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넨시가 캐서린을 외곽으로 이끌었다.
“이쪽입니다.”
“고마워.”
“가족들은 꼭 뵈어야 합니까?”
“음. 작별 인사랄까.”
길목은 고요했고, 마차와 마부만 덩그러니 있었다. 캐서린은 그 길을 따라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길이 유난히 험해서 발아래를 특히나 조심했다.
“걸음걸이를 조심하십시오. 외각으로 나가는 길목은 길이 험합니다.”
“돌이 구석구석 많아.”
넨시가 캐서린을 부축하고, 캐서린은 덩그러니 놓여 있는 마차 앞에 가서 섰다. 외부 사설 마차였다.
아무런 문양도 없는 나무 마차. 내부는 대충 거친 천으로 덮어 두고, 표면도 투박했다. 그리고, 저 안쪽에서 악의에 찬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것 놓아라! 그 더러운 손 당장 치우란 말이야. 캐서린 밀던, 캐서린 이 빌어먹을 년! 어디 있는 거야. 흐윽! 어머니…… 어머니!”
캐서린은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이며 에밀리를 반겼다.
“저 여기 있어요, 언니.”
“웃니? 내 모습이 우스워? 너만 없으면 됐어. 너만 없으면 모두 내 거였어. 너 때문에 다 망쳤잖아.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너는 헬렌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어!”
“나도 알아요. 저는 헬렌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헬렌의 이름은 아주 잠깐 빌렸을 뿐이다. 그 이름을 나중에 돌려줄 때가 온다면, 캐서린은 주저 없이 돌려줘야 한다.
“있잖아요. 언니.”
“뭐야, 나를 또 조롱하는 거야?”
“언니가 먼저 미안하다고 몇 마디 했다면, 나도 아마 용서했을 거예요. 미련이랄 게 없었거든요. 내가 그렇게 하기 전에, 후회한다는 말 몇 마디만 했어도 달라졌어요.”
에밀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기회를 놓친 건 언니예요.”
“나, 나 용서한댔잖아.”
“언니는 사과한 게 아니잖아요. 그냥, 현실에 순응한 거지.”
캐서린은 에밀리를 찬찬히 눈에 담아냈다.
에밀리는 짧은 단발머리였지만, 지푸라기처럼 엉망이었다. 그 얼굴에 서린 악의는 악귀처럼 매서웠다. 에밀리는 악에 받쳐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 캐서린에게 악담을 쏘아붙이고 나서야 제풀에 꺾였다.
“캐서린. 나는 이날을 절대 잊지 않을 거다.”
어머니는 에밀리와 닮은 적발이었지만, 그래도 단정하게 빗어 내렸다.
“네 아버지께서 지금 네 모습을 보신다면 아주 좋아하시겠어.”
“그러시겠죠.”
“패륜아. 네 아버지도 죽어서 어디 묻혀 있을지 모르는데, 혼자 잘 버텨 보아라. 그 시체라도 찾길 기원하지. 그럼 거기에 가서 이야기하렴. 네 엄마가 너를 죽이려 했다고.”
죽어 버린 네 아버지는 애석하게도 답이 없겠지만 말이다.
어맨다는 빳빳하게 턱을 치켜들고 마차에 올랐다. 캐서린은 마차 앞에 서서 가족들을 똑바로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아이처럼 곱게 웃었다.
“이 모습을 눈에 담아내고 아버지께 말씀드릴게요.”
이들이 나를 버려서 나 또한 이들을 버렸고, 이들이 쫓아내기에 나 또한 이들을 쫓아냈으며, 결국에는…… 내가 이겼노라고.
“자작저에 남은 짐은 하인들을 시켜 뺄 거고, 수도원은 내부인을 시켜 감시할 것이고, 에밀리는 그 안에서 귀족으로 지낸 시간을 잊지 못해 힘들겠지만요…… 부디 잘 견뎌 내세요. 잘 가요.”
어맨다. 그 이름만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며 끝맺었다. 작별이란 가볍다. 당신 하나 떠나보낸다고 빈자리가 느껴질 리 없다.
자작저는 좀 조용하겠지만, 주인 없는 집을 객식구가 제 집처럼 지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건강하세요. 어맨다, 그리고 에밀리 양.”
마차 문이 잠겼다. 비명과 비슷한 발악이 들려오지만, 이 또한 캐서린이 관여할 일은 아니다. 덜컹대는 마차가 요란하게 떠났다. 길목에서는 뿌연 먼지가 피어오르고, 캐서린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천천히 걸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그러게. 이젠 어디로 가는 게 맞으려나…….”
* * *
하나를 치워 버리니까 후련함과 공허함이 같이 몰려들었다.
“외부적으로 가족들과의 일이 퍼지지 않게끔, 주의해 줘.”
“내부인들도 아주 일부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사이가 좋다고 소문이 나 있더군요.”
“언니 덕분에 잘 풀리는 일도 있네.”
에밀리가 밖에서 좋은 가족을 연기하며 스스로를 포장했을 거니까. 처음에는 그 가식이 역겨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 사실이 감사했다.
“어머니와 같이 보내 준 건 내 마지막 배려였어.”
“예?”
“모녀지간을 떼어 둘 수도 없으니까.”
캐서린은 상념에서 빠져나와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여기는?”
“훈련소로 가는 길목이로군요.”
길목이 기사단의 훈련소로 가는 통로와 맞닿아 있었다.
캐서린이 기사단의 거처를 지나는데 익숙한 인기척이 났다. 그 인기척은 스스로 그의 위치를 알려 주고 있었다.
캐서린은 고개를 들고 은은히 웃었다. 로렌디스가 훈련장 외벽 위에서 캐서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훈련 중이었어요?”
“응.”
“다 끝났어요?”
“아마도.”
외벽의 난간을 짚은 로렌디스가 몸을 아래로 수그렸다. 그는 그대로 외벽에서 뛰어내렸다. 높은 높이였는데도, 땅 위에 매끄럽게 내려섰다. 먼지 한 톨 일지 않고 고요했다.
“어디 가던 길이지?”
저거 좀 위험해 보이는데……. 캐서린은 외벽의 높이를 가늠하다가 아득해진 기분에 신음을 삼켰다.
“캐서린?”
로렌디스가 다시 한번 더 캐서린을 불렀다. 캐서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이 주변을 지나던 중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온 건 어떻게 아셨어요?”
“외벽 위에서 보면 보여. 마침 이 길목으로 지나가던 중이었고.”
로렌디스에게서는 멀끔한 머스크 향이 풍겼다. 땀 하나 흘리지 않은 모습은 뻣뻣하면서도 담백했다.
구깃구깃 구겨진 셔츠에서 나른한 퇴폐미가 흘렀다. 굵직한 팔이 매끄럽게 움직이고, 로렌디스가 성큼성큼 캐서린에게 가까이 다가와 섰다.
“움직여도 되나?”
처음에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데, 로렌디스가 손목 보호대를 풀었다.
넨시가 눈썰미 좋게 보호대를 받아 들고 뒤로 물러났다. 로렌디스가 손을 뻗어서 캐서린의 허리를 감았다. 허리가 한 줌에 잡혔다.
“못 움직일 거라고 여겼거든.”
“그,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힘들어했던 것 같은데.”
허리를 감은 속이 척추를 쓸었다. 허리를 젖히며 앓았더니, 그 주변이 아직도 얼얼했다. 그걸 아는지, 로렌디스는 꾸준히 그 주변을 더듬거렸다.
로렌디스에게 배려심이나 상냥함을 기대해 본 적은 없다. 로렌디스는 그런 쪽과는 거리가 먼 편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몸을 더듬거리는 건, 그를 계속 의식하게끔 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하, 하지 마요.”
“당황하면 말을 더듬는 건 버릇이었나?”
그런 버릇 없다. 당신 앞에서나 이러는 거지. 계모나 의붓언니 앞에서는 꺼내 본 적도 없는 어수룩한 모습이었다.
로렌디스는 아니면 됐다며 캐서린을 놓아주었다. 캐서린은 어깨를 팔로 감싸며 로렌디스에게서 뒷걸음쳤다.
“각하. 부기사단장입니다. 마님께서도 여기 계셨군요.”
“바쁘신 분을 제가 불러낸 건 아닌가 싶어요.”
로렌디스가 기사단의 훈련이 한창인지, 안쪽에서는 우렁찬 함성 소리가 들렸다. 단출한 셔츠 차림의 기사들이 여럿이었다. 캐서린은 안쪽을 흘끔거리며 로렌디스에게 되물었다.
“훈련 중인데 자리를 비워도 되나요?”
“그건 저들끼리 알아서 할 일이고, 내가 숟가락 떠다가 밥을 일일이 떠먹일 위치는 아니잖아.”
로렌디스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하자, 안쪽에서 안도하듯 탄식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함성 아닌 신음이 들리는 걸 보아서는, 오늘도 고된 훈련이 이어졌던 모양이다.
“썩어 빠진 정신머리를 다잡을 수 있다면, 스스로 몸을 혹사하더라도 감사한 일 아니겠어?”
훈련장의 외벽이 돔 모양이라서, 벽 한쪽이 완전히 뚫려 있었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고 안쪽으로 고개를 트는데, 로렌디스가 몸으로 막아 세웠다.
“어디 가려고?”
“당신이 바빠 보여서 자리를 비켜 드리는 게 맞나 고민했어요.”
“어딜 보면서 이야기해? 이야기할 거면 똑바로 보고 이야기해.”
캐서린은 그의 가슴에 시선을 뒀다. 땀으로 젖은 셔츠 아래로 몸의 윤곽이 선명히 드러났다. 단단히 잡힌 근육과 위협적으로 벌어진 어깨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캐서린은 입술을 더듬거리며 뒷걸음치다 넨시와 부딪히고, 넨시가 약하게 캐서린을 다시 밀어 주었다. 캐서린은 그 갑작스러운 행위에 나지막한 신음을 삼켰다.
“읏!”
로렌디스와 가까이 붙어 섰다. 시선이 아래위로 흔들리고, 길 잃은 아이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시선이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로렌디스가 고개를 수그렸다.
“왜?”
“별일 아, 아니에요.”
“별일 아닌 표정이 아닌데 똑바로 이야기라도 해.”
목을 감싸는 손이 목덜미를 촘촘히 옭아맸다. 어깨를 웅크리며 손을 다급하게 뻗는데, 손목 아래로 붉은 멍울이 가득했다. 손목과 팔뚝 안쪽까지, 이빨로 깨물고 씹은 자국이 선명했다. 붉은 연꽃 같지만, 붉은 선홍빛을 띤 선명한 입술 자국이었다. 치아로 잘근잘근 깨문 흔적이 적나라했다.
캐서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