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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36)화 (36/129)

36.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로렌디스는 헬렌에 머무르는 시간보다, 밖을 떠도는 시간이 더 길었다. 이건 헬렌에서 지내는 영지민이라면 누구나 인정했을 것이다.

“혹시 헬렌에 더 머무르시나요?”

“나를 어디론가 떠나보내려고 작정한 듯 보이는데, 나는 애석하게도 한동안 헬렌을 지킬 예정이야.”

기뻐해야 할 이야기지만, 또 마냥 기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로렌디스가 제복 앞섶을 가다듬으며 이야기했다.

“저택이 이 꼴이 되도록 자리를 비운 것 또한 내 잘못이다.”

한동안은 그 자리를 지킬 테니까 알아 두라며, 로렌디스가 엄포를 놓았다. 그 목소리가 짐짓 단호해서 더 캐묻지는 못했다.

“캐서린 밀던. 밀던의 핏줄은 지금 그대 하나만 남았지만, 밀던 또한 헬렌의 가신이야. 어려움에 처했다면 헬렌이 돕는 것 또한 일리 있지.”

저 이야기에 담긴 의미는 한 가지다. 이제 에밀리와 어맨다는 더 이상 밀던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밀던은 작고 한미한 가문이지만, 캐서린에게는 어떠한 것보다도 의미 있던 이름이었다.

“고마워요.”

로렌디스가 브레디를 정확하게 짚어서 불렀다.

“브레디.”

“네, 각하. 부르셨습니까.”

로렌디스의 시선은 바닥에 엎어진 에밀리에게 닿아 있었다. 브레디는 그 시선만 보고도, 다음에 이어질 말이 짐작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렌디스는 시큰둥하게 에밀리를 죄인이라고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죄인은 가둬서 감시해.”

“감시인을 써서 따로 감시하겠습니다.”

“허용된 이들 외에는 감히 접근해서도 안 된다. 내 허락이 있기 전까지 물 한 모금도 주지 말고. 그 모친도 데려다 놓고.”

브레디가 에밀리를 어깨에 둘러멨다. 에밀리는 이미 혼절해서 기절해 버린 지 오래였고, 희게 질린 낯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캐서린 밀던은 가볍게 넘길지라도, 헬렌은 그렇지 못해. 너의 목숨에 저 여인들의 목숨 또한 달려 있음을 잊지 마.”

가족들을 살려 두는 건 어디까지나 캐서린이 살아 있을 때까지고, 캐서린에게 가망이 없다면 이들 또한…….

“나는 지금이라도 저 목을 베어 내서 처벌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이번만큼만 너를 봐서 관용을 베풀었지.”

그 관용도 어디까지나 캐서린과의 인연을 고려해서 베풀었다. 그 인연이 끊긴 시점에는 그런 관용조차 베풀 일이 없을 것이다. 그 점을 지적한 로렌디스는 날카롭게 벼려진 기운을 갈무리했다.

* * *

그날은 그냥 침대에 앉아서 지냈다. 우두커니 앉아서 창밖을 보는데, 그게 꼭 시름에 잠긴 소녀처럼 보이기라도 했나?

하녀들도 똑같이 시름에 잠겼다. 그건 캐서린을 측근에서 챙기는 넨시도 마찬가지였다.

“마님께서 요즘 주치의 선생님을 자주 찾던데 왜 그렇답니까? 더군다나, 데니스 교수의 시름도 깊어졌고…….”

“외부에서 의사가 왔던데 어디가 편찮으신가?”

그 시각, 그 당사자는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여유를 만끽하는데 주변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저택이 어수선하구나.”

“송구합니다. 원래는 조용한 곳인데 며칠째 이러하군요.”

넨시가 한숨을 내쉬며 찻물을 따랐다. 그 향이 은근하니 매혹적이었다. 캐서린은 찻잔을 들고 향을 음미했다.

“에밀리는 어디 있지?”

“보좌진이 지하로 데려갔습니다. 마님께서도 그렇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마님, 큰일이라도 난 겁니까?”

“나중에 넨시에게도 이야기해 줄게. 그 전에, 에밀리에게 다녀오려는데 길 안내를 부탁해.”

로렌디스가 지하에 다녀오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안 했으니, 언니와 작별 인사쯤은 나눠도 될 것이다.

“며칠 전부터 넋을 빼 두고 두려움에 떨었다더군요.”

“심약한 언니거든. 유리는 딱딱할지언정 깨지기 쉬운 법이니까.”

도착한 곳에는 에밀리가 갇혀 있었다. 에밀리는 살기를 고스란히 다 맞은 탓인지, 아직도 넋을 놓고 있었다.

“그가 나를 죽일 거야. 그 사람이…… 그 전장귀가 나를 죽일 거라고. 어머니가 한 짓 때문에 내가 왜 이런 수고를 해야 해!”

격리실은 지하의 빈방을 임시 수용소로 마련해 둔 곳이었다. 헬렌은 고대 왕국의 터였고, 그 규모도 상당했다.

격리실 입구는 나무 창살로 막아 두고, 나무 창살과 방문을 모두 열어야지 안에서 나올 수 있었다.

에밀리는 캐서린을 보지 못했다. 어딘가 이미 잔뜩 망가진 아이처럼 주절거리는 게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굳이 안 찾아가도 되겠어.”

“마님…….”

“우리 언니는 벌써 어머니를 놓았거든.”

조곤조곤하게 속삭이는 이야기는 작지만 또렷했다. 에밀리는 눈시울을 잔뜩 붉히며 부르르 떨었다.

“이게 다 어머니 때문이야. 다 어머니 때문……!”

* * *

어맨다는 빈방을 서성이며 에밀리의 연락을 기다렸다. 헬렌에 머무른다던 딸아이와 연락이 끊긴 지 며칠이 지났다.

‘이제 연락이 올 때도 됐는데……. 헬렌에서 환대라도 해 줬나?’

아무런 소식도 없으니 그 아이를 붙잡고 묻지도 못하고. 외성에서 머무르며 에밀리의 소식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얘는 늦으면 늦는다고 엄마한테 연락이라도 해야지. 하여간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둔탁한 파열음이 들라고 문짝이 뜯겨 나갔다. 저렇게 무식하게 문을 열고 오는 인간이 또 있다고……. 어맨다는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며 주춤거렸다.

“누, 누구십니까!”

“어맨다 밀던 되오?”

“내가 어맨다입니다만 누구십니까?”

낯선 사내 셋과 여인 하나가 제복 차림으로 어맨다를 찾았다. 그들은 로브를 써서 얼굴을 가렸지만, 그 소속이 어디인지는 로브에 선명히 박혀 있었다. 그리고 어맨다는 그대로 혼절했다.

다시 깨어난 어맨다는 어둑한 지하에 갇혀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저 에밀리예요. 어머니, 알아보시겠어요?”

“에밀리가 아니니? 내 딸아, 네가 왜 여기 있니? 내성에서 며칠 지낸다더니, 왜 여기에 갇혀 있어!”

그곳은 좁은 방이었다. 그저 비좁은 방이었지만, 창문부터 방문까지 창살로 막아 둔 방은 누군가를 가둔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작은 나무문을 열면 창살로 된 감옥이 하나 더 나오고, 그 창살까지 열어야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니? 내성에서 며칠 지낸다더니 도대체 일이 왜 이 사달이 났어!”

어맨다는 제 딸아이를 다그치며 버럭 소리부터 내질렀다. 에밀리는 그런 어맨다의 윽박에 놀라서 울먹거렸다.

“아가, 미안하다. 엄마가 그러려는 게 아니라……. 여기서 왜 지금 이러고 있니?”

“어머니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예요. 그런 일을 저질러 두고 지금 어머니께서 무사하리라 여겼나요!”

그 비좁은 방도 가구부터 벽까지 모두 고풍스러웠다. 마치, 패망한 왕가의 어느 별실 같았다. 하지만 그 고풍스러움에도, 그 안은 소름 끼치리만큼 조용했다. 누가 봐도 격리실이나 수용소로 쓰고 있다는 게 보였다. 가둬놨다고? 우리를?

문득 그 의미를 깨달은 어맨다가 에밀리의 어깨를 잡았다.

“너 설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건 아닐 테지? 응? 제발 아니리라 믿는다. 아가! 에밀리!”

“어머니께서 저지른 죗값은 어머니께서 갚으세요. 나는 그 무서운 분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 없어요. 그분은 야차예요. 악귀라고요!”

대놓고 살기를 보이던 남자는 살인귀였다. 그 남자의 살기가 아직도 선명했다. 그는 목덜미를 노리는 맹수처럼, 이빨을 보이고 살의를 품었다.

살점을 죄다 물어뜯겨 도륙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느낀 살기가 그 수준인데, 그 분노가 온전히 에밀리에게 쏟아진다면……!

“나는 감당하지 못해요. 어머니께서 한 일이잖아요. 캐서린이 저를 용서해 준다고 그랬어요. 어머니, 제발 죗값을 치르세요.”

“그 맹랑한 년이 너를 무슨 말로 구워삶은 거야!”

어맨다는 어여쁘기만 한 딸아이가 무슨 사고를 친 건지,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저 입으로 곧이곧대로 이야기했을 리 없지.

그 일을 제 입으로 이야기했다고? 그럴 리 없지. 그럴 리 없어. 그건 제 무덤을 파는 짓이다.

“너, 뭐든 모른다고 한 게 아니니? 무슨 이야기를 꺼낸 거야! 다 모른다고 했지? 응? 모른다고 모르는 척하면 되지, 아니지, 그런데 왜 에밀리 네가 여기 있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격리실 창살이 열렸다. 어맨다는 눈을 부릅뜨며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선 캐서린이 서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어머니.”

“네, 네가 왜 여기 있니?”

헬렌에서 헬렌 부인을 보는 게 놀라울 일은 아니다. 헬렌 내성을 다스리는 게 헬렌 부인, 그게 캐서린 헬렌이었으니까.

어맨다는 기절이라도 해 버리고 싶었다.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라며, 앞으로의 일이 그저 허상이길 바라며…….

“너! 네 언니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애가 왜 사색이 돼서 벌벌 떨어!”

이 아이를 헬렌으로 보내는 게 아니었다.

그 늙은이가 노환으로 죽지만 않았어도, 저 아이를 보내서 조용히 치워 버리는 거였는데……. 조용히 죽어야 할 아이가 너무나 떳떳하게도 제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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