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아랫배가 뻐근했다. 캐서린은 침대 위를 뒤척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이 뻐근하긴 해도, 못 견디게 아픈 곳은 없었다.
몸이 약간 피곤하긴 한데……. 그건 잠을 못 자서 그런 것 같고. 잠을 못 잔 이유가 버젓이 곁에 있으니까 어쩔 도리가 없다.
로렌디스가 셔츠를 입으며 몸을 수그렸다. 캐서린은 어깨를 웅크리며 그를 피했다.
“하녀에게 이야기해 둘 테니까 오늘은 쉬어.”
로렌디스는 탁자에 올려 둔 커프스단추를 마저 채우고 침실을 나갔다. 그는 나가던 길에 하녀 몇몇을 지목해서 침실 안으로 다시 들여보냈다. 캐서린은 이불을 끌어 올리고 로렌디스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지켜봤다.
“마님, 넨시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넨시는 침실 문을 조심히 닫고 침묵했다. 세상에나…….
“마님 목욕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읏…….”
“세상에나, 주인님께서는…… 아닙니다. 목욕을 돕겠습니다.”
넨시는 목구멍 끝까지 솟은 속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헛기침까지 하며 입술을 더듬거렸다. 못다 한 말이 많구나.
“물 온도는 어떠십니까?”
“으응. 괜찮아.”
캐서린은 신음하며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몸은 여전히 뻐근했다. 근육통은 오후나 되어야지 풀릴 것 같다.
넨시가 대리석 욕조에 향유를 한가득 풀고, 피로에 좋은 향초를 욕실 선반에 올려 두었다. 향초의 촛불이 가늘게 일렁거렸다. 넨시는 향초에 불만 붙여 두고 조심스럽게 선반에서 유리 판막을 꺼냈다. 그리고 물이 튀지 않게끔, 향초를 유리 판막 안에 넣었다.
“심신을 안정하기에 아로마 향초만큼 좋은 게 없답니다.”
넨시가 캐서린의 어깨를 느릿하게 어루만지며 물었다.
“근육이 단단히 뭉쳤습니다. 마사지를 해 드릴까요?”
“고마워. 아아, 어제 연회는 잘 마무리됐어?”
“네. 마님께서 처음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보였잖습니까? 마님께서 칩거하신 동안 이런저런 소문이 많이 퍼졌는데, 덕분에 그런 소문도 모두 잠잠해졌습니다.”
넨시는 묵묵히 목욕 시중을 들었다.
이런저런 소문이라면 뭘까. 아무래도 캐서린이 내성에 칩거하면서 추측하던 말들이 떠돌았던 모양이다. 캐서린은 욕조에 비스듬하게 기대서 눈을 감았다.
“나 때문에 곤란한 일은?”
“마님 때문에 곤란한 일이라니요? 감히 마님 이름 앞에 ‘때문에’라는 말을 붙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일 없다는 뜻이다.
“목욕 가운 가져왔습니다.”
“입는 걸 도와주겠어?”
넨시가 목욕 가운을 조심스럽게 입히고, 캐서린을 침실로 이끌었다. 화장대에 앉아서 가만히 시중을 받는데, 오늘따라 낯빛이 유난히 창백했다. 뺨을 더듬거리며 거울 속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참…… 여려 보이네.”
“그래도 헬렌으로 오기 전보다는 낯빛이 많이 밝아지셨습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훨씬 좋아지셨어요. 아아, 마님 앞으로 편지가 도착했는데 확인해 보셔야죠?”
“페이퍼 나이프 좀 줘.”
넨시가 서둘러 페이퍼 나이프를 가져왔다. 편지를 뜯어서 확인하자, 그 출처가 편지지의 상단에 적혀 있었다.
“수도원에서 보내온 소식이네.”
수도원에서 소식이 도착했다. 에밀리와 어맨다가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가족과의 인연을 끝맺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 됐나……. 이젠 다 된 걸까?
“마님, 주인님께서 단장이 끝났으면 식사 자리로 내려오라며 사람을 보냈습니다.”
하녀 아이 하나가 캐서린을 찾았다.
“로렌디스가 보냈어?”
“네. 마님. 준비가 끝나셨으면 내려가겠다고 기별을 넣을까요?”
“피곤한데……. 알았어. 곧 내려간다고 전해. 넨시는 단장을 조금 더 서두르고.”
넨시가 서둘러 단장을 마무리했다. 숄을 꺼내서 입히고, 편안한 구두를 꺼내서 발치에 내려 두었다. 가느다란 금발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하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발을 내딛자,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
* * *
“일찍 오셨네요.”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발견하고 식탁 맞은편을 턱짓했다.
“몸은 좀 어때?”
“뻐근하긴 한데…….”
“몸에 무리가 갈 수준은 아니었을 건데. 다음부터는 조심하지.”
캐서린은 흠칫하며 하녀들을 흘끔거렸다. 이들은 이미 눈과 귀를 닫고 식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먹음직스러운 향이 식탁에서 은은히 풍겼다. 접시가 하나하나 나오고, 갖가지 음식들이 화려하게 식탁을 수놓았다.
“다음부터요?”
로렌디스는 여전히 멀끔했다. 셔츠 단추를 꼼꼼히 잠그고, 빳빳하게 다린 소매에 커프스단추를 채웠다. 구김 하나 없는 셔츠는 깐깐한 주인의 성향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캐서린이 하얀 드레스를 만지작거렸다.
“다음부터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몰라서 묻나? 이야기해 달라면 이야기해 주겠지만, 당신이 바라는 답은 아닐 건데 괜찮아?”
로렌디스가 물 잔을 매끄럽게 만지며 답했다. 그 답이 내가 바라는 게 아니라니……. 캐서린에게 마냥 반가운 소식은 아닌 것 같다.
오늘은 이만 쉬라던 그 말도 허언이었을까? 어깨를 만지작거리는데, 몸 여기저기가 뻐근하게 결렸다.
“진짜 어디 아픈가?”
로렌디스가 눈매를 얕게 찌푸렸다. 캐서린은 갑자기 달라진 반응에 멈칫하며 다급하게 둘러댔다.
“그게, 아프다는 게 아니에요. 몸, 몸은 괜찮아요. 허리나 근육이 조금 결려서……. 씻고 더 자려고 그랬는데, 로렌디스가 또 불러내서 못 그랬으니까요.”
“그래도 식사는 해야지. 데니스 교수도 식사는 거르지 말라 이야기했잖아.”
캐서린은 맞은편에 앉아서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음식이 나오고, 하녀들이 모두 물러났다. 로렌디스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음식을 먼저 맛봤다.
“음식은 입에 맞아?”
“입안이 까끌까끌해서 잘 모르겠어요.”
로렌디스가 찬물로 입안을 헹구고 이야기했다.
“다 먹고 듣겠나?”
“지금 말씀하세요.”
“다 먹고 듣는 게 네게는 좋을 건데, 괜찮나?”
식사 중에 가볍게 들을 이야기가 아닌가? 캐서린은 잠시 망설이며 그의 말을 끊으려는데 로렌디스가 더 빨랐다.
“어젯밤에 당신이 했던 이야기를 고민해 봤어.”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했었죠?”
“기억도 못 하는 거면, 그냥 해 본 이야기였나?”
기억을 못 하는 건 아니다. 어제 나눴던 이야기라면 후계 이야기일까? 헬렌은 제국의 귀족이며, 제국의 귀족이라면 후계를 낳아서 가문을 번듯하게 유지할 책임이 있다. 어제 그 이야기를 잠깐 꺼냈지.
“표정을 보니 기억났군. 다행이야.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던 중이었거든.”
로렌디스가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후계를 걱정했었지? 온종일 고민했어. 그게, 무슨 의미였으려나. 무슨 의미로 후계자 이야기를 입에 담았을까 말이야.”
“다른 의미로 꺼냈던 건 아니에요. 그냥, 당신 입장에서는 후계를 고려하는 게 맞으니까요. 지금 저한테서는 후계를 보기 어렵다면…….”
로렌디스는 손을 들어서 캐서린의 말을 가로막았다. 캐서린은 말끝을 얼버무리며, 애피타이저로 나온 음식을 오물오물 씹었다.
“그쯤 해 둬. 나는 이미 했던 이야기를 다시 들으려는 게 아니야. 어쩌다가 네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나 고민했던 거지.”
로렌디스는 느릿하게 음식을 맛보며 말을 끌었다. 그의 말은 느릿했지만 그게 답답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묵직했다. 담담한 어조가 이어질 때마다, 캐서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될 무언가를 들킨 기분이었다.
“이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침실은 같이 쓸 거야. 잠자리 또한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같이 나누겠지.”
“이건 조금 갑작스러운데…….”
“갑작스러울 건 없어. 부부잖아. 예전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못 했던 거지.”
캐서린은 식기를 꽉 쥐고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로렌디스가 직접 저 이야기를 하니까, 말의 무게 또한 달라졌다. 말에 담긴 무게도 더 무거웠으며, 어깨를 누르는 위압감도 묵직했다. 캐서린이 포크를 내려놓자, 로렌디스가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는 지금처럼 지낼 거야.”
로렌디스는 캐서린이 도망가려는 길을 하나하나 끊고 도려냈다. 그리고 더 이상 도망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한쪽 길만 열어 두며 이야기했다.
“안, 돼요.”
“돼. 지금처럼 지낼 거야.”
“안 돼요!”
“그래도 돼.”
캐서린이 눈을 부릅뜨고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는데, 로렌디스가 매끄러운 어조로 답했다.
“이제는 그래도 돼.”
“무슨 뜻이에요?”
“이번에는 당신이 맞춰 봐. 머리가 좀 아플 거야. 반년 만의 재회에서 이혼부터 입에 담는 아내를 보며, 나도 비슷하게 골머리를 썩였으니까 당신도 고민해 봐.”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건 알겠다. 로렌디스는 마지막 확인 사살을 날리듯 이야기했다.
“헬렌을 벗어날 마음은 품지 마. 네가 또 그런 마음을 먹는다면, 나는 조금 더 과격한 방법을 쓰게 될지도 몰라.”
이혼은 없다. 재혼 또한 없다. 로렌디스가 그 이야기를 뱉은 시점에서, 이 혼담을 엎을 길 또한 사라졌다.
로렌디스는 물로 입을 헹구고 다시 식사를 이어 나갔다. 그는 매끄러운 손짓으로 음식을 맛봤다.
놀라울 일도, 경악할 일도 아니라며 무미건조한 어조였다. 캐서린은 그의 무던한 손짓을 가만히 지켜봤다.
“아이 계획은 나중에 세워도 돼. 당신이 아이를 원한다면 계획을 세워도 좋지만, 지금 당장은 어려워. 그래도 나중에는 되겠지. 몇 년 뒤면 가능할지도.”
“잠, 잠깐만요. 천천히 이야기해 주세요.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겠어요.”
정략혼으로 맺어진 부부가 후계를 낳고 영지를 돌보듯, 우리 또한 그럴 거다. 로렌디스는 이미 했던 이야기를 다시 조곤조곤 꺼냈다.
“나는 너와 지낼 거야.”
“로렌디스…….”
“그 이후의 일은 고려해 본 적 없어. 지금처럼 네 곁에서 지낼 거야. 그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어.”
적나라하게 뱉은 경고가 캐서린의 앞에 뚝 떨어졌다. 캐서린의 시야가 낮게 흔들렸다. 로렌디스는 식기를 내려 두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걱정 마.”
“네?”
“네가 떠날 일 또한 없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