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내가 왜 화를 내?”
당신, 나만 보면 자주 화냈던 것 같은데.
“나는 생겨 먹은 게 이런 거야.”
“화난 건…….”
“화난 거 아니야.”
로렌디스는 성큼성큼 앞서나가고, 캐서린은 고요히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잊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모리켄 부인께서 곧 떠나신대요. 혹시 들었나요?”
“짐작하긴 했지. 모리켄 경도 찾았으니까 부인께서도 따뜻한 곳에서 지내면서 여생을 보내시겠지.”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높은 굽 때문에 걷기가 불편했다.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천천히 걷는데, 로렌디스가 팔을 잡아끌었다. 울퉁불퉁한 길 아래로 자갈이 가득했다. 발을 잘못 헛디뎌 몸이 그대로 허물어지는데, 로렌디스가 허물어지는 몸을 다시 안아 들었다.
“고마워요.”
로렌디스의 손이 허리에 닿았다. 커다란 손아귀로 허리를 한 줌에 쥐었다. 그건, 안았다기보다는 손에 쥐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는 말 그대로 손아귀로 얇은 허리를 쥐고 있었으니까.
저택 앞에 도착하자 집사가 서둘러 마중 나왔다.
“각하, 오셨습니까? 일찍 오셨군요. 시중들 하인이 필요하겠습니다. 사람을 올려…….”
“올려 보내지 않아도 된다.”
집사의 눈빛이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오늘 밤에 사람 올려 보내지 마.”
“네. 모두 물리겠습니다.”
로렌디스가 길게 이야기한 건 아니었지만, 집사는 주인의 의중을 곧장 깨달았다. 주변을 비우라는 뜻이구나. 하녀들이 빠르게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하인들은 왜 돌려보낸 거예요?”
“저들이 있으면 네가 또 입을 다물 게 뻔하니까.”
하인들도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캐서린은 우두커니 서서 로렌디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서 침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 자리를 비운 지금……. 지금이라면 말해도 될까? 고민하던 캐서린은 로렌디스를 따라가며 말을 꺼냈다.
“로렌디스에게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 이야기를 꺼내면 당신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야기하는 건,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의문 때문이었다. 캐서린은 구두굽을 조심히 딛고 섰다. 높은 굽으로 걷는 게 불편했다.
“먼 미래에…… 이 혼담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지면요. 이를 테면요. 긴 시간이 지나서, 10년이란 시간이 지났을 때, 헬렌에 후계자가 없다면 말이에요.”
“일단은 다 듣고 이야기할 테니까 더 말해 봐.”
캐서린에게는 그보다 더 가까운 미래이지만, 그런 이야기를 했다간 로렌디스가 또 헛소리하냐며 타박할 게 뻔했다. 그래서 적당히 에둘러 이야기했다.
“혼담은 후계까지 생각해야 하잖아요.”
로렌디스가 침실 문을 닫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내게 묻고 싶은 게 뭐지?”
“그럼 당신은 어떡하나요? 당신도 후계가 필요하잖아요? 그으, 아이가 있어야지 당신에게도 좋잖아요.”
“후계야 필요하지. 황실에서 압박해 오던 것도 후계 때문이었으니까.”
이번 결혼은 황실의 압박으로 맺은 계약이었다. 황실에서 의도한 방향과는 다르지만, 결론만 놓고 보자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무슨 일 있었나?”
로렌디스는 그런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온지 모르겠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후계는 당연히 필요해. 10년까지 갈 일도 아니야. 대강의 상황만 정돈된다면, 바로 준비하면 돼. 네 몸만 해결 보면 될 일이니까.”
“어어……. 나로 괜찮아요?”
“그럼 누굴 통해서 얻지? 설마 다른 사람 품에서 씨앗을 얻기라도 하란 뜻인가? 내가 후계를 낳게 된다면, 그건 너를 통해서야. 그 책무와 의무는 변함이 없어.”
로렌디스의 손이 아랫배에 닿았다. 그 손은 묵직하면서도 농밀했다. 그 목적이 노골적으로 보였다. 숨을 깊게 내뱉으며 목덜미를 깨물 때, 캐서린은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아랫배를 무언가 뭉근하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미치겠어.’
앞뒤가 꽉꽉 막혀서 어디 도망칠 구석도 없다.
“위스키 한 잔 먹더니 엉망이군.”
로렌디스가 입을 얕게 맞추었다. 가느다란 허리로 팔이 파고들었다. 로렌디스는 허리를 한 줌에 쥐고 캐서린을 천천히 밀쳤다. 침대가 풀썩 꺼졌다.
이만 옷을 갈아입고 쉬고 싶은데…….
“손님들에게 안 가 봐도 되는…….”
“저들끼리 즐기다 갈 테지. 주인은 얼굴만 비추고 퇴장해도 돼.”
침대 위로 몸이 겹쳤다. 뻐근한 압박감이 아랫배 속에서 차올랐다. 로렌디스가 다리 사이에 무릎을 넣고 몸을 지탱했다. 빠져나가려고 몸을 버둥거리자, 골반을 눌러서 그의 아래에 가뒀다.
침대가 출렁거리고, 탁자에는 피임약이 있었다. 캐서린은 피임약을 흘긋거리다가 로렌디스의 옷자락을 당겼다.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젠 나도 잘 모르겠어.’
어딘가 잔뜩 망가졌다.
“저 옷 갈아입고 싶어요.”
“이리 와.”
“왜, 왜요?”
“하녀들을 이미 다 내보냈잖아. 혼자 갈아입기라도 할 심상이야?”
예정대로라면 하녀들이 환복을 도와줬을 건데, 그 아이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다. 로렌디스가 등 뒤를 더듬거려서 드레스를 벗겨 냈다. 단단히 조였던 코르셋도 헐거워졌다. 로렌디스가 속치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저, 저기!”
“만질 때마다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면 어쩌자는 거야.”
로렌디스가 낮게 타박했다. 굵은 손가락이 속옷을 끌어 내렸다. 캐서린은 침대 위에서 꼼지락거리다 그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싫어?”
“그건 아닌데…….”
“그럼 됐어.”
“뭔가 너무 매끄러워서요.”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더니 나지막하게 되물었다.
“왜?”
“그냥, 내가 무언가 놓치는 기분이에요. 당신이 약간 이상한데, 어디가 이상한지 잘 모르겠어요.”
“나도 너를 볼 때마다 그런 기분을 느꼈어.”
이제야 좀 공평해졌네. 로렌디스가 그런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캐서린의 골반을 더듬거렸다.
로렌디스와 나누는 부부 관계가 싫은 건 아니다. 아랫배에 감도는 긴장감은 늘 좋았다. 아득하고 뻐근해서 머릿속을 밀가루 반죽처럼 뭉개 버리니까. 그때는 나쁜 생각도 밀려들지 않고…….
“그래도 씻고…… 나 아직 못 씻었어요.”
“딱히.”
“당신은 괜찮아도 저는…… 으응!”
로렌디스는 이번에도 ‘다음에.’라며 일축했다. 캐서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어깨를 손톱으로 긁었다. 뽀얀 살결이 그의 아래에 놓였다. 척추부터 천천히 누르면서 내려오던 손길이 골반 아래에 닿았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캐서린은 그의 셔츠를 움켜쥐고 버텼다.
“안아도 돼요?”
“뭐?”
“음, 좀 그런가요?”
“안아. 목에 팔 두르고.”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몸이 허물어졌다. 로렌디스는 익숙하게 자세를 잡고, 입술을 맞췄다.
숨과 숨이 오고 가고, 혀가 얽혔다. 입안을 파고드는 혀가 거칠었다. 뿌리까지 옭아매서 끌어내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허물어진 몸 위로 그의 손이 닿았다. 캐서린은 가느다란 팔을 뻗어서 그를 끌어안았다. 맞닿아서 비벼 오는 체온이 뜨거웠다.
“약간 머리도 몽롱해지고.”
이런 자극은 또 노골적이라서 흠칫흠칫한다.
“뒤죽박죽 뭉개 버린 거 같아요.”
“그랬어?”
“이상해요. 으응, 이건 좀 버겁나?”
“그 작은 머리로 복잡한 생각 좀 그만해. 머리에서 열이 날 것 같잖아.”
울먹거리며 입술을 벌리는데, 입술이 다시 겹쳤다. 뭉툭한 혀가 치열을 쓸었다. 느릿하게 혀를 감고 찌르다 매끄럽게 다독였다.
로렌디스가 몸을 수그렸다. 캐서린은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그의 입술이 아래에 닿고, 그곳에 고개를 묻었다. 습한 숨이 아래에서 흩어졌다. 눈물이 차올랐다.
“하아…….”
탄식을 뱉으며 몸을 떨었다. 오한이 몸을 쓸었다. 긴 금발이 침대 위에서 헝클어졌다. 베개에 뺨을 파묻고 비볐다. 가느다랗게 터지는 울음이 베개에 묻혔다.
머릿속이 곤죽이 돼서, 그의 손아귀 아래서 짓뭉개졌다. 봉긋한 언덕을 손으로 쓸자, 뭉근하게 몸이 녹아내렸다.
“그, 그만……. 이상해요.”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로렌디스가 코를 민감한 곳에 뭉갰다. 힘든데 이거……. 숨을 터트리면 그 긴장감이 고스란히 다시 폐부에 스며들어서, 억지로라도 숨을 막았다. 입술을 틀어막고 숨을 참는데, 로렌디스가 손을 떼어 냈다.
“숨 쉬어.”
“숨소리가 계속 이상해져요.”
“나는 마음에 드니까 괜찮아. 들을래.”
울먹거리며 로렌디스를 똑바로 마주 보는데, 거대한 몸이 아래에서부터 자리를 잡았다. 숨을 급하게 삼키는데, 로렌디스가 입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입술 헐겠어. 그만 좀 깨물어.”
로렌디스가 몸을 겹쳤다. 거대한 부피감이 아랫배 안으로 파고들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눈썹이 잘게 떨렸다. 묵직하게 차오르는 무게감에 숨을 가늘게 터트렸다.
“하아……!”
아랫배를 긁는 몸짓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거 맞나, 흥분으로 얼룩진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로렌디스가 팔을 뻗어서 몸을 단단히 지탱했다. 깊숙하게 맞닿는 몸이 버거웠다. 뜨겁고 거칠었다.
“자, 잠깐만!”
“왜?”
몸짓이 거칠게 이어지고, 베개를 쥔 손이 흔들렸다.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요.”
그 몸은 여전히 거칠었다. 그리고, 캐서린을 배려하기보다는 몰아붙였다.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숨을 터트리며 그의 어깨를 긁자 로렌디스가 몸을 내어 줬다.
하아, 하아, 낮게 터지던 숨이 로렌디스의 목덜미에 부딪히고 흩어졌다.
캐노피의 이음새가 헐거워졌다. 리본으로 고정해 둔 캐노피가 흘러내리며 침대를 외부에서 가렸다. 창문은 닫혀 있고, 침실 문도 굳게 닫혔다. 침대 밑으로는 헐벗은 옷가지가 떨어져 있었고, 뜨뜻미지근한 온기가 흘렀다.
로렌디스는 집요했고, 침대 위로 느껴지는 존재감도 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