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그날은 이상한 예감이 든 날이었다. 몸이 이상하다. 이맘때쯤이면 억제제와 진통제로 증상을 억눌렀어도, 다른 이상 증세가 생기는 게 맞다. 요절한다는 미래를 고려한다면, 이맘때쯤부터는 어딘가 아픈 게 맞는데…….
“약의 효험이 너무 좋았나?”
캐서린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이래도 돼?’
진료동의 데니스가 캐서린을 찾을 때, 그런 불안감은 더 또렷해졌다. 막연하게 날아든 예감이 캐서린에게 ‘무언가’ 있다고 알려 주고 있었다.
“마님께서 다시 진료동을 찾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건 기적이라고밖에 말하지 못합니다.”
데니스는 기뻐 보이지만, 캐서린은 웃지 못했다. 캐서린이 바라던 결과가 아니었다. 캐서린은 그 진단서를 받아 들었다.
“이게 뭔가요? 이게, 왜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오면 안 되는데요? 나는 이런 결과는 고려해 본 적 없다고요. 1년이면 요절할 몸이라면서요?”
“헬렌은 마님을 놓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놓으라니까 왜 놓지를 못해요! 놓으라고 했잖아요. 왜, 왜 이런 결론이 나오는 거예요?”
1년이면 요절한 몸이라고 해서 스스로 놓았다. 그동안 놓을 건 놓고, 스스로 기대까지 다 접어 두고 미련까지 놓았다. 로렌디스와 나눴던 부부 관계도, 이번 생을 떠나기 전에 저질렀던 작은 일탈이었다.
“기뻐 보이지 않으시군요.”
“그럼 나는, 나는 어쩌라고요?”
그 뒤의 일은 고민도 해 본 적 없다. 스스로 끝을 매듭지고 살아온 인생이다. 그 뒤는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래서 마지막만 보고 지금까지 달려온 건데, 이 뒤를 갑자기 가져와 붙여 버리면…….
“나더러 어떡하라고…….”
제임스가 삐딱하게 기대서 웃었다. 제임스는 데니스와 눈을 맞췄고, 데니스는 암울하게 눈두덩이를 주물렀다.
“스승님, 제 말이 맞잖습니까? 이 아가씨는 기대한 적도 없다니까요. 스승님은 이만 나가십시오.”
제임스는 삐딱하게 기대서 ‘의사 앞에서 못 하는 이야기가 없다니까.’라고 진단서를 뒤적거리고, 데니스가 제자를 대신해서 이야기했다.
“제자와 이야기했습니다. 마님께서는 이런 결과를 바라지 않았을 거라고. 조용히 죽기를 기다리면 기다리지, 스스로 몸을 치료할 만큼 삶에 의지가 깊은 분이 아니라고요.”
“데니스 잠깐만요…….”
“다음 이야기는 제 제자에게 듣는 게 좋겠습니다.”
데니스는 몸을 주섬주섬 추슬러 일어났다.
“제자와 말씀 나누십시오.”
데니스가 서둘러 떠났다. 제임스는 진료실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서야, 진단서를 펼쳐 두고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제임스는 샘플 표본을 그림으로 간략하게 기록하고, 샘플에서 도출해 낸 결론을 덧붙이는 글로 적어 놨다.
“아가씨가 한라원에서 검진을 받는 게 반년 전이지? 거기서 시한부 선고를 받았고, 아가씨도 억제제와 진통제로 연명 치료를 이어 가던 중이었지. 여기까지 이해됐어?”
“응. 이야기해.”
“그런데 그 약은 치료제가 아니야. 그냥 숨을 붙여 둘 뿐이지. 몸에 내성이 있는 게 아니면, 그 숨은 언제라도 멎었을 거야.”
캐서린은 제임스의 말에서 어폐를 찾아냈다.
“내성이라니?”
“여기서부터 재밌는 이야기지. 아가씨의 몸에 살사초의 내성이 있더라고. 이미 한 번 죽었던 몸이 아니고서야 그게 가능한가 싶은데…….”
제임스가 이런저런 부연설명을 늘어놓았다. 그 설명은 지금 이 몸이 점점 치료되고 있고, 몸에 내성이 쌓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캐서린에게는 전혀 반갑지 못한 소식이었다.
그러니까, 몸이 치료됐다고?
캐서린은 손톱을 약하게 깨물었다. 제임스가 그 반응을 보더니 삐딱하게 소파에 기댔다. 그는 진단서를 마저 내려놓으며 이야기했다.
“몸에 내성이 쌓였어. 몸이 스스로 살려고, 독에 내성을 쌓아서 버텨 냈더라고. 억제제만 계속 먹는다면 몇 년이면 회복될 거야. 그게 결론이야.”
캐서린은 그 말에 홀린 듯 되물었다.
“내가 지금 회복됐다고……?”
“축하해. 요절할 운명이었는데 요절은 면했네. 이제 여기서 쭉 지내면 돼. 이보다 행복한 결말이 어딨어?”
“어쩌다 치료했어……?”
치료될 거라는 가능성을 고려해 본 적조차 없다. 그래서 멋대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내가 지금 치료됐다고……. 어쩌다가?
치료할 마음은 먹은 적도 없고 시도한 적도 없다. 기껏해야 억제제나 진통제나 꾸준히 먹은 수준이었는데 갑자기 치료됐다고? 억제제가 독을 억누르면서, 몸이 스스로 내성을 쌓도록 도왔다고?
“내가 치료하지 않아도 된댔잖아. 왜, 어쩌다 살려 둔 거야……?”
제임스는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표정을 구겼다.
“아가씨 죽을 생각이었나? 우리 아가씨 몹쓸 분이었네? 아가씨는 남겨질 사람은 걱정도 안 해? 나도 이건 변호 못 해 줘. 절대 안 해 줘.”
제임스는 곱슬곱슬한 머리를 손으로 털어 내고 몸을 웅크렸다. 이 아가씨 신변에 문제 생기면, 이제 내 목부터 날려 버리겠지. 그 사내는 융통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까. 중얼중얼하는 목소리는 일부러 캐서린에게 들으라는 듯 점점 또렷해졌다.
“아가씨 몸이 치료되기 시작한 건 대략 한 달 전부터야. 그 늙은이……. 내 스승이 기록해 둔 진단 기록을 보니까 그렇더라고.”
“왜, 왜 그 이야기를 이제 해?”
“아가씨,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이야기 미리 들었으면 어디 잠적해 버릴 것 아니었어? 그래서 진료실에서도 안정기 접어들 때까지는 침묵했지. 지금도 ‘왜, 살려놨어?’라고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잖아.”
제임스가 길게 늘어놓는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었다. 그래서 캐서린도 어버버 하며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이번에는 아가씨가 실수한 거야. 나 아가씨 이번만큼은 못 감싸 줘.”
제임스의 시선이 등 뒤로 향했다. 누군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순간 반가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겠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임스가 뒤쪽을 흘긋거리며 ‘왔다.’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제임스는 다 됐다며 진단서를 서둘러 파일철에 넣었다.
“주의할 사항은?”
“억제제만 제때 먹이면 됩니다.”
“다른 사항은?”
“아가씨가 약만 잘 먹으면 되니까 약이나 잘 먹이십시오. 아무튼 내가 할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각하께서는 더 궁금한 게 남으셨습니까?”
제임스는 당장이라도 이 갑갑한 진료실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제임스는 주섬주섬 몸을 추슬렀다.
“그럼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캐서린은 ‘잡혔다.’라는 기분을 지워 내지 못했다. 시한부였는데 시한부가 아니란다. 이제 다 놓겠다는데, 세상은 캐서린을 다시 여기에 데려다 놓았다.
* * *
아직도 머리가 멍했다.
“이제 둘뿐이니까 터놓고 이야기하지.”
로렌디스 너머로 침실 문이 닫히는 걸 보며, 캐서린은 이 상황이 이상하게 익숙하다는 걸 느꼈다. 로렌디스에게 이끌려 다시 침실로 오기까지, 그 길은 천릿길이었다.
“앉아.”
“네?”
“넋 빼 두지 말고 앉으라고.”
캐서린은 침대에 주섬주섬 걸터앉으며 몸을 더듬거렸다.
“표정을 보면 죽기라도 바란 사람 같은데.”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로렌디스가 서늘하게 웃었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캐서린은 섣불리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혹시 미리 알았나요?”
“응.”
“그런데 왜 제게 말씀을…….”
“몰라서 묻나?”
로렌디스가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피곤함이 몰려서 한껏 예민했다. 그는 거칠게 너울거리는 기세를 죽이고 답했다.
“그 반응이 나올까 미루고 미뤘어. 너는 지금도 낭패라는 표정을 지워 내지 못했잖아.”
기대는 미련이 된다. 그리고 미련은 사람을 바닥으로 내몬다. 그 짓 하기 싫다고 일부러 기대도 접어 두었는데, 막상 이런 일이 닥쳐 버리면 나더러 어쩌라고.
“처음에는 이혼부터 입에 담는 아내의 심중이 어떨까 싶어서 헤아려 보려고 했어. 내가 섣불리 뭐라 이야기할 처지는 아니었으니까.”
“로렌디스…… 잠시만요.”
“나는 아직 너를 어쩔지 결론조차 내리지 못했어.”
로렌디스가 소파에 비스듬하게 기댔다. 다리를 꼬고 기대앉은 모습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만했다.
“기뻐할 거라고는 기대조차 않았지만, 그 낭패라는 반응을 보니까 심경이 복잡해지네. 그런 표정이나 보자고 이날을 기다린 건 아닌데, 결코 보기 싫은 모습을 봐 버려서 말이지.”
“그런 게 아니에요.”
로렌디스를 보는 순간, 변명이라도 해야 한다는 예감이 강렬하게 밀려들었다.
“다 놓았단 말이에요.”
이제 다 놓고 포기하려는데 지금 와서 내 목숨을 붙여 두면 어떡해. 이제 남는 게 뭐가 있다고. 마지막 남은 인연도 모두 떠나보냈다. 캐서린은 울컥하며 말을 쏘아붙였다.
“가족들도 그랬고 쓸모없는 삶이라고 여겼어요. 내 손으로 놓을 때 다 각오하고 한 일이에요. 이제 와서 솔직히 미련도 없고요. 나 하나 없어도 당신은 혼자서 잘 지낼 거잖아요.”
로렌디스가 이런 말을 좋아하지 않음을 안다. 실수했다는 것 또한 알았다. 그런데 이 입은 자꾸만 엇나가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늘어놓았다.
“나 없어도 되잖아요. 처음부터 내 자리도 아니었어요. 당신도 그랬잖아요. 내게 기대하는 것 없다고.”
“그래서 지금 그딴 약해 빠진 정신으로 어디 혼자서 지내 보려고 했다고?”
“내가 아니어도 되잖아요. 여기는 내가 아니어도, 어차피…….”
그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됐다. 마지막 순간에야 아차 싶어서 스스로 멈췄지만, 그때는 모두 저지른 뒤였다. 로렌디스는 야차처럼 표정을 구겼고, 언제라도 캐서린을 물어뜯을 것처럼 거친 기세를 뿜어냈다.
“이제 그 계약은 의미 없어.”
어깨를 움켜쥔 손이 억셌다.
“나는 너를 처음부터 놓을 마음이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