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캐서린은 보자마자 울컥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 사진이 담긴 액자였다. 투박한 액자에 아버지 사진만 덩그러니 담겨 있었다. 그 사진도 빛이 바랬고, 10년도 더 돼서 낡고 여기저기 망가졌다. 그나마 캐서린이 관리해 줄 때는 먼지나 흠집은 없었는데…….
“죄송해요, 아버지.”
마차가 소리 없이 출발했다. 로렌디스는 맞은편에서 캐서린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캐서린은 한동안 잠자코 액자를 만지작거렸다. 사진 속 아버지는 늙지 않고,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게 당연한데, 어쩐지 마음 한쪽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 * *
침실 창가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참 먼 길 돌아오셨어요.’
캐서린은 소매로 액자를 닦았다. 그 모습을 보던 넨시가 새 액자를 구해다 줬다. 캐서린은 새로 받은 액자에 아버지 사진을 다시 넣었다. 어색하지만 그래도 새 액자라 그런지, 깨끗하고 단정했다.
로렌디스와 헬렌으로 돌아온 지 하루가 지났다. 캐서린이 테라스에 앉아서 액자를 만지작거리는데, 넨시가 웃으며 편지를 가져왔다.
“마님, 모리켄 부인께서 편지를 보냈어요.”
“무슨 편지?”
“따뜻한 지방으로 요양을 떠났는데, 안부 인사 겸 편지를 보냈다네요.”
넨시가 은쟁반에 편지를 담아서 캐서린에게 내밀었다. 캐서린은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를 뜯어서 편지지를 꺼냈다. 이상할 노릇이다. 편지지에 온기가 담겨 올 리 없는데, 편지지가 따뜻했다.
캐서린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풀어졌다. 넨시는 그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른 읽어 보세요. 마님?”
“고마워.”
흰 편지지였다. 거기에는 보라색 드라이플라워가 동봉되어 있었다. 캐서린은 드라이플라워를 들어서 은쟁반에 살며시 올려 두었다.
“이건 책갈피로 만들어 주겠어?”
“물론이지요, 마님! 만들어서 드리겠습니다.”
흰 편지지에는 검은 글씨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깔끔한 필기체로 가벼운 안부 인사부터 묻는 모리켄 부인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안녕하셨나요. 마님. 저는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예정한 대로 요양길에 올랐습니다. 늙은이가 너무 오랜 기다림으로 지치기 전에, 남편이 돌아와 줘서 얼마나 감사한 줄 몰라요. 마님께서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여기는 야생화가 참 아름답게 펴서, 꽃을 몇 개 따다가 말려서 보내 드려요.]
그 뒤로도, 모리켄 부인은 부르면 언제든지 찾아간다는 이야기와 행복하라는 덕담을 적어서 편지를 마무리 지었다.
“따뜻한 분이구나.”
넨시는 능숙하게 드라이플라워로 책갈피를 만들어서 가져다줬다. 캐서린은 다이어리에 책갈피를 꽂아 넣고, 편지지는 접어서 서랍장에 다시 넣었다.
“가족들 소식은 좀 어때? 계모나 의붓언니가 좀 말썽을 일으킬 때가 됐는데.”
“수도원에서요? 걱정 마십시오. 절대 못 그럽니다.”
“그래?”
“네. 얼마나 철저하게 통제되는데요. 혹시, 가족들 소식이 궁금하세요? 그럼, 주인님께 부탁드리는 방법도 있겠군요.”
“크게 궁금한 건 아닌데, 음, 그냥 얼굴이나 볼 겸 다녀와도 되겠네.”
캐서린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로렌디스는 아직 집무실에 있는 거지?”
“네. 지금 가 보시려고요?”
캐서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테라스에서 나왔다. 걸음을 딛자 데보라가 따라붙었다. 로렌디스가 붙여 준 수습 보좌관이었다.
“그런데, 데보라는 보좌관이 아니라 호위가 아니었나요?”
데보라와는 구면이었다.
데보라는 캐서린이 헬렌 영지에 처음 오고, 한라원을 찾아갈 때 호위로 따라나섰던 여기사였다.
“각하의 수습 보좌관을 겸하는 기사입니다.”
로렌디스가 수습 보좌관을 보내 준다고 한 뒤로, 담당관으로 보내 준 게 데보라였다. 캐서린은 익숙한 얼굴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뒤로 자주 못 뵀는데…….”
“헬렌 거리에서 마님을 한 번 놓친 적이 있었잖습니까. 그때 자숙기간을 가졌습니다.”
데보라는 별일 아니라며 이야기했다. 그 목소리는 캐서린을 탓하는 게 아니다. 마땅히 자숙 받을 일이라며, 스스로 책임감을 되새기는 어조였다.
“나 때문에 죄송해요.”
“마님께서 사죄할 일이 아닙니다. 제가 실수한 거니까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집무실 앞으로 가자, 브레디가 캐서린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다른 보좌진도 캐서린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마님 오셨습니까?”
가주 집무실은 보좌관 사무실 내부에 있었다. 보좌관 사무실을 지나야 가주 집무실이 나왔다. 브레디가 움찔하며 안쪽을 흘끔거렸다.
“혹시, 제가 바쁜데 찾아온 건가요?”
“아닙니다. 안에 다른 손님이 와 있어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브레디가 집무실 문을 두들기고 먼저 들어갔다. 캐서린은 바깥에서 브레디가 나오길 기다렸다.
문틈이 서서히 벌어지고, 그 사이로 낯선 손님이 보였다. 긴 은발을 허리까지 늘어트리고, 검은 도포를 입은 손님이었다. 손님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더니 은은히 웃으며 로렌디스와 대화를 나눴다.
“…….”
대화를 듣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는 것 같았다. 브레디가 먼저 나와서 문을 열고, 캐서린이 들어가기 좋게 공간을 열어 주었다.
“각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적안이 가느다랗게 접혔다. 짐승의 눈알처럼 짙고 깊었다. 하얀 피부는 창백했으며, 긴 은발 때문에 서늘한 인상이 강했다. 검은 도포가 하얀 피부와 대조적이라서 눈에 띄었다.
뚜벅뚜벅 걷는 걸음이 점점 멀어졌다. 검은색 도포가 부드럽게 날리고, 남자의 기다란 손가락이 도포 자락 밖으로 아른거렸다.
* * *
캐서린이 집무실 한쪽에 앉자, 브레디가 차를 내왔다. 캐서린은 찻잔을 보며 ‘또 홍차네요.’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앉아서 기다려. 나 보던 서류만 마저 보고 잠시만.”
로렌디스는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캐서린의 맞은편에 앉았다. 로렌디스는 갑갑하게 맨 크라바트를 풀며 캐서린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마셔.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야?”
“손님이 와 계시는지 몰랐어요.”
“대화도 끝나 가는 무렵이어서 괜찮아.”
오늘 본 손님은 외모가 이국적이었다. 긴 은발과 적안은 캐서린도 처음 보는 생김새였다.
‘조금 위험하게 생겼지.’
위험한 기운이 흘렀다. 그 기운 자체가 평범한 인격체와는 달랐다. 조금도 춥고 어두웠다. 캐서린은 가까스로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가족들이 수도원에서 사고는 안 치는가 궁금해서 왔어요. 그런데 굳이 안 물어도 될 것 같아요.”
로렌디스가 수도원 부분을 읊조리더니, 잊을 뻔했다며 탄식했다.
“그자들은 아쉽게 됐어. 그 목숨을 또 연명했네.”
“내가 죽었으면 그때는 진짜 가족들을 다시 처벌할 생각이었어요?”
“그랬겠지. 그런데 너는 너무 쉽게 끝냈지. 그 손목을 끊어 내서 죄를 벌했어야 마땅했어. 아무튼…… 너는 사람이 너무 심약해.”
손목을 도려냈을 거라며 이야기하는 어조가 묵직했다. 겁을 주는 게 아니다. 그는 조금만 더 상황이 틀어졌다면, 그 손목을 끊어 내서 벌했을지도 모른다.
로렌디스는 험한 전장에서 구른 만큼, 그 성정도 온화한 쪽과는 멀었다. 그 사실을 잊을 뻔했다.
“못마땅하세요?”
“그렇지.”
캐서린은 이미 목숨을 내놨다. 죽음을 수용하면서 목숨을 남에게 내맡겼더니, 이런 결과가 도래했다.
캐서린이 삶을 내놨고, 그 삶을 다시 거둬 간 게 로렌디스였다. 네가 네 삶을 버렸으니, 그 이후의 삶은 내가 취할 거다. 그게 로렌디스의 입장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캐서린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로렌디스는 마땅히 개입할 것이다.
‘내 목숨에 몇 사람의 목이 걸렸을까?’
계모와 의붓언니 외에도 제임스 박사의 목까지 걸렸다. 한 사람의 목숨에 이만큼 무게를 달아도 될까.
“손님은 누구예요?”
“손님이면 조금 전에 나간 사람?”
“네. 오던 길에 봤는데 조금…… 이질적이어서요.”
“뎐트 칸이라고, 현 야만족 지배자의 둘째 아들이야.”
“그 사람이 왜 여기 있어요?”
“전쟁 배상금 합의를 위해서 잠깐 데리고 있는 거고 곧 떠날 거야.”
이름이 독특했다.
캐서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뎐트라는 이름을 곱씹었다. 기다란 은발에 검은 도포를 입은 모습은 캐서린이 보기에도 이국적이었다.
“깊게 얽히지 마.”
애초에 캐서린과 깊게 얽힐 일이 있나?
캐서린은 고개만 끄덕였다. 캐서린이 막연하게 떠올린 야만족은 근육질의 몸에 거칠고 사나운 인상이었는데.
“……야만족이라고요?”
“처음 보나?”
“네. 아무래도.”
야만족과의 전쟁 이야기는 이미 자주 들었다. 헬렌과 자주 부딪치며, 국경지대에 맞닿아 있어서 시시때때로 분쟁이 일어나는 부족이라고. 그래서 거친 무뢰배를 떠올렸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사내는 긴 은발을 허리까지 기르고, 검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눈동자는 붉었고, 몸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던 사내가 희게 웃을 때는 오싹했다.
야만족이라고 불리는 위치와는 다르게, 말끔한 인상이었다.
“내가 생각하던 것과 다르네요.”
“보통은 체격이 크고 단단한 근육질의 몸을 떠올리기 쉽지. 그게 맞긴 해. 대부분은 그렇고, 싸우다 보면 무식하게 검만 휘두르는 것들이 대다수니까.”
로렌디스는 지겹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오래도록 걸어오는 통에, 신경에 거슬릴 지경이었다.
“야만족은 부족사회야. 그 부족을 통솔하는 지배자가 나오기 마련이고, 은발은 지배자의 상징이지.”
캐서린은 조금 전에 나갔던 손님을 떠올렸다. 긴 은발이 가지런하게 날리던 모습이 환상처럼 뇌리에 남았다.
“젊네요.”
“지금 우두머리의 아들이니까. 첫째 아들을 인질로 보낼 수 없으니, 느지막하게 태어난 둘째 아들로 보낸 거지.”
야만족과의 전쟁은 남 이야기 같았는데, 가까이서 이렇게 맞닿는 건 처음이었다.
“아들 편으로 배상금 보내 두고, 또다시 지렁이 떼처럼 몰려들겠지. 꿈틀거리는 꼴이 지겹고 하찮아서…… 짜증 날 지경이야.”
로렌디스는 오랜 골칫거리를 이야기하듯 골치 아프다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소국이 대국을 건드려 이길 리 없다. 하물며 헬렌은 오래도록 북부를 지켜오던 북부의 수장이었다. 100여 년이 넘도록 이어 온 다툼이고, 그 오랜 앙금은 지금까지도 여전했다.
“그래서 지겹다고들 하는군요.”
“너도 저놈과는 얽히지 마. 저래 보여도 음습한 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