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마지막까지 참았다. 참아 내고 참아 낸 결과는 분노였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서, 결국 눈물을 흘렸다.
“저런. 못 왔구나.”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하나다. 설원에서 실종돼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 이제는 잊고 싶지만 잊지 못한 사람.
전쟁에 참전해서 시신조차 거두지 못하고, 전사자로 기록된 사람. 캐서린의 아버지였다.
“내 아버지를 봤어?”
“어떨까?”
뎐트는 어떤 식으로 사람을 긁고 자극해야는지 잘 알았다. 그 감정을 처박아 버리면 된다. 사람을 밑바닥에 처박는 건 쉽다. 약점을 자극하고, 역린을 건드리면 된다.
“내가 그자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일까?”
“너, 무슨 짓이야!”
“으음, 이건 약한가? 표정이 약하구나. 조금 더 자극할 수 있겠는데. 어떤 방법이 있을까?”
차라리 이곳에 없어서 죽었다고 여기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래야 나도 아버지를 떠나보내기 쉽다.
마음속에 간직한다고 그 사람이 살아오는 게 아니었다. 때로는 이별도 마음의 준비를 해 둬야 하는 법인데…….
“최악이야.”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지.”
캐서린은 붉어진 눈시울을 숨기지 않았다. 어쩐지 뎐트가 이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게 느껴져서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뎐트가 호오?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도포 자락 속에서 흰 손가락이 나왔다.
“부녀가 닮았어.”
“아버지를 본 거야?”
“죽어 가던 그를 봤지. 추위에 얼어 죽든, 야만족에게 찢겨 죽든. 차라리 찢겨 죽는 게 덜 아플 텐데 아등바등 애쓰더라고.”
뎐트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설원에서 아버지를 봤고, 흰 눈 속에 파묻힌 설인처럼 걷던 모습이 안쓰러웠다고.
야만족에게 쫓겨 온몸에 피를 칠하고 걷는데, 그의 걸음걸음마다 피가 떨어졌다고. 그 몸은 얼어붙어서 언제라도 죽을 것 같았는데, 숨이 질겼단다. 그게 뎐트의 호기심을 이끌었고 호기심은 아버지를 살리는 쪽을 택했다.
“내가 그 지렁이들의 주인인데, 흐음……. 우는 꼴이 안쓰러워서 살려 줬지. 야만족을 따돌려서 도망갈 길을 열어 주었고.”
새하얀 눈밭에 피를 흘린다는 건, 어디로 도망가는지 도주로를 알려 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아버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숨이 막혔다. 숨을 제대로 쉬는지,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머리가 공허해졌다.
“피, 피를 많이 흘렸어?”
“전쟁 중에 실종됐는데, 그 정도도 예상하지 못했나?”
“그럼 쫓겨도 사람들에게 금방 알잖아……!”
듣지 말걸 그랬다. 차라리 그랬다면 속이라도 더 편했을 건데, 이걸 왜 들어서 눈물을 보였을까.
“죽였지.”
처음에는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뎐트의 희고 매끄러운 미소를 보자 소름이 오싹하며 돋았다.
“누구를?”
“따라오던 이들을.”
“너는 야만족의…….”
“그 핏줄에 애정이 없어서. 셋째 아들은 지금쯤 눈밭에 파묻혀서 얼어붙었으려나? 10년도 더 됐지만 시체는 그대로 보전됐겠군.”
뎐트는 지금 제 손으로 형제를 죽이고, 제 수하를 죽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형제의 죽음을 입에 담으면서도, 그는 무덤덤했다.
“내가 네 형제를 죽였나? 왜 사색이 됐지? 이봐, 네 아버지가 그들에게 죽을 위기였는데, 동정심을 느껴? 인간은 너무 나약해.”
뎐트는 제 형제의 죽음에 안타까움 따위 느끼지 않는다. 스스로를 야만족이라 칭하면서도, 같은 핏줄을 죽여 버리는 잔혹함이라니.
‘너무 비인간적이잖아.’
헬렌의 기사단인 굳건하고 예리한 칼날이라면, 뎐트는 숨죽인 칼날이었다. 그 칼날은 고요했지만 그런데도 위협적이었다.
“애석하지.”
캐서린은 덜덜 떨리는 어조로 되물었다.
“어째서?”
“뭐든.”
“무슨 뜻이야?”
“언제 끝날지도 모를 설원을 걷고 걷다가 짐승을 만나서 죽거나, 눈 속에서 얼어 죽거나. 그 시기만 더 늦춰질 뿐이지. 운이 좋아서 다시 재회했다면 기뻤겠지만.”
뎐트가 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못 만났군. 흐으음…… 안쓰럽구나. 만나지 못할 인연인데 서로를 너무 그리워해. 너는 네 아버지가 일찍 사망했길 바라거라. 지금도 살아 있다면, 네 아비에게는 그게 더 혹독할 거니까.”
10년이란 시절이 흘렀잖아. 뎐트가 픽 웃으며 캐서린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 순간 몸을 사로잡았던 오싹함이 멀어졌다. 데보라도 캐서린을 급하게 끌어당겼다. 캐서린은 압박감에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그나마, 데보라가 불러 준 덕분에 뒤늦게라도 압박감에서 빠져나왔다.
“아아…….”
캐서린은 오열했고 뎐트는 그 자리에서 맑게 웃었다.
* * *
“로렌디스.”
홀린 듯이 뛰고 보니까 로렌디스의 앞이었다. 캐서린은 울음을 가까스로 삼키고,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 알았어요? 알았냐고, 못다 한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물어도, 묻지 않아도 캐서린의 속이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내게 할 이야기가 있나?”
“있어요. 할 말이 있는데…….”
꺼내기가 무섭다. 캐서린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입술을 깨물며 가까스로 막았다. 겨우 내뱉은 목소리는 발악에 가까웠다.
“나를 다시 저 밑바닥에 처박아 버릴 것 같아서.”
“두렵나?”
“두려워요. 두려운데…… 그런데도 가만히 묻어 둘 수 없어요. 가만히 묻히는 게 더 무서워요.”
다가올 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죽음을 목전에 뒀을 때보다도, 시한부 삶을 인지하고 결혼매매로 헬렌에 붙잡혔을 때도, 이 정도로 두려운 적은 없었다. 그때는 끝이 보였으니까 덜 두려웠다.
“뎐트 칸, 그 남자를 봤어요.”
“내가 가까이하지 말라 이야기했는데, 내 경고가 부족했나?”
로렌디스의 시선이 데보라에게 닿았다. 막지 않고 뭐 했냐는 뜻이었다. 데보라는 송구하다며 답을 피했다.
“뎐트 칸이 직접 마님을 찾았습니다.”
뎐트 칸이 나섰다면, 데보라가 막기 어렵다. 로렌디스가 곁에 없다면, 그 녀석을 막을 사람 또한 없고.
야만족과 전쟁이 이어진 건 100여 년이다. 뎐트를 봐 온 것도 십수 년이다. 로렌디스는 그만큼 뎐트를 잘 알았다.
뎐트는 헬렌에 배상금을 논하러 오면서도, 제 부족들을 생각하는 건 뒷전이었다. 헬렌에 큰 유감도 없었다.
‘빠르게 해결 보지. 따분한 건 질색이다.’
로렌디스는 상념을 접어 두었다. 그런 인간이라서 그 속을 읽기 어렵다 했는데, 로렌디스는 다시금 되물었다.
“캐서린 나는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어째서 그 녀석과 얽힌 거지?”
“그 사람이 내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어요.”
데보라가 흠칫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눴습니까?”
“데보라도 가까이 있었잖아요?”
“듣지 못했습니다. 놈의 목소리는 뱀을 닮았습니다. 음습하고 탁하죠. 넋 놓고 듣다간 그대로 홀려 버립니다.”
이전에도 그랬다. 모두들 캐서린의 곁에 있지만, 뎐트가 작정하고 뭔가를 이야기할 때는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넋 나간 눈빛으로 캐서린을 챙기며 뒤에 숨겼지. 그게 이상하긴 했는데…….
“됐으니 자리를 비켜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로렌디스가 데보라를 물렸다.
“캐서린.”
묵직한 목소리가 캐서린을 불렀다. 로렌디스가 얄상한 턱을 붙잡고 캐서린과 똑바로 마주 봤다.
“사람이 이야기할 때는 눈을 보는 거다.”
굵은 손가락이 캐서린의 뺨을 붙잡고 고정했다.
“울었나?”
로렌디스가 붉어진 눈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뎐트를 보내고 부랴부랴 이곳으로 왔다. 그건 이성을 따른 게 아니라 본능을 따랐다. 여기로 오면 그 답을 찾을 것 같아서. 캐서린은 가슴을 더듬거렸다. 무자비한 압박감에 가슴속이 뻐근했다.
“그럼 이제 이야기하지.”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턱짓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이야기하라. 캐서린은 뎐트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로렌디스에게 했다. 뎐트가 아버지를 뵀고, 아버지께서 설원에서 헤매다 사라졌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나?”
“차라리 아니라고 해 주세요. 아버지께 너무 가혹하잖아요.”
그 긴 시간을 홀로 헤맨다니. 왜 그런 시련을 주는데요. 우리 가족이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해요.
캐서린은 눈을 부릅뜨고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차라리 그 순간 편안히 눈을 감길 바랐다. 그게 아버지께 더 나은 선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살아 있을까요?”
“너는 어떨 것 같은데.”
캐서린은 그 이야기에 울지 못했다.
“진짜 살아 있으면 어떡해요?”
“무슨 뜻이지?”
“혼자 그 시간을 헤맸잖아요. 그 시간을 홀로 보냈어요. 그렇게 오래 헤매다가 외딴곳에서 죽었으면, 안쓰러워서 어떡해요?”
“네 이야기대로 살았을지도 모르지.”
그건 죽었다는 사실보다 더 가혹했다.
그 숨이 일찍 끊겼다면 고통을 겪을 일도 없다. 그런데 뎐트 칸의 개입으로, 아버지는 이번 생을 이어 나갔다.
캐서린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우는 얼굴도 웃는 얼굴도 아닌 표정으로 허망하게 넋을 놓았다.
“나, 지금 아빠 두고 혼자 죽으려 한 거예요?”
그럼 있잖아요. 내가 죽었는데……. 만약 그때 아버지께서 죽지 않고 살아오셨다면, 아버지는 제 소식을 들었을까요?
“캐서린?”
“나 기뻐해야 해요? 아니면 슬퍼해야 해요?”
그 길 헤맸으면 어떡해. 헤매다 지쳤으면 어떡해. 돌아올 길도 찾지 못해서, 죽음을 바랐으면 어떡해. 턱 끝까지 울음이 치밀어 올랐다. 아파. 가슴이 너무 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