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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37)화 (37/129)

37.

“어머니께는 유감이 커요. 뭣도 모르고 혼자서 고독하게 죽었다면, 나만 억울할 뻔했죠?”

캐서린은 홀로 고고히 웃으며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나는 늘 혼자였어요. 그래서 외로움이 컸고, 가족애라는 걸 아주 약간은 바랐던 것 같아요.”

이제는 허망함만 남았지만요. 그래서 떠날 때 떠나더라도 이 모녀만큼은 갈라 두고 싶었다.

모녀지간의 그 애틋한 눈에 절망감을 안겨 줄래요. 그래야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것 같아요.

“캐서린, 아가! 무슨 오해가 쌓인 거니, 응? 우리 대화로……!”

“어머니! 오해 아니잖아요! 어머니가 했잖아요! 캐서린, 이건 엄마 혼자 한 일이야! 나는 진짜, 네게 그런 악감정 따위 없었어. 엄마, 죗값을 받으세요. 저는, 그 무서운 분들에게 미움받기 싫어요!”

어맨다의 시야가 가늘게 흔들렸다. 제 딸아이를 돌아봤다. 딸아이가 울먹거리며 그녀를 질책했다.

“에, 밀리?”

어맨다는 도끼눈을 뜨고 캐서린을 노려봤다. 이 아이 때문이다. 이 아이가 에밀리를 흔들고 있다. 너만 죽으면 됐는데, 너만 죽으면 이제 다 모두 우리 것이 되는데……!

“나는 밀던이다! 내게 이런 죄목을 씌우면, 밀던의 명예만 더렵혀지는 거야……! 네 아버지가 전장에서 전사하면서까지 쌓은 명예를 이딴 식으로 더럽히다니!”

“그렇대요. 언니.”

어맨다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졌다. 에밀리는 울먹거리며 횡설수설했다.

“어머니! 어머니도 이만 인정하세요! 저는 어머니께서 이 이상의 죄를 짓는 걸 원치 않아요! 이만 죗값을 받으세요. 저는, 이제 어머니를 놓았으니까.”

애초에 당신의 밀던이 아니라 나의 밀던이다. 그 명예를 더럽힌 건 당신들이지 내가 아니다. 그 사실을 되짚어 주고 비로소 웃었다. 이기지는 못했지만 진 것 또한 아니니까. 억울할 일은 없다. 에밀리는 자못 억울해 보인다만.

“캐서린 부탁할게.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어머니와도 그 연을 끊을 테니까!”

“세상에, 네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에밀리 모든 걸 다 놓더라도 나를 버린다니…… 내게는 너뿐이었어!”

에밀리는 이미 아는 것이다. 어맨다를 놓아야지 본인이 빠져나갈 틈이라도 생긴다는 사실을.

‘썩 보기 좋진 않네.’

산뜻할 거라고 여기진 않았어도, 나름 통쾌할 것 같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기운이 다 빠졌다.

“에밀리, 엄마는 너만 보고 지냈어. 그런데 네가 엄마에게 이러면, 엄마는 그럼 이제 어떡하라고! 엄,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니?”

“내, 내가 왜 엄마 때문에…….”

울먹이면서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애틋함이 묻어났다.

예전에 캐서린도 아버지와 저런 애틋함을 나눈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 일이라 이제는 기억 속에서도 흐릿하지만.

게다가 약간이나마 남은 그 애틋함은 어맨다가 다 지워 내고 기억 속에 묻어 버렸다.

‘네 아버지 이야기 꺼내지 마! 죽은 사람 이야기로 내 심기를 어지럽히면 혼날 줄 알아!’

지금 보면 왜 그간 참았나 싶다. 그건 금기 사항이 아닌데. 마음속에 담아 두고 지낼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 혼자 꾹 참으며 지내야 하는 줄 알았지.

“어머니.”

“…….”

“후회하긴 했어요? 내게 미안하다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은 적 있으세요?”

어맨다는 답하지 못했다. 공허하게 풀린 시선이 그저 허공만 맴돌 뿐이었다.

“괜한 걸 물었네요.”

“얘, 얘야!”

“나는 마지막까지도 단호하지 못했어요. 이제라도 단호해질게요.”

캐서린이 긴 다리를 꼬자, 드레스의 레이스가 사르륵하며 흘러내렸다. 다리가 비치는 모습이 요염했다. 그 모습이 이질적이면서도 잘 어울려서, 어맨다는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 됐어. 에밀리.’

캐서린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어머니와 언니를 떼어 둔다는 건 제게도 가혹한 일이에요. 그래서 두 분을 같이 수도원으로 보내기로 했어요. 귀족 지위는 박탈당하겠지만, 두 모녀가 함께 지낸다면 어떤 역경이든 이겨 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보았다.

에밀리의 처참하게 일그러진 낯을.

“너, 너 지금 그곳에 나를 보낸다니! 거기는 제도의 수용소보다도 더한 곳이란 말이야! 거기 가면 드레스도 못 입고 머리도 기르지 못하는데!”

“얘, 얘야 너는 지금 우리를 살려 준다는데…….”

“엄마, 엄마 혼자 가세요. 나는 가지 못해요. 엄마 제발……! 엄마만 보낸다면 나는 귀족으로 살게 해 준다면서 캐서린!”

에밀리는 사색이 돼서 어맨다의 팔에 매달렸다. 어맨다는 흠칫하며 딸아이의 손을 피하고 절망 속에서 흐느꼈다.

“애석하네요, 어머니. 온정으로 키운 듯 보이지만…… 에밀리는 그게 아닌 모양이에요.”

캐서린은 하녀에게 눈짓했다.

“가위를 가져와요. 그 머리카락을 잘라 내며 인연도 같이 잘라 내요.”

“아아악! 이게 무슨 짓이야!”

“먼 길 떠나는데, 조심해서 오르시길.”

수도원에 가면 여인은 머리를 기르지 못하고, 이미 기른 머리는 잘라 내야 한다. 귀부인들에게 긴 머리는 고고함의 상징이라지만, 이젠 이들과는 무의미한 상징이었다.

“캐서린 제발! 나를 용서한다는 건 다 거짓말이었니? 왜 내가 어머니의 죗값까지 같이 받아야 해!”

“용서로 그 목숨을 살려 뒀으니, 거짓말은 아니에요.”

목을 움켜쥔 기사들이 어맨다와 에밀리를 꿇어 앉혔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바닥에 한 뭉텅이씩 잘려 버려졌다.

에밀리는 오열하다 혼절해 버리고, 어맨다는 그런 에밀리의 모습을 사색이 돼서 지켜봤다.

* * *

“여긴 왜 온 거야?”

“나 여기 있는 줄 알았어요?”

캐서린이 막 방에서 나오는데, 로렌디스가 벽에 기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안에서 하는 이야기를 다 들었다는 듯 심드렁하게 등을 돌렸다.

“방에서 쉬라니까 말은 지독스럽게도 안 듣네.”

그건 투덜거린다기보다는 걱정하는 마음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캐서린도 은은하게 웃었다.

“이제는 만족해?”

“글쎄요. 만족스럽지도 불만족스럽지도 않아요. 내가 가족들에게 복수하겠다고 여기까지 데려다 놓은 게 아니니까요. 다 됐으니 매듭이나 짓자고 한 일이었거든요.”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바라보더니 시큰둥하게 답했다.

“너는 말을 너무 어렵게 해.”

“……그랬나요?”

“네가 조금은 아쉽다고 해 줬으면, 대신 해결해 주는 길도 있었지. 너는 곧 떠난다며 여기저기 벽치기 바쁘고, 그런 너는 보는 일 또한 유쾌하지는 않아.”

로렌디스도 캐서린을 잘 안다. 그녀의 속마음이야 뻔했다. 억지로 벽을 올리면서까지 스스로를 보호하려 했겠지.

“나가지.”

하인들이 촛불을 켜 지하에서 나가는 길목을 밝혔다. 드레스 자락이 사부작대며 발치에 밟혔다.

어깨를 은빛 담비 털로 덮고, 외투로 감싼 모습은 아름답고 고고했다. 여우 털로 엮은 모포가 바닥에 끌렸다.

“벽 칠 마음은 없었어요.”

“무슨 뜻이지?”

“내가 벽을 치더라도, 로렌디스는 나를 놓아줄 마음이 없으니까. 그 손으로 나를 놓지 못한다면, 나 또한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요.”

로렌디스의 의지로 캐서린을 헬렌에 묶어 두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여기서 캐서린의 의지는 무의미하다. 그 의지를 짓밟아도 될 권력을 쥔 게 로렌디스였으니까.

“성공하셨어요, 로렌디스. 당신은 온전히 나를 묶어 두셨어요.”

캐서린은 엉킨 머리카락을 풀어서 빗어 넘겼다. 가닥가닥 흩어지는 머리카락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각하. 브레디입니다.”

브레디는 캐서린도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멈칫하더니 ‘다행입니다. 같이 있었군요.’라고 일축했다.

“밀던 부인과 영애를 밀던 가문에서 제적하고, 수도원으로 보낼 준비를 끝내 두었습니다.”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마님께서 조용히 해결하기로 마음먹으셔서…… 제가 할 일도 없었습니다.”

캐서린이 시한부라는 사실은 아직 기밀이고, 그건 헬렌의 내부인 중 몇몇만 아는 사실이었다. 넨시와 측근 하녀들에게는 이야기해야 하지만…….

‘외부적으로는 기밀이니까.’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손목을 붙들었다. 말없이 내딛는 걸음이 묵직했다.

“이번 일은 네가 하자는 대로 할 거야. 일단은.”

“일단은요……?”

“그 목숨을 보전해 두는 건 어디까지나 네가 살아 있다는 가정 아래에 베푸는 관용 같은 거야. 그들이 이번 일을 입 밖에 내거나, 네 안위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때는 내 식으로 일을 처리할 거야.”

그 둘은 이 일을 절대 얘기할 수 없을 거다.

어맨다의 침묵은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다. 에밀리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지. 어맨다가 헬렌 부인을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간, 그 딸인 에밀리도 목숨 보전하기가 힘들다.

“아직은 네게 시간이 있으니 놔두지만, 네게 정말 시간이 없으면 그때는 그 모녀의 목도 친다는 뜻이야.”

캐서린이 죽게 되면, 모녀의 미래도 더 어두운 길목으로 걷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목으로 모녀를 이끄는 건 로렌디스가 될 것이다.

캐서린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브레디가 한 발 더 다가왔다.

“마님께서는 침실로 가십니까?”

“침실로 가 봐야죠. 바쁘신 거면 혼자 다녀와도 돼요. 브레디가 여기까지 온 거면, 로렌디스에게도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은데요?”

“바쁜 일은 아닙니다만, 각하께서 미룬다면 미뤄 보겠습니다.”

로렌디스는 회중시계를 확인하더니 캐서린에게 이야기했다.

“늦어도 저녁에는 끝낼 테니까 식사는 같이 하지.”

“가, 각하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브레디는 화들짝 놀라서 로렌디스의 귓가에 고요히 속삭였다.

“이런 말씀을 드려 송구합니다만, 각하……. 저녁에 기사단 수하들과 식사하신다고, 만찬일정 잡아 두셨잖습니까? 취소해야 합니까?”

“바빠서 미루던 게 지금까지 밀렸나?”

“각, 하……. 그으, 계속 미루고 미루다 겨우 잡혔습니다. 각하께서도 좀 바쁘셨잖습니까? 그래서, 오늘만큼은 시간을 낸다고 하셨습니다만.”

보통은 기사들에게 얼굴만 비추면 될 일이지만, 로렌디스는 그 기사들과 최전선에서 같이 싸우던 사령관이었다.

“로렌디스도 참석해야 할 자리 같은데요. 너무 제게 마음 쓰지 마시고…….”

“그럼 아내도 같이 참석한다고 이야기해 둬.”

만찬이 있다면 만찬에 같이 참석하면 될 일이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일축하고, 시간이 되면 찾아간다며 캐서린을 먼저 돌려보냈다.

“떠들썩하니 기분 전환하기에 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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