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45)화 (45/129)

45.

하인이 와서 새로운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셀레나 소펜 양입니다.”

셀레나가 걸음을 조심히 내디뎠다. 소펜 공작이 직접 딸아이를 에스코트하고, 주변에서는 흐뭇하게 두 부녀지간을 바라봤다. 파트너로 온 소펜 공작이 로렌디스와 짧게 인사를 나눴다.

“헬렌에서 다시 사람을 맞이한다는 게 얼마나 경사스러운지, 전대 공작께서도 기뻐할 겁니다.”

제럴드는 전대 헬렌 공작과 비슷한 연식이었다. 그런 제럴드에게 로렌디스는 자식뻘이나 마찬가지였다. 제럴드가 존대로 예우를 보인다는 건, 가주로서의 로렌디스를 존중한다는 뜻이었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에게 다가와서 가느다란 어깨를 쥐고, 그의 옆에 세웠다.

“헬렌 부인이시군요. 전대 공작께서 기뻐하겠습니다. 밀던 자작을 특히나 예뻐했잖습니까?”

“결혼식 때 뵙고 처음이네요.”

“제 딸아이는 그때 자리를 비워 없었습니다. 셀레나, 너도 이리 오너라.”

제럴드가 딸아이를 앞으로 이끌었다. 셀레나가 고개만 수그려 예의를 표했다.

“이전에도 인사드렸어요, 아버지.”

“이런, 그랬구나. 네가 막 귀환해서 내가 너를 여기저기 보여 주기 바쁘단다. 친우들과 나눌 이야기가 많을 건데 이만 가 보거라.”

셀레나는 얼굴만 비추고 자리를 비웠다. 캐서린은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약할 때는 연약하게, 화려할 때는 화려하게.

때로는 지는 꽃처럼. 때로는 피는 꽃처럼.

셀레나는 스스로 그 위치를 이용했다. 캐서린은 거기에 시선을 빼앗겼다. 셀레나는 여리고 가늘었지만, 모든 이목을 잡아끌기에는 충분했다. 캐서린이 그 뒷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는데,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디 넋을 빼 두는 거야.”

“닮았다고 하긴 했는데요. 진짜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요.”

“무슨 소리야.”

로렌디스는 이해하지 못했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은 아직 못 느꼈나. 캐서린은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제럴드가 허허허 웃으며 턱밑을 어루만졌다. 실없는 표정이지만, 제럴드가 귀족 계보에 민감한 사람임을 모르는 이들이 없다. 캐서린도 귀족 계보를 외우며, 그런 부분을 미리 언질 받았다.

“밀던 자작가가 시골에 있다는 이야기만 듣고 어디 있는지는 듣지 못했는데, 헬렌과는 거리가 좀 멀었던가?”

“네. 거리가 좀 돼요.”

“밀던 자작이 아주 자랑스러워하겠군요.”

제 위치에 어울리지도 않는 걸 얻어 냈으니. 제럴드는 다시 허허허 웃으며 로렌디스에게 사업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제가 헬렌 부인께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꺼냈군요. 이 늙은이가 주책입니다.”

“제가 비켜 드릴게요. 말씀 나누세요.”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손목을 붙잡더니 꽉 움켜쥐었다 놓으며 이야기했다.

“곧 올 거니까 기다리고 있어.”

“나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가 아니에요.”

“피곤하면 하인에게 이야기해 두고 먼저 가. 낯빛이 엉망이야. 며칠 괜찮더니 연회로 무리했는가 봐.”

르루 부인이 다시 ‘어머-?’라고 작게 탄식하고, 지켜보던 이들이 부채를 입술을 가리고 속닥거렸다. 헬렌 부부가 석연치 않은 결혼식을 끝내고 부부가 된 건 모두들 아는 사실이다. 몇몇은 이 결혼이 오래가지 못한다고들 예상하기도 했고.

‘그건 아닌 모양이네요.’

다들 이런저런 추측을 내어놓으며 귓속말을 나눴다. 셀레나만 부채를 펼치고 차갑게 식은 눈초리로 캐서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캐서린은 배시시 웃으며 눈을 맞췄다. 그러니까요, 셀레나 소펜 양. 저도 의문이에요. 제 남편은 왜 이러고…….

“캐서린?”

“소펜 공작께서 기다리시네요.”

“이상한데…….”

“다녀오세요.”

“기다려. 다녀와서 이야기하지.”

로렌디스는 본격적으로 사업 이야기를 나누고, 캐서린은 자리를 비웠다. 르루 부인이 캐서린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다 말고 중얼거렸다.

“묘하게 기분 나쁜 집안이라니까요.”

“그랬나요?”

“항상 기분 나빴어요. 사업적으로도 저희 가문과 자주 부딪히거든요.”

캐서린은 픽 웃었다. 뒤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르루 부인을 거들었다.

“겉과 속이 다르면 보통 그렇게들 느끼죠.”

“어머, 모리켄 부인 오셨어요?”

모리켄 부인이 짙은 남색 드레스에 화려한 모자를 쓰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환대에 기쁘게 웃으며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붙잡았다.

“다들 저를 이렇게 반갑게 맞이해 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헬렌 부인께 인사드립니다.”

“거창한 인사는 생략해도 좋아요.”

모리켄 부인이 캐서린에게 무릎을 약하게 구부리며 인사했다. 드레스는 단아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 묵직한 기품이 나른히 흘렀다. 서로서로 아는 사이인지, 르루 부인과 모리켄 부인도 웃으며 반겼다.

“낯빛이 많이 밝아지셔서 다행이네요. 마지막에 뵌 모습이 눈에 걸렸는데, 모리켄 부인께서도 건강히 지내셨나요?”

“다 늙은 제게 건강 빼고는 남을 게 뭐 있겠습니까?”

모리켄 부인은 조곤조곤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캐서린에게만 작게 속삭이며 물었다.

“헬렌 부인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바깥에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 *

모리켄 부인은 오래 붙잡을 마음이 없다는 듯, 연회장 앞 후원에서 이야기를 꺼냈다. 그 목소리는 편안하지만 진중했다.

“마님께 제가 드리는 마지막 인사가 되겠군요.”

모리켄 부인은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 버릴 것 같았다. 그 얼굴은 따뜻하고 편안했다. 마치 지난 미련을 이제야 내려놓는다며, 캐서린에게 감사해하는 것 같았다.

‘왜 내게?’

감사할 일을 한 적은 없다. 캐서린은 그냥 자리만 지켰고, 그 시기가 모리켄 경이 헬렌으로 온 시기와 겹쳤을 뿐이다.

모리켄 부인이 캐서린의 손을 맞잡았다.

“제 남편이 마님 이야기를 꺼낼 때면, 아가씨께서는 무신경하지만 그 눈에 총기가 깃드는 날에는 크게 날아오를 거라며 이야기했답니다. 제 남편 이야기가 맞았군요.”

“찰스 아저씨가 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지나가듯 한 번씩 꺼냈습니다. 우리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으니, 아무래도 다른 자식 이야기를 꺼낼 때도 조심스러웠죠.”

모리켄 부인이 홀가분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뵙고 싶었습니다. 제 남편이 이야기하던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지금은 홀연히 다 커서 숙녀가 됐지만요.”

아이라는 이야기가 이상하리만큼 쑥스러웠다. 자신에게는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머리를 긁적거리자 모리켄 부인이 맞잡은 손을 쓰다듬으며 되물었다.

“가족분과 사이가 안 좋으십니까?”

“아아, 어떻게…….”

대외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캐서린이 외부 활동을 자주 한 것도 아니고, 에밀리는 밖에서 사이좋은 자매지간을 연기했으니까.

“그 싹은 들여다보면 의외로 쉽게 보이는 법이니까요. 밀던 자작님께서 우리 마님께 큰 짐을 남겨 두고 떠났네요.”

“부끄럽네요. 나름 잘 숨겼는데…….”

“밀던은 마님께 약점이 아닙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십시오.”

캐서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마님께서 밀던이라서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밀던 자작님께서도 좋은 분이었고요. 비록 사람 보는 눈은 없었지만요.”

모리켄 부인이 얕게 웃으며 부채를 펄럭였다.

“소펜 공작께서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제 남편이 이미 이야기했었다. 나이에 답지 않게 주변을 자주 의식하고, 아닌 척하면서도 다 귀담아듣고 신경 쓴다고. 모리켄 부인은 아득한 추억을 떠올리듯, 상념에 잠겨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가족 간의 일을 바깥에 보여서 좋을 일은 아니죠. 묻어 둔 건 잘한 일입니다. 그래도 마님께서 혹시나 허락하신다면.”

모리켄 부인이 캐서린을 약하게 끌어안았다. 그 팔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지난 시간을 고통 없이 보냈을 리 없다. 집에서 홀로 기다리던 하루하루에 그 미련과 그리움이 깃들어 있었다. 캐서린은 그 마음을 잘 안다.

“제가 떠나 있는 동안에도, 마님께서 찾으신다면 다시 오겠습니다.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이 되어 드리고 그 자리를 채워 드릴 테니, 제가 필요해지는 날 말씀하십시오.”

모리켄 부인이 조용히 몸을 숙였다. 이만 갈 시간이라며 안부 인사만 짧게 나누는데, 캐서린은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기이한 감정이 몸을 감았다. 스스로의 입지가 불안정한 건 안다. 그래서 가족과의 일도 묻어 버렸고. 그런 와중에 저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먹먹해졌다.

캐서린이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데, 모리켄 부인이 혀를 끌끌 차며 이야기했다.

“각하께서도 멀었군요.”

제 부인 표정이 어떤 줄을 몰라.

“갈 길이 멉니다.”

모리켄 부인은 작게 웃고는 캐서린의 어깨를 다독였다. 주름진 손이 어깨에 닿을 때, 긴장감으로 굳었던 몸이 허물어졌다.

“마님!”

비틀거리는 캐서린의 모습에, 모리켄 부인이 흠칫하며 급하게 손을 뻗었다.

“괜찮으십…… 빠르시군요.”

누군가 허물어지는 몸을 단단히 받쳐 안았다. 모리켄 부인이 눈을 끔뻑거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시선은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라고, 캐서린 뒤에 선 인영에게 묻고 있었다. 모리켄 부인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각하, 오셨습니까?”

“아내가 몸이 안 좋은 듯하니 이만 데리고 가 봐야겠는데, 대화 중이었나?”

“대화 다 끝났습니다. 각하께서 모시고 가면 됩니다.”

보좌진과 다른 일행들은 이미 자리를 비켰다. 로렌디스는 혼자였고, 캐서린을 잡아끄는 손길이 제법 묵직했다. 성큼성큼 걷는 발걸음도 성급했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심기가 불편한 그의 뒷모습을 보며, 캐서린은 홀린 듯 되물었다.

“화났어요?”

로렌디스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돌아섰다.

“무슨 뜻이지?”

“저기압이어서요. 당신에게 실수한 건 없는데…….”

찌푸린 표정도 그렇고.

캐서린이 낮게 읊조리자 로렌디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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