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캐서린은 그대로 쓰러졌다. 몸이 맥없이 허물어지고 긴 금발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캐서린의 의식은 그대로 까무룩 잠겼다.
로렌디스는 그런 캐서린을 익숙하게 끌어안았다. 긴 금발이 그의 손아귀에 감겼다.
‘쓰러졌네.’
로렌디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침실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데니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데니스.”
“네. 각하.”
데니스는 몸을 숙였다.
“놀라신 모양입니다.”
“심약하지.”
“이 정도로 심약한 분인 줄 몰랐습니다. 일찍 부름을 받고 오길 다행이군요.”
데니스는 미리 부름을 받고 밖에서 기다리던 참이었다. 데니스는 가벼운 진단을 끝내고 물러났다.
“괜찮나?”
“네. 약간 놀란 게 다입니다. 그래도, 놀랐습니다. 설마 왜 살렸냐는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침대에 눕혀 두고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계속 도망칠 궁리만 하네. 나름 잘 지내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너는 여기서 나가길 바란 듯 보이지만, 그 바람은 앞으로도 힘들어 보인다. 마지막까지도 기다렸는데, 너는 여전히 떠난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네가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직접 접게 만들어 버리면 된다.
* * *
캐서린은 침실을 손으로 몇 번 두들기다가 포기하고 침대에 가서 앉았다.
‘어디 나가지 못하게 해.’
로렌디스는 보좌진의 호출에 집무실로 가며, 넨시에게 엄중히 명령했다. 캐서린의 발목을 붙들어 두라고.
“지금, 나 가둬 둔 거지?”
깨어나고 보니까 침실이었다. 캐서린은 머리를 헝클이며 침대에 머리를 기댔다. 지금은 요양 때문이라도 침대에 몸져누운 신세였다.
침실 문은 굳게 닫혔다.
처음에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화 중에 갑자기 힘없이 쓰러졌다. 다시 깼을 때, 캐서린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곁에서는 로렌디스가 서류를 펼쳐서 읽고 있었다.
‘며칠은 여기서 쉬어.’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완전히 헬렌에 종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 사실을 머리로 짐작하던 때와 몸으로 실감할 때를 비교하면, 그 무게감부터가 달랐다.
침실 문은 하녀들이 지키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시선에, 캐서린도 나가는 건 포기했다.
캐서린은 문 너머를 황망하게 내다봤다. 옷은 언제 갈아입혔는지 침의 차림이었다. 넨시가 잠든 사이에 갈아 입혀 둔 거지 싶다.
캐서린은 침의를 만지작거리다가, 문 너머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똑바로 바라봤다. 침실 문이 매끄럽게 열렸다.
“쉬라 이야기했는데 왜 또 일어나 있어?”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당신이 지금 나를 가둬 둔 게 맞는지. 캐서린이 로렌디스에게 설명을 요구했지만 로렌디스는 침묵으로 답했다.
“왜 갑자기 내외하지?”
“그런 게 아니라…… 지금 나를 가둔 거예요?”
“가둔 거 아니고, 보호야.”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이마를 손으로 덮고 이야기했다.
“지금 너는 예측이 불가능해서.”
“무슨 뜻이에요?”
“어디로 튈지 가늠할 수 없다는 뜻이었어. 며칠만 이렇게 지내. 그런 몸으로 사람 걱정 그만 시키고.”
로렌디스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분명 캐서린이 그를 내려다보는 위치인데도, 이상하게 로렌디스가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기분이었다.
“다리 안 아파?”
캐서린은 로렌디스가 온 뒤로 그를 빤히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로렌디스도 그 부분을 지적하며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
로렌디스는 늘 그랬듯 심드렁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로렌디스에게서는 이미 그의 몸의 일부인 것처럼 위압감이 넘실거렸다.
그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캐서린을 빤히 올려다봤다. 짙은 눈동자는 캐서린을 조목조목 분해해서 뜯어 살폈다.
“나를 어쩌고 싶은 거예요?”
“너는 내가 어쩌려는 것처럼 보이는데?”
캐서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로렌디스도 그걸 느꼈는지, 캐서린을 자극하는 대신 잠시 기다렸다.
“……모르겠어요.”
“나도 너를 어쩔지 정하지 못했는데, 네가 그 속을 읽기는 더 어렵지.”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손끝을 더듬거리며 잡았다. 손끝이 저릿하게 차가워졌다. 머릿속이 엉망이라서 지금 무슨 표정으로 그를 보는지도 잘 모르겠고, 캐서린은 멍하니 로렌디스를 보고만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내가 너를 볼 때마다 늘 느끼던 기분이었어. 수십 번도 그 속을 까뒤집어서 보고 싶다가도, 그랬다간 기함할 게 보여서 그러지도 못했고.”
캐서린은 떨리는 손끝을 가렸다. 로렌디스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시선을 피했다. 캐서린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캐서린.”
“네?”
“나는 네가 여기에 남겠다면 더없이 상냥해질 수도 있지만.”
로렌디스의 목소리가 조곤조곤하게 내려앉았다.
“네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더없이 난폭해질 수도 있어.”
지금 로렌디스에게서는 이상야릇한 기운이 흘렀다. 캐서린은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머리를 두어 번 다독여 주고 서류를 정돈했다. 캐서린은 그의 뒤를 따라나서며, 그의 옷자락을 다시 붙잡았다. 그는 캐서린의 손을 놓아주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돈했다.
“며칠간은 나오지 마.”
“사람을 여기에 가둬 두면……!”
“나는 너를 아직 가두지 않았어. 내가 너를 가둬 두기로 마음먹었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놔둘 리 없잖아.”
로렌디스가 침실 문을 열었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침의 자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침의 차림이잖아.”
캐서린은 입술을 더듬거리며 가렸다. 로렌디스는 재킷을 벗어서 캐서린의 어깨에 덮어 주고 마저 답했다.
“왜 그렇게 부주의해.”
“로렌디스…….”
“며칠은 답답해도 여기서 지내. 사람 속을 여러 번 뒤집어 두었으면, 그 정도는 감내해.”
캐서린이 미약하게 로렌디스를 불렀지만, 그는 이미 떠난 뒤였다. 로렌디스가 떠나고 침실 문은 다시 닫혔다.
이 문을 나가는 건 된다. 그런데 이 문을 나서더라도 캐서린은 그의 시야 안이었다.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시점에서, 캐서린은 그의 손아귀에 완전히 놓였다.
“로렌디스?”
아내가 죽든 말든 돌아보지도 않는 냉혈한이라더니, 왜 사람이 달라요. 가족도 모두 다 놓았는데 왜 미련 갖게 만들어.
캐서린은 미약하게 반항했지만, 로렌디스의 뒤에서 고요히 흩어질 이야기였다.
* * *
“주인님께서는 마님께서 충분히 쉬길 바라는 마음에서, 조금 과하게 반응하신 것 같습니다.”
넨시가 다과를 가져와 내놓으며 이야기했다. 따뜻한 홍차에서 향이 솔솔 올라왔다. 캐서린은 홍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 찻잔을 다시 내려놨다.
“몸은 좀 어떠세요?”
“그러게…….”
“마님?”
“살짝 답답한가?”
나는 지금 답답한가. 머릿속이 멍해서 솔직히 지금 심정도 잘 모르겠다. 범람하는 파도 속에 몸을 맡기고, 휩쓸리면 휩쓸리는 대로 놔뒀다.
“나도 지금은 잘 모르겠어.”
캐서린은 탁자에 기대서 창밖만 내다봤다. 이게 무슨 심정인지도 이젠 잘 모르겠고.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무기력했다.
“이 뒤의 일은 고려해 본 적조차 없는데…….”
캐서린은 자꾸만 말끝을 흐리며 흐릿하게 웃었다.
“넨시.”
“네. 말씀하세요.”
“내가 여기서 한 이야기가 나중에 로렌디스에게 흘러갈까?”
넨시도 이번만큼은 멈칫했다. 앞치마에 마른 손을 닦던 넨시가 숨을 고르며 답했다.
“그런 부분은 각하께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각하께서 물으신다면, 그때는 답해 드려야 합니다.”
저녁 무렵까지는 넨시가 캐서린의 곁을 지켰다. 그걸 감시로 볼지 보호로 볼지는 개인에 따라 의견이 나뉘겠지만, 넨시는 로렌디스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나가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저녁 무렵이어서 해는 이미 저물었지만, 캐서린은 불을 밝히지 않았다.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서 가만히 자리만 지켰다.
로렌디스가 어둑한 방 안을 보더니, 침대 맡 탁자에서 등불을 꺼내 밝혔다.
“불은 왜 꺼 뒀어?”
“밝은 게 싫어서요.”
“답답하게 왜 그래, 캐서린.”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나도 잘 모르는 감정을 스스로 말로 설명하기란 더 어려운 일이었다. 캐서린은 씁쓸하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내렸다. 로렌디스는 침의로 입은 셔츠를 건성으로 털었다.
부부 침실을 같이 합치면서, 잠자리도 늘 로렌디스와 함께 가졌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같은 침실을 쓸 예정이었다.
로렌디스는 씻고 온 건지, 가벼운 실내복 차림이었다. 갑갑하게 목을 옥죄던 크라바트도 없었고, 빳빳하게 다림질한 셔츠도 벗어 뒀다. 캐서린은 침대 맡 등불을 켜 두고 어깨를 감싸며 침대에 앉았다.
“사람을 언제까지 가둬 둘 심상이세요?”
“나는 아직 너를 가둬 두기 전이라니까.”
로렌디스가 이마를 손으로 짚어 보고 침대로 밀어 눕혔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순서에, 캐서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열은 없네.”
오늘은 온종일 머리가 멍했다. 그래서 솔직히 바깥을 나갈 엄두도 안 났다. 지금 이 상황에도 적응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야 적응될 것이다.
캐서린은 땀이 나는 손바닥을 쥐락펴락했다. 그는 캐서린의 침의 자락 안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체온은 높군.’이라고 중얼거렸다.
“나간다면 나가도 돼.”
캐서린은 몸을 추슬러 앉으며, 로렌디스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대신 혼자 다니진 마. 여자 수습 보좌관을 붙여 줄 거니까 같이 다녀.”
“네?”
“혼자 두기엔 마음 쓰여서 그래.”
로렌디스가 시큰둥하게 캐서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손짓은 무던했다. 애정을 가지고 구애하는 마음으로 만지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캐서린을 만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