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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54)화 (54/129)

54.

뎐트 칸.

뎐트가 뒷짐을 지고 서서 캐서린을 내려다봤다. 데보라가 발끈하며 뎐트의 앞을 막아섰다.

“무례는 삼가세요, 뎐트!”

캐서린은 데보라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의를 환기했다.

“놔둬요, 데보라.”

“마님, 그래도…….”

“악의는 느껴지지 않네요.”

약한 몸은 악의나 나쁜 감정에 쉽게 반응한다. 타고난 기운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남자에게서는 그런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캐서린은 이미 저 남자를 안다.

“뎐트 칸?”

“나를 알아?”

“집무실에서 스치듯 봤어.”

“아아, 헬렌 공작이 이야기해 줬군.”

뎐트가 맑게 웃었다.

“응. 남편이 전쟁터를 그렇게 들쑤시고 다닌 이유잖아.”

뎐트가 턱을 긁으며 고개를 기울이더니 무던하게 답했다.

“네 남편이 전장을 떠도는 건 내가 아니라, 내 아버지 때문이다.”

“그게, 그거 아니야?”

“아니지. 아니야. 이 부분은 바로 짚지. 어리석은 아버지께서 요즘 헬렌을 들쑤셔서 귀찮은 건 나다.”

캐서린은 고개를 기울였다.

“야만족은 전쟁을 즐기던 게 아니었어?”

“미치광이가 많지. 피에 미쳐서 같은 부족 내에서도 칼부림이 나니까. 내 아비와 형이라는 족속도 그렇고. 거기서 9할은 미치광이야.”

본인은 아니라는 듯 이야기한다. 그런 캐서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뎐트가 무미건조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아니야.”

“…….”

“전쟁은 귀찮거든.”

뎐트가 긴 은발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읊조렸다.

“대신, 우는 소리를 따라다닐 뿐이지.”

“어?”

“우는 얼굴이 좋거든.”

로렌디스가 뎐트와 얽히지 말라 한 이유를 깨달았다. 뎐트는 야만족의 이단아였다. 그 입으로 하는 이야기들이 결코 평범한 부류는 아니었다.

“울어 봐.”

뎐트가 눈매를 비틀었다. 그 삐뚤어진 눈매가 기묘하게 접혔다. 적안이 짙게 빛나며 내려앉았다.

“잘 어울리지 싶어.”

“당신 조금…….”

“미친 듯싶다고?”

예전에 로렌디스가 얽히지 말라고 한 의미가 저런 의미였나? 뎐트는 숨을 고르더니, 맑았던 표정이 금방 건조해졌다.

“흥이 깨졌다.”

그의 입이 고요히 닫혔다.

“따분하군.”

뎐트에게서서는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서늘한 느낌이 강할 뿐이었다. 뎐트는 단정하고 무던했다.

그런데도 캐서린의 몸이 약하게 굳었다. 그걸 알아차린 데보라가 뎐트의 앞을 막아섰다. 그 시야에서 빠져나오자, 그제야 숨이 터졌다.

뎐트는 지루하다는 어조로 속삭이듯 읊조렸다.

“헬렌 공작이 심심한 여인을 만났어.”

캐서린은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나비 같은 게 날개를 꺾어 버리면 주저앉아 버릴 것 같구나. 공작은 어디를 꺾었을까? 네 의지로 앉은 건 아닌 듯한데.”

뎐트는 허리를 숙여 캐서린과 눈을 맞췄다. 검은 도포가 펄럭이자, 창백한 피부가 드문드문 드러났다.

그 도포에는 연하게 연꽃이 그려져 있었다. 흰 연꽃이 도포가 날릴 때마다 같이 날아갈 것처럼 펄럭였다.

“가까이 오지 마.”

“으음. 내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나?”

그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긴 은발이 캐서린의 뺨에 닿았을 때, 캐서린은 움찔하며 몸을 사렸다. 데보라가 발끈하며 외쳤다.

“마님께 말씀을 조심하십시오!”

뎐트가 그제야 데보라를 발견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지만, 그 존재감을 무시하고 있었던 거다. 뎐트는 데보라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너는, 헬렌의 강아지구나.”

“이봐요. 내가 그 호칭 그만 쓰라고 했잖아요.”

“강아지를 강아지라 하지. 그럼 뭐라고 할까. 헬렌의 강아지는 오늘도 열심히 주인을 따라다니네.”

뎐트는 데보라를 보며 히죽 웃었다.

“눈 속에 파묻혀 죽어 가던 너를 끄집어내서 헬렌과 거래할 때만 해도 작고 귀여웠는데, 다 크니까 징그러워.”

데보라는 캐서린을 의식하며 입술을 다물었다. 캐서린은 데보라에게 손을 뻗었다.

“나 좀 일으켜 줄래요?”

데보라가 캐서린을 붙잡고 일으켰다.

“두 사람 구면인가요?”

캐서린이 묻자 뎐트의 시선이 다시 캐서린에게 닿았다.

“눈 속에 파묻혀 죽어 가던 걸 꺼내서 헬렌 공작에게 가져다줬지. 그 대가로 우리 집 지렁이의 목숨도 받아 냈고.”

뎐트는 심드렁하게 비꼬며 중얼거렸다.

“이들 중 대부분이 설원에 빠져 죽을 뻔할 때, 꺼내서 헬렌에 데려다준 게 나였어.”

“어째서?”

“나는 이단아거든.”

뎐트가 히죽 읏으며 캐서린을 내려다봤다.

“그나저나, 내가 이 얼굴을 어디서 봤더라.”

그는 미약하게 표정을 찌푸리더니, 곧은 손가락이 눈가를 더듬거렸다. 손톱도 가지런하고 말끔했다.

뎐트가 두어 걸음 물러나서 거리를 벌렸다. 그래도 뱀처럼 휜 눈이 캐서린에게 향한 건 여전했다.

“울어 봐.”

“뭐?”

“울어 보라고. 그럼 알 것도 같고.”

가지런한 손톱이 캐서린의 눈가에 닿았다. 그 손톱이 눈가를 쓸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몸에서 차가운 한기가 흘러나왔다.

캐서린은 갑작스러운 한기에 멈칫했다. 다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는데 그의 눈꼬리가 접혔다. 마치 ‘이것 봐라?’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이런 눈을 가진 아이들은 울면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뺨이 붉어지는데……. 붙잡아 두고 괴롭히고 싶어져.”

“떨어져.”

“말이 그렇다고.”

뎐트가 됐다며 손을 휘휘 흔들었다.

“나중에 또 봐.”

뎐트가 매끄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포로이지만, 포로이면서 동시에 손님이었다.

로렌디스가 그의 이동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는 건, 손님으로서 예우를 지켜 준다는 뜻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전에 이야기한 사유 때문이지 싶고.

‘이 사람이 살려 보내 준 헬렌의 기사들이 여럿이구나.’

문득 그런 예감이 든다. 데보라만 살려 보낸 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여럿 살려 보냈다고. 이단아라더니 약간 이상한 사람 같다고.

뎐트는 흐으음, 하며 숨을 고르더니 심드렁하게 그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됐다.”

뎐트는 이번에도 흥이 깨졌군, 라고 홀로 중얼거렸다.

“이만 가지.”

뎐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뒷짐을 졌다. 오만하게 턱을 세운 뎐트가 멀어졌다. 뚜벅뚜벅 걷는 걸음걸이가 가벼웠다.

기척도 점점 사그라졌다. 아직 눈앞에 있는데 이상하게 그 기척이 흐릿해졌다.

서늘한 기운도 가셨다. 그 멀어지는 뒷모습을 빤히 보던 캐서린은 안색이 창백해진 걸 늦게야 깨달았다.

“우리도 이만 가요.”

* * *

뎐트는 걷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바람 소리까지 잦아들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의 입술이 찢어져라 벌어졌을 때는, 손아귀에 가느다란 목이 잡혀 있었다.

“컥!”

하인 하나가 목을 붙잡고 캑캑댔다. 헬렌의 개는 제 주인의 뒤를 따라다니느라 바쁜데, 이 개는 어느 집 개일까.

“이런, 우리 집 지렁이가 사람을 보냈나?”

“일정만 끝나는 대로 귀환하라는…….”

뎐트가 손을 비틀자 하인의 목이 꺾였다. 뎐트의 감시를 맡은 하인의 입에서 탄식이 터졌다.

그 목을 꺾어서 손톱으로 긁자 손끝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그는 그 손을 털어 냈다. 따분해. 지겨워.

뎐트는 희게 웃으며 익숙한 기척을 따라 몸을 돌렸다. 건물 뒤에서 조용히 따르던 헬렌의 개들이 움찔거렸다.

“걱정 마라.”

“…….”

“너희 목은 안 건드린다.”

뎐트는 싱겁다며 손을 털어 내고 턱짓했다.

“시체나 치워라. 더러운 게 발길에 차이니 기분이 별로야.”

“내부에서는 소란을 자제해 주십시오.”

“미안해. 다음에는 조심하지.”

뎐트는 피를 닦은 손수건을 바닥에 버렸다. 헬렌의 여주인, 멸망한 왕국을 이어받은 헬렌과 그 헬렌의 여주인이라.

언제라도 목을 꺾어서 목숨을 취할 만큼 여린 여인이 그 전장귀의 아내라. 뎐트는 턱을 손톱으로 쓸었다.

“아아. 기억났다.”

뎐트는 살포시 웃었다.

* * *

“짐작하기 어려운 성격입니다. 그래서 각하께서도 뎐트 칸을 대할 때는 피곤해하시고요.”

데보라가 캐서린의 어깨에 숄을 덮어 주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각하께서도 따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말을 섞어 봐야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데보라는 걱정된다며 그 이후에도 경고하듯 이야기했지만, 캐서린은 또다시 뎐트와 부딪쳤다.

의도적으로 접근해 오는 사람을 피하라는 건 솔직히 캐서린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산책 겸 후원을 찾자마자 그에게 뒤를 밟혔다.

“안녕?”

후원에서 혼자 바람을 쐬는데, 소리 소문 없이 그녀의 목덜미가 잡혔다.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데보라가 검집에 손을 올렸고, 기사 몇몇이 빠르게 반응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가 드디어 기억났어.”

캐서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를 어디서 봤는지 말이야.”

“나는 그쪽을 본 적이 없는데?”

“그럼 당연하지. 나는 전쟁터 아니면 설원에서 지냈으니까.”

뎐트가 캐서린의 턱을 손톱으로 긁었다.

“내가 설원에서 지낼 때, 중년의 사내를 만났어. 온몸이 얼어붙은 듯 보이는 사내였는데, 야만족, 우리 부족에게 쫓기고 있었지.”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는 캐서린에게만 들렸다.

“내가 그자 앞에 나타났을 때, 울먹거리더군. 죽으면 안 된대. 딸아이가 기다린댔나? 가족애라는 게 뭔지, 죽음 앞에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들더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억지로 억눌러 둔 불안감을 건드린 대가였다. 참고 참았던 둑이 터졌다. 너 이 개자식. 욕설이 터져 나왔다.

울먹거리며 붉어진 눈시울을 보고서야, 뎐트는 만족스럽게 탄식했다. 봐 봐. 역시 우니까 어울리잖아.

“그래서, 설원 한쪽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가랬지. 그럼 더 이상 야만족에게 쫓기진 않을 거라고. 길을 찾는다면 사는 거고, 찾지 못한다면 죽는 거고.”

“…….”

“그래서, 돌아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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