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뚜벅뚜벅. 높은 구두를 신은 여인이 걸어온다. 여인은 검은 드레스 자락을 너풀거리며 다가왔다.
“헬렌 부인을 뵈어요. 처음 뵙네요. 셀레나 소펜이에요.”
금빛 긴 머리카락에 진갈색 눈동자와 여리고 얇은 몸까지. 셀레나 소펜이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은은히 웃었다.
“반가워요. 소펜 영애.”
“기쁜 소식일지 슬픈 소식일지. 모리켄 경과는 어릴 때 잠깐 뵌 적이 있어서 저도 찾아뵙게 됐답니다. 지금이라도 헬렌으로 오시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기분이 이상하다. 그런데 그게 어디서 오는 기이함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캐서린은 고개만 몇 번 갸웃거리다 고민을 관뒀다.
셀레나가 부채로 입술을 가리고 옅게 웃었다. 눈웃음을 짓자 눈매가 사르륵 접혔다. 꽃잎이 그 머리 위에 떨어졌다.
셀레나는 꽃잎을 집어서 털어 내더니, 머리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머리 장식을 단단히 고정했다.
“헬렌 공작님께서는 어디 계시죠?”
캐서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모리켄 부인께서 찾아서 자리를 비우셨어요.”
“고인께서도 편히 눈을 감았을 테니까, 모리켄 부인께서도 한 시름 놓았겠어요. 이게 다 헬렌의 공덕이 깊어서겠죠.”
셀레나는 곱게 웃으며 헬렌을 높게 세우고 이야기했다.
“헬렌 공작님과 혼인한 분이 누구실까 늘 궁금했어요. 결혼식 날 제가 자리를 비워서 오지 못했거든요.”
셀레나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느릿하고 고고한 모습이었지만……. 셀레나가 캐서린을 훑어 내릴 때, 캐서린은 그대로 표정을 찌푸렸다.
“어어, 죄송해요. 부인께서 저와 너무 닮아서……. 제가 무례하게 군 부분은 사과드릴게요.”
“실수였다니 괜찮아요.”
“제가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서 이국에서 요양 생황을 자주 했답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가짐을 조심하며 다녔는데, 또 이렇게 실수를 하네요. 이만 물러나 볼게요. 헬렌 부인, 다시 뵈어요.”
셀레나는 모리켄 경에게 애도를 표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나긋나긋하게 쉬는 숨과 적당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까지……. 모두 캐서린을 닮아 있었다. 로렌디스가 돌아오자, 셀레나는 멈춰 서서 그와 대화를 잠시 나누었다.
“캐서린.”
둘의 대화는 금방 끝났지만, 캐서린은 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서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캐서린?”
“네?”
“어디 넋을 빼 둔 거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말끝을 흐린 캐서린은 코트를 여몄다. 그 모습을 보던 로렌디스가 날씨가 춥다며 캐서린을 안으로 이끌었다.
* * *
조문객들도 금방 돌아갔고, 월계수 기사단만 남아서 각자 시간을 보냈다.
‘그건 그렇고.’
캐서린은 우두커니 앉아서 고민에 빠졌다. 캐서린도 항상 본인이 떠나고 난 뒤의 일을 가정해 왔다.
캐서린은 떠나는 사람이었고, 떠나는 사람보다는 남겨질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는 게 더 당연하니까.
그날 모리켄 부인은 슬프면서도 웃고 있었다. 찰스 아저씨는 비록 그 숨을 거뒀지만, 모리켄 부인은 남편과 재회한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감사해했다.
“마님, 고민이 많으십니까?”
넨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민이 많은 건 아니고, 심경이 복잡할 뿐이다. 캐서린은 찻잔을 내려 두며 되물었다.
“연회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어?”
“네. 말씀하신 대로 잘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연회는 작게 열되, 진중하게 성심성의껏 부탁해. 모리켄 부인께서 직접 참석하신다니까 진중하되, 너무 엄숙하진 않게.”
접대용 접시와 그릇들을 깨끗하게 정비하고 초대장을 보내기까지,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럼 집사님께 이야기해서 일정에 맞춰 준비하겠습니다.”
캐서린은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깊게 발을 디뎠다. 아주 깊숙하게 디뎌서, 이제는 함부로 발을 빼내지도 못한다.
소펜 가문.
지금으로부터 10년 뒤에, 로렌디스와 다시 재혼하게 될 여인. 그게 셀레나 소펜이었다. 셀레나 소펜은 소펜가의 외동딸이었으며, 로렌디스와 이어지기까지 10년이란 시간이 걸리는데…….
로렌디스가 후계도 없이 전장을 떠돌고, 로렌디스는 셀레나와 결혼 계약을 맺게 된다.
셀레나는 헬렌의 기후에 적응하기는 힘겨워하지만 잘 적응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나?
어땠더라?
* * *
“황후 폐하의 꽃꽂이 솜씨는 나날이 좋아지십니다.”
세이렌이 가위질을 하자 가느다란 줄기가 잘려 나가고, 뾰족한 가시들도 다듬어졌다. 곱게 다듬은 꽃을 화병에 넣자, 꽃잎에서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어쩐 일이니?”
“소펜 공작님께서 왔습니다.”
“오라버니께서 왔는데 바깥에 세워 두면 어떡하니. 얼른 안으로 모시렴.”
세이렌은 꽃꽂이를 하녀들에게 맡겨 두고 장갑을 벗었다. 흰 레이스 장갑을 벗자, 하녀들이 다가와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꽃꽂이 꽃을 바구니에 담은 하녀들이 부지런히 자리를 피했다.
“오라버니, 오셨나요.”
“우리 황후 폐하께서 오늘도 심기가 어지러워 보이십니다.”
황후의 외가인 소펜 가문은 세이렌의 오라비인 제럴드 소펜이 이끌고 있었다. 세이렌은 제 오라비가 앉기도 전부터, 꾹꾹 참았던 이야기를 터트렸다.
“헬렌 빌어먹을 곳이 또 이름을 높이 세웠더군요. 제도 곳곳에서 헬렌의 이름을 높게 칭송합니다. 황가가 이들에게 날개를 붙여 둔 꼴입니다. 제 주제도 모르고 날아오르는 꼴이 아주 가관이랍니다.”
제국의 이름 아래에 헬렌을 놓아야지, 헬렌이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게끔 두면 안 된다. 세이렌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화병에 담긴 꽃들이 사르륵 꽃잎을 나풀대며 날렸다.
“헬렌 공작이 젊잖습니까. 그 자유로운 영혼이 조금 방황하더라도 폐하께서 너그러이 지켜봐 주십시오.”
“아무렴요. 제 손 아래 안주할 날이 오겠죠.”
* * *
연회복은 화려하면서도 단아했다. 캐서린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연노란 드레스가 금발과 어우러져서 화사했다.
“괜찮으십니까?”
“드레스가 꽃 같아.”
연회복이라서 평상시에 입는 옷보다 더 화려하고 무거웠다. 걸음을 한 번 내디디면, 그 무게감이 발목까지 전해졌다.
화려한 만큼 무겁고, 무거운 만큼 입기 어려웠다. 하녀들이 여럿 달라붙어서야, 연회가 시작될 무렵에 맞춰 착용이 끝났다.
가슴에 노란색 연꽃을 수놓고, 허리 아래까지 레이스를 촘촘하게 덧댔다. 넨시가 레이스를 다듬고, 드레스 모양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목을 보이고, 새하얀 메리제인 슈즈가 은은히 드러났다. 토끼털로 안을 감싸서 보드랍고 착용감도 좋았다.
“각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런 이야기 없었는데?”
“숙녀께서 준비를 하는데, 다급하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보좌관님께서 나와 계시니, 각하께 모셔다 드릴 겁니다.”
새 구두는 아직 길이 들지 않아서 뻣뻣했다. 캐서린이 조심스럽게 걷자, 브레디가 맞은편에서 기다리다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집무실로 가자, 보좌진이 캐서린을 알아보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안에 계시니 들어가 보십시오.”
“나중에 연회장에서 뵙죠.”
“네. 마님, 그리고 잘 어울리십니다.”
브레디가 잊을 뻔했다며 덧붙이고는 다시 자리에 착석했다.
캐서린이 집무실 문을 두드렸는데도 안쪽은 조용했다. 문을 열자, 로렌디스가 서류를 보며 눈두덩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만 가지.”
그리고 로렌디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무언가 아차 하는 얼굴이었다. 그 시선이 캐서린에게 닿았다. 짙은 눈동자가 당혹스럽게 잠겼다.
“이상해요?”
“아니야.”
로렌디스는 짧게 일축하고 캐서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붙잡고 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자, 로렌디스도 그 걸음걸이에 맞춰 속도를 늦춰 걸었다.
연회장은 본관에서 걸어 나가야 했다. 헬렌 부부가 같이 모습을 보이는 건 결혼식 이후로 처음이었다.
모든 이목이 헬렌 부부에게 쏠렸다. 캐서린은 로렌디스의 팔뚝을 움켜쥐고 시선을 사선으로 내렸다.
“헬렌 공작이십니다.”
“헬렌 공작 부인께서도 같이 오시네요. 공식적으로는 결혼식 이후로 처음 뵙는 자리 같네요.”
작게 연 연회이지만,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권세가의 식솔들이었다. 익숙한 얼굴도 몇몇 보였다. 저번에 다과회에서 인사했던 귀부인이었다.
“헬렌 부인을 뵙습니다.”
“르루 부인, 다시 뵙네요. 마침 아멜리아 부인과 블레윗 부인께서도 같이 계시네요. 자리를 빛내 줘서 고마워요.”
“헬렌에서 이런 연회를 베푸는 건 오랜만에 있는 일이잖아요. 자리를 지키는 게 마땅한 일이죠.”
르루 부인이 가볍게 이야기를 꺼냈다.
“에밀리 양은 안 보이네요? 저번에 자매 사이가 좋아 보였는데, 어디 가셨나요?”
캐서린은 부채를 펼쳐서 은은히 웃으며 답했다.
“언니는 어머니와 함께 돌아갔어요. 제가 잘 지내는 모습을 봤으니 됐다며, 이젠 모두 다 놓고 시골에서 지낸다더라고요. 그래서 보내 드렸답니다.”
“어머,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건 없다. 그저, 지금은 여기 없다고만 이야기한 게 다였다. 시골집 모녀는 금방 잊혔다.
‘에밀리 그 애의 존재감이 거기까지였던 거지.’
캐서린은 다른 이야기를 꺼내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바꿨다. 그래서 누구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캐서린이 덤덤하게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고, 이들도 자연스럽게 대화에 녹아든 덕분이었다.
‘에밀리는 왜 이런 자리를 즐겼는지 아직도 모를 일이야. 제약만 붙고 즐길 건 없잖아.’
캐서린은 에밀리를 떠올리다 덤덤히 위스키 잔을 들었다. 답답한 속을 위스키로 쓸어내리자, 목 안이 개운해졌다.
‘깔끔하네.’
독주였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잔을 내려놓는데, 곁에서 호탕하게 웃던 사내가 캐서린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헬렌 부인께서는 술도 잘 하시는군요? 헬렌의 역대 모든 주인들은 독주를 자주 즐겼다던데, 역시 헬렌 부인이십니다!”
헬렌은 기본적으로 국경선과 맞닿은 영지였고, 자고로 전장을 떠도는 기사들은 독주를 물처럼 마시는 법이다. 로렌디스가 저번에 그랬듯.
캐서린을 지켜보던 로렌디스가 보좌관을 불렀다.
“따라다니면서.”
느릿하게 떨어지는 어조가 묵직했다.
“못 먹게 해.”
르루 부인이 ‘오호-?’라며 작게 감탄하며 웃었다.
“과민반응이라니까.”
캐서린은 작게 중얼거리며 위스키 잔을 내려놓았다. 로렌디스에게 보라며 일부러 그와 눈을 맞추며 하인에게 잔을 넘겼다.
그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