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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50)화 (50/129)

50.

“부주의한 너를 밖으로 내보내려면, 내가 더 주의하는 수밖에.”

“나는 부주의하지 않아요.”

“당신은 충분히 부주의해. 겪어 본 적도 없는 죽음 앞에서 초연한 게 얼마나 부주의한 짓인 줄 아나?”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다시 놓아줬다. 캐서린은 침의를 손으로 잡아 내리고 몸을 가렸다. 로렌디스와 침실을 같이 쓰며 몸을 섞는 날이 많았다.

몸을 섞는 데 거북함은 없다. 때아닌 자극으로 머릿속을 휘젓는 게 좋았다.

아랫배에 감도는 긴장감과 뱃속을 긁어 주는 자극까지. 그건 캐서린을 현실에 잡아 두는 자극제와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예전이나 그랬고.’

지금은 캐서린은 손아귀를 꽉 움켜쥐고 침대에 쪼그려 앉았다. 로렌디스는 그런 캐서린을 보며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다.

“데니스는 괜찮댔지만 역시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으려나.”

“네?”

“니콜이라는 여의사가 나를 붙잡고 당신 좀 작작 괴롭히라며 목을 내놓고 이야기하던데, 가까운가?”

캐서린은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로렌디스의 시선을 피했다.

“후계 말이야. 아이 가지는 건 1년이면 될 거라고 하던데. 몸도 거의 다 회복돼서 이젠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면 된다더라고.”

“그 이야기가 왜 또…….”

“후계를 입에 담은 건 당신이었잖아. 당신이 감당해야 할 일이야.”

후계 이야기를 캐서린이 먼저 꺼낸 건 맞다. 어디까지나 헬렌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으려고 꺼냈던 이야기인데, 그게 캐서린의 발목에 족쇄를 걸었다. 니콜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건, 로렌디스가 후계 작업에 진심이란 뜻이다.

“피임만큼은 확실히 하랬는데…….”

“네?”

“어려울 건 아니지.”

부부 관계를 맺더라도 피임만큼은 확실히 하라며, 넨시는 로렌디스를 불러다 경고했다. 넨시가 목을 내걸고 꺼낸 이야기이니만큼 무게감도 묵직했다. 그렇다고 로렌디스도 당장 무리해서 아이를 가질 마음은 없었을 거고…….

니콜은 그런 로렌디스에게 피임만 하면 된다는 면제권을 준 거나 다름없었다.

“피임은 내가 할 거야.”

“알, 알겠어요. 로렌디스, 나도 이해했으니까 그쯤 해 두세요.”

캐서린은 로렌디스의 입을 서둘러 막아 버리고 잊었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나를 가둬 둔 게 아니라면 잠시 나가고 싶어요.”

“어디를?”

“밀던……. 집에 다녀오고 싶어요.”

반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집을 잊고 지냈다. 계모와 의붓언니도 이제 없다. 자작저가 어떤지 한번 살펴봐야 한다. 로렌디스도 그 마음을 이해했는지 수월하게 수긍했다.

“그럼 같이 다녀오지.”

“같이요?”

“혼자 다녀올 생각이었나?”

캐서린은 어색하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같이 다녀와요.”

“그럼 내일 출발하면 되나?”

반년이다. 자작저를 찾지 못하고 보낸 시간이 무려 반년이다. 언제 다시 가게 될까, 시일도 모르고 막연하게 기다렸다. 다시 가기 어려울까? 그래도, 늦기 전에는 다시 가겠지? 그런 막연한 기다림이었다. 그런데 막상 가려니까 모든 게 쉽다. 이만큼 쉽게 풀릴 일이라니. 몸이 맥없이 풀려 버렸다.

* * *

자작저로 가는 길목을 다시 밟았다. 마차가 부드럽게 지나가고, 시골 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캐서린은 창문을 열고 창밖을 내다봤다.

“처음 헬렌으로 가던 길에, 비가 쏟아졌던 것 기억하세요?”

“그랬나?”

“천둥 번개까지 내려치는데, 헬렌의 기사들이 자작저로 밀고 들어왔잖아요. 은빛 갑옷이 철컥철컥하는데 솔직히 사형수 같았어요.”

나를 죽이려고 온 사형수. 시한부를 죽는다는 미래를 이미 알고 있어서, 솔직히 죽으러 간다는 느낌이 강했다.

“도착했어.”

“빨리 도착했네요. 솔직히 더 걸릴 줄 알았거든요.”

처음 헬렌으로 떠나던 길은 체감상으로도 멀고 험했다. 마음속에 무거운 짊을 짊어져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로렌디스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검은 제복을 입은 그는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캐서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고 내려.”

“친절하시네요.”

“얼마나 있다 갈 거지?”

“잘 모르겠어요.”

캐서린은 로렌디스의 부축을 받아서 마차에서 내렸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캐서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관리가 왜 이렇게 안 되어 있지.”

캐서린은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여기로 다시 돌아오더라도 혼자서 돌아오게 될 줄 알았다. 물론, 호위나 다른 동행인이 몇몇 더 있었겠지만, 그래도 로렌디스가 여기까지 같이 오게 된 건 캐서린으로서도 예상 밖이었다.

“보여 드리기 부끄럽네요.”

“어째서?”

“헬렌과 비교하면 작고 볼품없잖아요. 소펜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이유를 알 것도 같고요. 헬렌에서 지내면서 거기에 익숙해졌나.”

자작저의 앞마당과 집이 볼품없어 보였다. 캐서린은 가슴 한쪽을 손으로 꽉 쥐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울렁거리는 속이 아팠다. 말끔한 집을 떠올렸는데, 그런 기대와는 멀었다.

“계모가 집안 관리에 소홀했나 보군. 네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야.”

“흙냄새가 짙네요.”

“밀던이 숲과 맞닿아 있어서 그랬겠지. 여기로 오던 길에도 숲을 지났잖아. 아닌가, 산이었나.”

“산과 숲을 지났죠.”

캐서린은 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붙잡았다.

집은 분명히 그대로였다. 그런데 속이 울렁거리는 건, 지금 캐서린의 마음가짐이 달라져서일 것이다.

이제는 온전히 내 것이 된…… 계모와 의붓언니에게서 빼앗은 집이다. 이 집을 빼앗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만큼이나 쉽게 풀릴 일인데,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어어…….”

“뭐지?”

“집 안이 좀 어지럽네요.”

모든 게 그대로였지만 아주 약간씩 달랐다. 탁자에는 먼지가 앉았고, 발치에는 흙이 밟혔다. 캐서린이 멈칫하고 입술을 깨무는데,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어깨를 손으로 감쌌다.

“놔둬. 사람 불러서 치우면 되니까.”

“그래도…….”

“고마워요.”

캐서린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특별하게 달라진 곳은 없다. 조금 어수선하다고 느껴지는 정도가 다였다. 캐서린은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아버지 사진이었다. 액자에 먼지가 잔뜩 쌓였다. 캐서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사진에 앉은 먼지를 닦았다. 옷소매로 먼지를 닦는데, 로렌디스가 가져가서 로브로 닦아 주었다.

“청소하면 돼.”

“자리를 얼마나 비웠다고…….”

“사람을 불러 치우면 돼. 우울해하지 마.”

캐서린은 기다란 금발을 빗어 내렸다.

“브레디.”

“네. 각하!”

“사람을 불러와 집안을 정돈하거라.”

브레디가 뜻을 이해하고 서둘러 사람을 부르러 갔다. 캐서린은 그쪽에 시선을 잠깐 주었다가 거뒀다. 캐서린의 방은 2층에 있었다.

캐서린이 2층 계단을 밟았다. 2층에는 캐서린의 방 하나였다. 캐서린이 문을 열자, 그 안이 난장판이었다. 캐서린이 마지막으로 떠날 때는 나름 깨끗했다는데.

“에밀리가 제 방을 뒤졌나 보네요.”

“뭐가 없어졌나?”

“딱 보니까 뭔가 없어진 것 같아서요. 예전에요, 아버지께서 제도에 다녀오던 길에 선물을 사 왔거든요. 뭐더라, 10년도 더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제도에서 사 온 보석이었는데…….”

캐서린은 금발을 빼닮은 금색 브로치였고, 에밀리는 적발을 빼닮은 적색 브로치였다.

“그때 금색이 더 마음에 든다고, 제 방에서 뒤져서 가지고 갔거든요. 물론 헬렌에서 쓰던 것보다 세공도 엉망이었어요.”

“그래서 빼앗겼나?”

“어느 날 보니까 없더라고요. 가져갔는지도 몰랐고, 저도 나중에야 알았어요. 나중에 없어서 찾으면, 에밀리가 쓰다가 잃어버렸다더라고요.”

나중에 네가 가지고 갔는지 물으니까, 에밀리는 어맨다를 찾았다. ‘안 돼요?’라고 되묻던 에밀리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어맨다가 대신 캐서린을 혼냈다. 자매끼리 왜 네 물건 내 물건을 가리냐며 그런 흔해 빠진 잔소리였다.

“제 물건에 손을 좀 많이 댔네요.”

“손버릇이 나빴군.”

“욕심도 많았어요.”

“너무 쉽게 보냈어. 조금 더 괴롭히다가 보낼 걸 그랬나?”

캐서린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서랍을 열어 보니까 보석이나 귀중품이 없다.

‘솔직히 챙겨 갈 생각도 못 해서 놔두고 간 건데.’

그걸 날름 먹어 치워 버릴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하룻밤 자고 갈 건가?”

“그럴까요? 그런데 로렌디스가 자기에는 장소가 협소해서요.”

“너는 왜 계속 너를 낮추지?”

로렌디스가 표정을 왈칵 찌푸리며 되물었다.

“너를 낮추지 마. 좋지 못한 버릇이야.”

“죄, 송해요.”

“네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몹쓸 버릇이니까 고치라는 뜻이었어. 됐으니 내려와.”

거칠게 쏘아붙이는 이야기에, 캐서린은 죄송하다며 대꾸했다. 로렌디스가 머리를 어지럽게 헝클이더니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캐서린은 이불을 다시 펴서 깔고, 탁자와 의자를 정돈하고 아래층으로 따라 내려갔다.

캐서린이 막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브레디가 사람들을 이끌고 와 집 안을 정돈하고 있었다. 캐서린은 걸리적거리지 않게끔 옆으로 비켜서 집 안을 둘러보았다.

“2층도 청소해.”

“알겠습니다. 각하.”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거니까 알아 둬.”

브레디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는 야영을 준비해야겠군요.”

캐서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왜 야영을요?”

“저희는 밖이 편합니다. 그리고 또, 마님께서도 그게 편하잖습니까?”

브레디가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캐서린의 시선을 피했다.

“바깥에서 야영해.”

로렌디스가 당연하게 브레디와 일행들을 내보냈다. 브레디는 그게 차라리 낫다며 거수경례하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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