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몽롱해진 머릿속은 이상하리만큼 평화로웠다. 조금 들뜬 것 같기도 하고.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듣기 좋다. 처음으로 스스로가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드는데…….
‘나쁘진 않네.’
캐서린이 배시시 웃자, 로렌디스가 입가를 다시 닦아 주었다. 양고기를 먹었더니 입가에 기름이 묻어났다. 그걸 손가락으로 대충 닦아 낸 로렌디스는 독주를 마시고 캐서린을 내려다봤다.
“맛있어요?”
“너는 그만 먹어.”
“로렌디스는 내게 너무 가혹해요.”
어질어질한 머릿속을 다잡고 고개를 빳빳이 드는데, 옅은 웃음이 터졌다. 저 사람 웃을 줄도 아는구나. 까무룩하게 잠기려는 의식을 부여잡았다. 맞은편에 대충 앉아서 마시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언제부터 로렌디스의 무릎에 앉아 있었더라.
로렌디스가 그만 마시라며 맥주잔을 빼앗아 가서 조금 투덜거리다가 드문드문 의식이 끊겼다.
어느샌가 그의 무릎 위에서 꾸벅꾸벅 조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언제 여기 앉았더라……. 캐서린이 그의 가슴에 기대서 한숨을 내쉬는데, 기사들의 시선이 쏠렸다.
“마님께서 졸리신가 봅니다.”
“두 분, 서로 긴 시간 떨어져 지냈어도 애틋하시군요. 각하께서 편지를 자주 나누는 건 봤는데 이건 또 색다롭습니다.”
로렌디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제 수하들을 노려봤다. 그 서슬 퍼런 시선에 알아서들 몸을 사렸다.
‘어이쿠. 실수했구먼.’
이들도 본능적으로 느꼈다. 제 주군께서 기분이 아주 저조하시다고. 그 이유 중에 8할은 마님께 연거푸 술을 따라 준 레너드의 몫이라고.
“모두 적당히들 마셔 둬. 내일 제때 나오지 못하는 놈들은 어디 하나 분질러질 각오들 하고.”
“어이쿠! 레너드 네 이놈 수고해야겠구나.”
기사들은 킥킥대며 맥주잔을 높이 들었다. 다음날 깨지든 말든 지금은 먹고 놀지 뭐. 각하께서 어디 술상을 엎을 분이더냐!
이들은 이번에는 담금주를 마신다며 술통을 통째로 더 가져오더니, 입구를 따서 술잔 가득 채웠다.
이놈들 이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로렌디스는 시큰둥하게 캐서린을 챙겨 일어났다.
“각하, 사람을 불러올까요?”
“되었다. 내가 직접 데려가면 돼.”
“내 발로 가도 돼요. 나 괜찮아요.”
로렌디스가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가 제법 또렷했다. 캐서린은 가볍게 작별 인사를 나누며 만찬장을 나섰다.
구두가 높아서 똑바로 걷기 힘들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의식적으로 노력하니까 걸음걸이는 꼿꼿했다.
만찬장을 나와서 저택 복도를 지나는데, 허리를 받친 손에 힘이 실렸다. 단단한 손아귀가 허리 한쪽을 움켜쥐었다.
팔 하나로 허리를 감싸는데, 한 줌에 잡힌 허리가 두 사람의 체격 차이를 노골적으로 보여 줬다.
“즐거웠어요. 나름 재밌고…….”
“내일 데니스에게 다녀와.”
“잔소리 엄청 할 거 같은데…….”
잔소리들을 짓을 했으면 어쩔 도리가 없지, 라고 대충 얼버무리는 어조가 그러길 바라는 사람 같았다.
계단을 딛자 찬바람이 뺨을 스쳤다. 복도 창문이 열려 있었다. 그걸 본 로렌디스가 닫으려는지 손을 뻗었다.
“그냥 놔둬요.”
“안 춥나?”
“차가워서 좋아요.”
창문을 열자 북풍이 밀어닥쳤다. 바람이 뺨을 때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려나. 긴 금발이 헝클어졌다. 손가락으로 가다듬어서 정돈하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로렌디스가 뒤로 바짝 붙어 있었다.
복도는 고요하지만 아늑했다. 사람 한 명 더 서 있다고 그러나. 캐서린은 조명으로 밝혀 둔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죽기 전에 눈이나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지내던 곳은 눈이 안 내렸거든요.”
“헬렌에서 지겹게 볼 거야.”
“당신이 자리를 비운 반년 동안 지겹게 봤어요. 그런데 보고 또 봐도 좋더라고요.”
최근에는 눈이랑 비가 섞여 와서 못 봤지만. 하녀들은 캐서린이 아쉬워하면 한결같이 이야기했다. 또 지겹도록 쏟아질 테니, 그때 한숨이나 쉬지 마십시오.
이들에게는 지겨운 자연현상이지만, 캐서린에게는 소소한 행복이었다. 내가 죽지 않았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그랬으면, 우리도 평범한 부부처럼 지냈을까. 냉혈한이라 알려진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지금과는 좀 다르려나.
‘지금도 냉혈한과는 좀 다른데.’
살아서는 전장을 떠돌고, 죽기 몇 달 전에야 오는 남편이었다. 일단 캐서린이 슬쩍 엿본 미래에서는 그랬다.
반년하고도 몇 개월 더.
그런 여유가 생겼다.
그럼 이제 나는 뭐 하지. 일반적인 부부처럼 부부 관계를 맺고 지내나? 그런데 나는 후계자를 낳지 못하잖아. 그럼 몸만 섞나?
“이건 이것대로…….”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몰라. 솔직히 그 머릿속에 든 생각을 유추하라는 건, 죄인들을 심문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지경이야.”
캐서린이 상념에 잠겨서 눈을 깜빡이는데, 창문이 닫혔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복도 구석으로 밀쳤다. 천천히 뒷걸음치며 그를 피하는데, 로렌디스가 구석진 모퉁이에 캐서린을 몰아넣었다.
사냥이라도 당하는 것 같았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벽으로 밀어붙이고 바짝 붙어 왔다. 다리 사이로 굵은 허벅지가 자리 잡았다. 이 이상으로 그를 피해서 도망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이 결혼을 깰 마음이 없어.”
“당신은 깨게 될 거예요.”
“데니스 교수는 너를 치료해 낼 거고, 그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거야. 제자까지 데려와서 치료제를 찾는다니까 기다려.”
로렌디스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그 감정을 억지로 눌러 담아서 덤덤해 보이지만, 그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너를 놓지 마.”
“나를 이만 놔주세요.”
스스로를 놓지 말라 이야기하지만, 캐서린은 그걸 어떻게 하는지조차 잊어버렸다.
그게, 내 선택으로 되는 일이었나요.
“차라리 살려 달라 그래. 살고 싶어서 나간다고 하든가. 죽으러 떠나는 사람처럼 굴면 누가 보내 줘.”
“그럼 나를 놓아주시나요?”
“그럴 리 없지. 너는 죽어서도 헬렌의 일원으로 죽을 거야. 그 죽음 뒤에도 너를 놓아줄 마음이 없으니까.”
그건 개인적으로도 유감이었다. 죽어 가는 사람을 붙잡아 두고 가두려는 의도도 아니고.
“헬렌에 발을 디뎠으면 헬렌으로 지내.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면 죽어서 벗어나되, 살아서는 그 자리를 지켜.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당신…….”
“너는 죽어서도 여기 묻힐 거야. 나는 너를 내보낼 마음이 없으니.”
그건 어디론가 도망가지 말라는 뜻이다. 그저 한적한 요양지에서 지내고 싶은 게 다였는데, 그냥 좀 죽으면 안 되나.
세상이 무기력하다. 차라리 다른 기회라도 있으면 모를까, 다른 기회도 안 보이는데 여기서 더 버티라니. 시한부 선고를 받을 때보다도 더 잔인한 이야기였다.
“악질적인 것 아시나요?”
그의 무던한 눈은 사랑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 눈은 개인적인 사감으로 이 결혼을 붙들고 유지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지내면 안 되나? 이대로 지내도 어려울 건 없잖아.”
로렌디스가 무던하게 캐서린의 허리를 쓸었다.
“이대로 지내. 남들도 다 이렇게 지내니까.”
“…….”
“그냥 이대로 지내.”
이미 했던 이야기다. 이제는 익숙했다.
손을 뻗어서 그의 턱을 쥐었다. 이래도 당신은 아무런 감정도 안 드나요.
조금은 뻣뻣하게 로렌디스에게 입술을 맞췄다. 그 입술은 차가웠다. 까끌까끌한 느낌보다는 두텁고 매끄럽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당신은 모르나요. 놓을 수 있을 때 놓아야지 다른 감정이 쌓이지 않는다.
떠날 사람은 미련을 남겨 두면 안 되고, 남겨질 사람은 그 미련을 품으면 안 된다.
로렌디스가 입을 더 깊게 맞췄다.
“으응.”
입안을 가르고 뭉툭한 혀가 밀려 들어왔다. 놀라서 입술을 다물자, 그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벌려.
치열을 훑은 혀가 혀뿌리를 옭아맸다. 촘촘하게 엮어 오는 그 깊은 숨결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깨물고 더 깊게 엮었다. 다리 사이로 파고든 허벅지가 몸을 단단히 받쳤다. 빠져나갈 틈도 도망갈 길도 모두 막아 버리고, 밀어붙이는 그 힘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허물어지는 몸을 받쳐 든 손아귀가 단단했다. 턱이 뻐근하게 아려 왔다. 입술 사이로 타액이 이어지고, 진득거리는 감촉이 입안에 가득 고였다.
그의 허벅지에 기대서 파르르 떨리는 몸을 추스르는데, 머리가 벽에 부딪혀 헝클어졌다. 긴 금발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얽혀 들었다.
“숨…… 막혀요. 흣!”
숨이 터지며 목소리가 흐릿하게 뭉개졌다. 손끝이 뻣뻣하게 꼼지락대며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술기운에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두부처럼 으깨져서, 몽글몽글하게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그 기분이 좋았다.
로렌디스가 그 미약한 손짓을 내려다보며 멈칫했다. 손끝이 파리하게 떨리고 있었다. 희게 질린 손아귀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지…….”
로렌디스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그건 캐서린을 탓하는 게 아니었다. 시선이 캐서린을 비껴갔다.
캐서린은 그 시선을 다시 스스로에게 돌려 두고 싶었다. 약간은 충동적이었다. 그의 턱을 쓸며 입을 맞추는데, 로렌디스가 시선을 다시 맞춰 왔다.
그 시선은 왜 그러냐며 캐서린에게 의중을 묻고 있었다. 허물어지는 몸을 그에게 기대서 간신히 중심을 잡는데, 허리 아래를 쓰는 손이 노골적으로 몸을 감싸 안았다.
“그래요. 남들처럼 지내요. 그것도 나름 좋네요.”
그의 눈빛이 짙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