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캐서린이 집무실을 떠나고, 뎐트가 한 번 더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각하, 뎐트 칸이 찾아왔습니다.”
‘칸’은 야만족 지배자의 핏줄을 의미했고, 뎐트 칸이 뎐트의 풀 내임이었다. 로렌디스는 뎐트의 뻔뻔한 낯을 보며 타박하듯 읊조렸다.
“그대는 언제 봐도 지겨운 얼굴이야.”
“너무하군. 포로로 잡혀 온 건 나인데, 왜 그대가 더 지겹다고 그래?”
로렌디스는 상석에 앉아서 뎐트를 맞이했다. 뎐트는 빈 집무실을 둘러보며 로렌디스의 앞에 앉았다.
“멈췄던 배상금 이야기를 다시 해야 할 것 같은데.”
“앉아서 이야기하지.”
뎐트는 조금 전에 멈췄던 배상금 이야기를 다시 이어 나갔다. 무신경하면서도 무던한 대화가 이어졌다.
둘 사이의 대화가 끝나 갈 무렵에는, 두 사람 다 지겨워서 표정이 사라졌다. 뎐트는 긴 은발을 빗어 내렸다.
“그래도 배상금을 너무 많이 요구하는데…….”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걸어온 건 칸이었다.”
뎐트가 도포 자락 안으로 팔을 넣더니 지겹다며 흥얼거렸다. 그건 포로라기보다는 놀러 온 손님 같았다. 하긴, 헬렌에서는 그를 손님처럼 대하긴 한다.
‘이 남자가 헬렌으로 살려 보낸 영지민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칸의 민족이라며, 뎐트는 같은 야만인으로 불리지만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죽어 가는 기사들을 수습해서 돌려보내거나, 길 잃은 방랑자를 수습해서 헬렌으로 돌려보내거나, 특이한 인간이었다.
“이상한 놈이군.”
“이런. 헬렌의 핏줄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진 않다만.”
로렌디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얼마나 머무를 예정이지?”
“느긋하게 쉬고, 배상금 논의만 마무리되면 떠나야지.”
“포로라더니 속 편하군.”
“설원은 고요하고 지루하거든. 오늘 이야기가 끝났으면 이만 일어나도 되나? 그대의 얼굴을 보는 것도, 설원에서 눈 위를 걷는 만큼 지겨운 일이거든.”
뎐트는 느지막하게 은발을 쓸었다. 매끈매끈한 은발이 그의 손아귀에 감겼다. 로렌디스는 이만 나가라며 손을 내저었다.
“방을 내어 주지.”
“고마워.”
“그럼 가서 쉬어.”
브레디가 집무실 문을 열어 주었다.
“정중히 대접하거라.”
“네. 각하.”
뎐트는 나가려다 말고 조금 전에 봤던 여인을 떠올리며 물었다.
“헬렌 부인을 봤는데, 아내 맞나?”
“이상한 질문인데. 내가 헬렌 공작이면 헬렌 부인은 내 아내가 맞지.”
“그대와 별로 안 어울리던데 결혼은 왜 했나?”
뎐트는 지나가듯 본 캐서린을 떠올리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로렌디스는 미약하게 표정을 찌푸렸다. 그런데 순식간에 지나간 변화라서 금방 갈무리됐다.
“호오?”
어렴풋이 기억나는 인상만 떠올려도 알 만했다. 로렌디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었다. 저 거친 사내와 지내기엔 청초하달까.
뎐트는 삐뚜름하게 턱을 기울였다. 말간 낯에 이채가 실렸다. 언젠가 제국의 이상한 귀족문화를 들은 기억이 났다.
“여기 귀족들은 정략결혼이라는 걸 하던데, 그런 쪽인가?”
“비슷하지.”
“억지로 데려와 앉혀 뒀군.”
로렌디스의 손이 멈췄다. 그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뎐트가 끌끌 대며 턱을 긁었다.
“성정이 나비처럼 보이던데, 언제 날아가더라도 못 잡겠어.”
뎐트는 히죽대며 로렌디스를 비웃었다. 뎐트가 나가려고 문손잡이를 잡는데, 로렌디스는 잊을 뻔했다며 뎐트의 뒷모습에 대고 이야기했다.
“헬렌 안에서 무기 소지는 안 된다. 보좌관에서 무기 맡겨 두고 나가.”
“이런, 들켰군. 보기보다 깐깐해.”
뎐트는 품에서 단도를 꺼내서 브레디에게 맡기고 나갔다. 브레디는 익숙하게 단도를 받아서 보관함에 넣어 두었다.
* * *
니콜이 캐서린의 눈앞에 손을 휘저으며 물었다.
“무슨 생각 중이십니까?”
니콜은 캐서린에게 억제제 한 알과 물 잔을 같이 내밀었다. 캐서린은 억제제를 먹고 물로 입을 헹궜다.
“제임스 박사는 어디 가고, 니콜이 내 몸을 볼까 하고 고민 중이었어.”
니콜은 제임스의 조수로 진료동에 머물고 있고, 제임스를 대신해서 간단한 처치를 도와주는 중이었다.
“스승님께서는 연구실에 계십니다. 마님께서 다행히 회복됐지만, 구체적인 회복경로가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요.”
요즘 데니스 교수와 제임스 박사가 연구실에서만 지내서인지, 진료동 자체도 조용했다. 캐서린은 조용한 진료실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억제제로 덕분에 치료된 게 아니었어?”
“억제제 덕분도 있지만, 그것만 먹는다고 회복된다면 살사초가 살사초라 불릴 리 없잖습니까?”
제임스는 데니스를 따라서 연구실에 갔고, 최근 니콜이 캐서린의 전반적인 진료를 맡았다. 거창하게 치료랄 것도 없다. 몸의 상태를 그때그때 기록하는 건 니콜로도 충분했다.
제임스는 연구실을 다니느라 바빴다. 제임스는 캐서린이 회복된 걸 축하하면서도, 스스로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왜 회복됐지?’
진료실을 우연히 한 번 찾았었는데, 제임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걸 듣게 됐다. 누굴 두고 한 말인지는 뻔했다. 여기서 지금 아픈 사람이라고는 캐서린뿐이었으니까. 캐서린은 그때를 떠올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내게는 기껏 살려 뒀더니, 그게 왜 낭패냐며 타박하더니.”
니콜은 대화를 피하며 되물었다.
“각하와의 관계는 어떠세요?”
“평소와 같아.”
“마님이 회복되는 중이더라도, 한 번 독에 중독됐던 몸이에요. 아이에게 아주 치명적일 수 있으니까 한동안은 조심…….”
니콜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하나다.
캐서린이 후계 이야기를 꺼내며 사소한 오해가 빚어졌다. 결혼한 뒤에도 헬렌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며, 캐서린이 지금 위치에 불안해한다고 사람들이 착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류의 불안감이 아닌데도.’
그저 내 자리가 아닌 곳을 내가 탐해도 될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었다. 처음부터 여기는 나중에 다시 돌려줘야 할 자리였고, 그 사실을 의심해 보기엔 캐서린도 많이 지쳤었으니까.
“그런데, 내 몸에 독 내성이 있다는 게 이상한 거야?”
“독에 내성을 쌓으려면, 독을 먹을 때도 계산적으로 먹어야 해요. 그런데 그런 경우가 아니잖아요? 전문가가 붙어서 계산적으로 쌓은 것도 아니고, 기사들처럼 체격이나 체질이 뛰어난 편도 아니고요. 더군다나 사람을 해할 목적이었잖아요? 악의적으로 독을 우려서 먹였는데, 몸에 이미 내성이 있었다는 게…… 조금 이상하죠.”
니콜이 말을 고르고 고르더니 어렵게 말했다.
“결론은 다행이에요.”
“그런가?”
“기적이에요. 솔직히.”
캐서린은 홍차를 다 마시고 찻잔을 내려놨다.
“진료는 끝났습니다. 이만 나가 보셔도 돼요. 피임약은 각하께서 신신당부하셔서 못 드리고……. 마님께서는 억제제만 꾸준히 드세요.”
니콜은 그거면 충분하다며 캐서린에게 억제제를 챙겨 줬다. 캐서린은 이 상황이 우스워서 허망하게 눈동자만 깜빡거렸다. 처음 여기까지 올 때만 하더라도, 혼자서 떠나는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떠나지 못할 때는 도망가는 미래를 그렸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미래인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 * *
그다음 날, 캐서린은 후원 들판을 찾았다.
“맨바닥에 누우면 안 됩니다, 마님. 바닥이 차갑습니다.”
캐서린이 들판 중앙에 자리 잡은 나무에 기대서 꾸벅꾸벅 조는데, 하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캐서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으음. 안 되나?”
“아랫것들이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깔 것이라도 가져오라 이야기하겠습니다.”
캐서린은 뻐근해진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하녀들은 서둘러 깔 것을 가져왔지만, 의식은 이미 반쯤 잠겼다.
“마님. 그래도 일단 깔 것을…….”
선잠이 들락 말락 했다.
“으음.”
“마님?”
마음 쓰지 마세요. 그냥 눈만 붙여도 돼요. 나는 지금 삭막하고 피곤한 거거든요. 한가로이 나들이를 나온 게 아니라고요.
‘그런 예법 필요 없어.’
가만히 누워 있으니까 어제 오후 니콜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진료동을 막 나설 때, 니콜이 신신당부하듯 이야기했었지.
‘피임 꼭 하세요.’
‘조심할 거야.’
‘진짜. 진짜. 두 번 세 번 조심하셔야 해요. 아이는 나중에요.’
니콜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실감 났다. 나, 진짜 회복됐구나.
회복되기 전에도, 회복된 후에도 피임은 중요했다. 로렌디스는 이전부터 홀로 피임을 했었다. 그런데 연명 치료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때와, 삶의 질을 위한 선택은 다른 법이니까. 니콜은 한 번 더 강조했다.
‘아이는 나중에요.’
캐서린은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럼 나는 이제 뭘 하고 싶을까? 계모를 치웠고 자작가를 얻었다. 그럼 그다음에는…….
꾸벅꾸벅 조는데 오싹한 바람이 불었다. 옷이 얇았나. 헬렌은 평소에도 추운 곳이라서 옷을 가볍게 입고 다니진 않았는데. 캐서린이 어깨를 더듬거리며 옷을 추스르는데,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캐서린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좀 춥네.”
“추우면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같았다. 그늘진 나무 아래가 어쩐지 더 어둑해진 것 같고. 오싹한 한기가 척추를 쓸었다.
“마님,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캐서린은 눈을 급하게 떴다.
“넨시?”
“네. 마님.”
“뭔가 한기 같은 게 느껴지지 않니?”
그 물음에는 수습 보좌관 데보라가 대신 답했다.
월계수 기사단의 출신이었다가 임시로 캐서린의 수습 보좌관으로 파견된 아이였다.
“……다른 객이 와서 그렇습니다.”
데보라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겼다. 캐서린이 몸을 파르르 떠는데 얕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기감에 예민한 아가씨로군.”
누군가 다가왔다. 그리고 데보라가 서늘한 기척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왜 여기 계십니까!”
“포로지만 신변의 자유는 보장된 것으로 아는데?”
“거동은 자유로워도 된다 그랬지만……!”
“그대의 주군이 내 걸음을 막지 않았는데, 한낱 기사가 내 걸음을 막는가?”
검은 도포 자락과 긴 은발이 익숙했다.
이곳에 포로로 머물고 있다는 야만족의 아들 뎐트 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