 아니다. 괜찮다고 괜찮아지는 게 아니다. 사람은 마음 가는 대로 그 감정을 가지고 놀지 못한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지금처럼 비참해질 일 또한 없지.’
캐서린은 고요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벽 한쪽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구경하는 거야?”
“으음. 들켰군. 의외로 기감에 예민해.”
캐서린은 지붕 아래에 가만히 서 있었다. 벽에 기대서 마른하늘만 올려다보는데, 뎐트가 다가왔다. 뎐트는 희게 웃으며 캐서린과 눈을 맞췄다. 캐서린보다 키가 두 뺨은 더 컸다.
“작별 인사하러 왔는데 표정이 별로야.”
“…….”
“왜, 꺼져 줬으면 좋겠나?”
뎐트는 거리낌 없이 웃었다.
“헬렌은 올 때마다 따분한데 그래도 이번에는 즐거웠다.”
당신에게 즐거울 일이 어딨지. 나는 그런 즐거움을 준 적은 없는데. 표정을 찌푸릴수록 뎐트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건 인간다움과 거리가 멀었다. 괴이하고 이질적이었다. 창백하고 서늘한 낯이 희게 개었다.
뎐트는 오늘이면 떠난다. 배상금 이야기가 끝났고, 일단은 포로 신분이었다. 오래 헬렌에 머물러서 뎐트에게도 헬렌에게도 좋을 건 없다.
뎐트는 지겹다며 표정을 찌푸리면서도, 흥미롭다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런 모습 또한 이질적이었다. 지금도 온몸으로 지겹다는 내색을 풍기면서도, 희게 웃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뭐지?”
“아버지는…… 어땠어?”
묻고 싶지만 묻지 못했던 이야기다. 그 소식을 묻고 싶지만 꺼내는 게 더 두려워서, 마음속에 묻어 두었다. 그걸 억지로 끄집어내서 다시 물 위로 올려 낸 게 뎐트다.
“네 아버지 이야기를 왜 내게 묻나?”
“……나도 잊고 싶었어. 그런데 그런 심정 따위 나 몰라라 하고 이야기한 게 당신이었잖아.”
묻어 둔 건 현실을 피하고 싶어서였다. 그 현실을 똑바로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스스로 묻어 두길 택했다. 캐서린이 혼자서 짊어지기엔 무거운 짐이었으니까.
뎐트는 그런 캐서린을 내려다보다가 나지막하게 되물었다.
“내가 묻지. 가족이 뭐라고 그런 절망감을 품지?”
뎐트는 이미 알았다. 그 이야기를 꺼내면 기대감과 절망감을 같이 품게 될 것을.
“기쁨은 잠깐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런데 절망감은 눈에 보이는 법이지. 나는 네 아버지에게서 절망감을 봤다. 그 미래에서든 그 과거에서든.”
뎐트가 끌끌대며 되물었다.
“내게 할 이야기가 더 남았나?”
“…….”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