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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38)화 (38/129)

38.

로렌디스가 귀환한 뒤로 많은 일이 있었다. 첫째로 시한부 사실을 들켰다. 그래서 데니스가 울먹이며 제 제자를 데려다 해독 방법을 찾는 중이었다.

둘째로 제도에서 테슬러를 알현했다. 그는 캐서린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 보이지만, 일단은 그냥 놔두는 것 같았다.

셋째로 로렌디스가 곁에 있다. 이게 가장 큰 변화였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로렌디스가 지금 캐서린의 곁을 지킨다는 것.

“만찬장까지는 각하께서 모실 겁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편안한 식사 자리라서 옷도 가볍게 입었다. 넨시가 머리를 편하게 올려 묶어 줘서, 목덜미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시간이 얼마나 됐지?”

“곧 약속 시간입니다.”

마침 로렌디스가 마중 나왔다.

“주인님께서 오셨군요.”

“오래 기다렸나?”

오늘 저녁, 기사단 내부 만찬장에 초대받았다. 캐서린은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로렌디스를 반겼다.

“오셨어요?”

로렌디스가 가죽 장갑을 벗으며 손을 내밀었다.

“제가 가면 기사들이 불편해할 것 같은데…….”

“사지에서 같이 뒹굴며 큰 놈들이라서 그런 건 없어. 궁금해한다면 궁금해하겠지. 다들 몸을 막 쓰는 놈들이라서 조금 무식하게 굴지도 몰라.”

그 이야기를 꺼내는 로렌디스는 평소보다 편안한 느낌이었다. 무거운 무게감도 내려 두고, 그는 느른한 수사자처럼 풀어졌다.

‘오랜 시간 로렌디스의 곁을 지켰다니까 서로에게 각별하겠지.’

그만큼 기사단과도 가까운 사이라는 걸 거고.

로렌디스가 식당 문을 열자 시선이 집중됐다. 만찬장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던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우락부락한 기사를 떠올렸는데 그건 아니었다. 그들은 말끔하고 해맑은 낯으로 캐서린을 반겼다.

“마님 오셨습니까?”

“각하께 전해 듣긴 했는데 직접 여기까지 오시다니, 이런 누추한 곳에 모셔서 저희가 송구합니다!”

기사들은 모두 흰 셔츠에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다. 셔츠에 옷소매만 대충 걷어 올린 기사들이 의자를 빼서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오십시오. 오시길 기다렸습니다. 각하께서 이런 자리를 마련하다니 결혼하시고 좀 변하긴 했습니다.”

기사들은 넓은 탁자에 모여 앉아서 연거푸 술을 마셨다. 그 모습이 호쾌하면서도 즐거워 보여서 시선을 빼앗겼다.

“뭘 그렇게 보지?”

“즐거워 보여서요. 회포를 푸는 자리에서 제가 껴 있어도……!”

캐서린은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그 말을 끝맺기도 전에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상석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그 곁에 앉았다.

“우리 각하께서는 결혼을 하셔도 그 쌀쌀맞은 태도는 여전하시군요. 변했다는 건 취소입니다.”

“전대 공작님께서 보신다면 아주 흐뭇해하겠습니다. 허허허. 술맛이 좋습니다.”

기사들은 잠깐 말을 멈추고 캐서린을 흘끔거렸지만, 금방 호기심을 잃었다.

술잔을 몇 통째 비우는 거지. 저들의 간은 무쇠로 만들었나? 저게 오늘 내로 다 소화되긴 해? 나중에 배탈이라도 나서 앓아눕는 건 아니야?

캐서린이 안절부절못하며 이들을 살피는데, 로렌디스가 이마를 짚으며 이야기했다.

“적당히들 좀 마셔라. 내일은 훈련 없나? 아침에 넋 빼놓은 놈들은 어디 하나 분질러도 된다는 뜻인가?”

“각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농담으로 안 들립니다. 마님도 계시는데 좀 풀어 주십시오!”

그 떠들썩한 분위기는 그간 봐 온 만찬과 달랐다. 예법과 격식은 내려 두고 자유롭게 술잔을 나눴다.

로렌디스는 규율과 격식에 얽매이는 걸 극도로 경계하며, 예법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일까. 로렌디스도 이들 속에 수월하게 섞였다.

“각하께서도 드십시오. 술통을 궤짝으로 들여놨으니, 저걸 다 마시기 전까진 이놈들은 나가지 못합니다!”

“무식하게 마시다가 사람 여럿 잡겠다.”

“각하께서도 독주를 병째로 드시잖습니까. 마님도 아십니까? 각하께서는 알아주는 애주가입니다. 헬렌의 전통주를…….”

캐서린은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헬렌에서 헬렌 공작이 가지는 지위 자체는 높지만, 그는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저 그를 따를 뿐이다.

로렌디스 헬렌.

그 이름이 가진 의미는 절대 가볍지 않다. 그런 로렌디스를 저렇게 편히 이야기한다는 건, 그의 곁을 오래 지켰다는 뜻이다.

이들이 격식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자리에 맞춰 격식을 내려 뒀을 뿐이다. 로렌디스도 그게 더 편해 보이고.

“당신을 아끼는 사람들이네요.”

그건 혼잣말이었다. 지나가듯 꺼낸 혼잣말에 맞은편에 앉은 기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각하께서는 그 성질이 차갑고 더러울 뿐이지, 마음속은 따뜻한 분입니다. 마님께서도 곁에서 겪으면 아실 겁니다. 딱 십여 년만 겪어 보십시오.”

“레너드 너는 조용히 하지 그러냐.”

로렌디스는 청포도를 한 알 먹으며 레너드란 사내의 입을 조용히 시켰다. 레너드는 그 이야기에 입을 다물었다.

“십여 년이라……. 그런 시간을 옆에서 보낸다면, 나도 여러분처럼 이 사람을 조금 더 알게 될까요?”

“그 시간이면 아주 질리도록 알고도 남습니다.”

레너드가 맥주를 호탕하게 비워 내며 이야기했다. 십여 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면 서로 더 가까이 지낼 기회가 올지도 모르지.

그런 희망을 품는 건, 스스로 기대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그 희망을 빼앗아 버리면 사람은 또 진창을 뒹군다.

“재밌는 사람들이네요. 로렌디스를 아주 잘 아는 것 같아요.”

“오래 봤거든. 내가 열다섯부터 전장을 떠돌았으니까 못해도 십여 년은 더 봤군. 지겹지. 저 얼굴들. 이곳이 뭐 좋다고, 뭣 하러 붙어 지내는지 모를 일이야.”

로렌디스의 이야기에서는 무심하지만, 옅은 애정이 묻어났다.

그건 신뢰를 기반으로 쌓은 애정이었다. 단시간에 쌓아 올린 게 아니라, 긴 시간 오랫동안 차근차근 쌓아 올린 것이다.

“이건 뭔가요?”

로렌디스가 시선을 돌린 틈에, 캐서린은 맞은편에 있는 술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리 마님께서 술이 궁금하신가 봅니다!”

레너드가 술병을 가져가서 캐서린 몫으로 한 잔 따르려 하자, 로렌디스가 악귀 같은 얼굴로 그 손목을 잡아챘다.

“무슨 짓이냐.”

“마님께서 궁금해하는 듯 보여서…… 저 실수했습니까?”

로렌디스가 치우라며 화낼 것 같아서, 캐서린이 먼저 선수 쳤다.

“나, 궁금해요.”

로렌디스가 표정을 찌푸렸다. 무언가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이것도 나름 일탈이려나. 데니스 교수가 술 먹지 말라는 이야기는 안 했으니.

“마셔 볼래요. 처음이란 말이에요. 나, 여기 일부러 데려온 거잖아요?”

아프다며 사람이 혼자 지내면 우울한 감정에 잡아먹히기 쉽다. 로렌디스도 그걸 경계해서 캐서린을 이들에게 데려온 길이었다.

“거참! 각하께서 걱정이 유별나시군요. 마님 이건 과일 맥주라는 겁니다! 톡 쏘는 헬렌의 전통 과일 향이 아주 일품입니다. 도수가 높……나? 이거, 도수가 몇이지?”

“달달한 건 도수가 낮은 법이다! 마님께서도 입맛에 맞을 수 있으니 한번 드셔 보십시오. 여분 잔, 남은 게 있냐?”

레너드가 직접 커다란 나무 잔에 맥주를 따랐다. 꼭 체리즙을 섞은 듯 상큼한 향이 솔솔 풍겼다.

쌉싸름한 술맛과 과일 향이 같이 퍼졌다. 눈을 부릅뜨며 술잔을 바라보는데, 로렌디스가 한숨을 내쉬며 턱을 괬다.

“입맛에 맞나?”

“쌉싸름하고 향기로워요. 부드럽기도 하고 톡 쏘기도 하고. 탄산처럼 부글거리는 게…… 말이 조금 길었나요?”

로렌디스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냥, 네가 말을 언제 그렇게 길게 했던가 싶어서.”

“평소와 똑같아요.”

“그럼 그런 거고. 그냥 내 기분 탓인 모양이지.”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따라서 똑같은 과일주를 마셔 보고 입맛에 안 맞는지 잔을 내려 두었다. 레너드가 눈치껏 독주를 꺼내 왔다.

“여기 각하 몫입니다. 각하께서는 맥주는 밍숭맹숭하다고 취급 안 하시니, 독주를 따로 빼뒀습니다. 그리고 각하, 마님께서는 식사를 하셔야지 않습니까? 술만 마시는 겁니까?”

“아아…….”

그제야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살폈다.

“양고기를 먹을 줄 아나?”

“식사 자리에서 나오는 건 몇 번 먹어 봤어요.”

“이건 석쇠에 구운 건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군. 조금만 먹어 봐.”

석쇠에 구운 고기는 야들야들했다. 접시도 투박하고 식기구도 볼품없었지만, 저택에서 혼자 먹을 때보다 더 값지고 맛있었다.

양고기를 한 점 더 먹는데, 기름진 입가에 손이 닿았다. 로렌디스가 입에 묻은 양념을 닦아 준 참이었다.

“묻어서.”

그리고 주변은 조용해졌다.

* * *

캐서린은 몽롱하게 눈을 깜빡였다. 약간 어지러운 게 기분이 오묘했다. 긴 머리카락이 계속 힘없이 흘러내렸다.

“쯧. 취했군.”

로렌디스도 미심쩍게 캐서린을 살폈다. 환자니까 일단 못 먹게 하는 게 맞는데, 저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까 선뜻 막지는 못하겠고. 그래서 놔뒀더니 이 지경이 됐다.

“좀 많이 드셨나?”

“그러게. 그만 드리라니까.”

“과일 맥주는 달콤하잖아. 저게 도수가 높으면 얼마나 높다고.”

레너드가 멋쩍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먹는 족족 술잔을 따르던 게 레너드였다.

“마님께서 지금 좀…….”

“그래. 과음하였지.”

“그으, 죄송합니다.”

“어쩌겠나, 본인이 좋다고 먹는데.”

로렌디스도 그쯤은 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들이야 말술이니까 몇 잔 연거푸 마셔도 될 일이지만, 캐서린은 그러면 안 된다.

“괜찮아?”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머리를 배배 꼬며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부부라면 이상할 건 없지만, 그게 제 상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월계수의 기사들은 겸연쩍게 목덜미를 긁적이며 흘긋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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