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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35)화 (35/129)

35.

“에밀리 언니, 울지 말아요. 내가 그랬잖아요? 어머니께서 저지른 죄 때문에 언니가 비난받는 건 나도 원치 않는다고요.”

“이 언니도 너무 마음이 아파. 내 어머니가 저지른 죄니까, 그렇지, 내가 수습하는 게 옳아. 미안해. 너무, 미안해.”

어설픈 촌극은 말투도 어설프고 대사도 어설펐다. 에밀리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무릎을 꿇는 게 이토록 쉬운 일이었나.

그럼 에밀리는 왜 침묵하며 지냈을까. 이런 가벼운 무릎이었으면 이미 몇 번이고 꿇고 죄를 빌었어도 됐을걸.

“제 어머니가 저지른 일이에요. 모두, 우리 가족들이 잘못했어요! 저희를 벌하셔도 좋아요. 부디 밀던이란 이름만큼은 미워하지 마세요. 밀던은 저희의 자긍심이에요!”

“그 자긍심이란 말이 참 쉬워.”

“제 어머니가 저지른 죄는 제 어머니 선에서 끝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역겹다. 나의 자긍심이 어째서 당신의 자긍심이 되었나요? 나의 밀던이 어째서 당신의 밀던이 되었고요? 왜 내게서 밀던을 앗아 가요?

그 뻔뻔함이 역겹다. 아버지와 캐서린이 지내 온 그곳은 밀던이다. 오롯이 밀던 그 자체였다.

“너는 밀던을 사랑하잖니? 우리를 용서하라는 말은 안 할게. 그래도 밀던은…… 죽은 아버지를 떠올려서라도, 밀던 만큼은 그 명예를 지키게 해 줘. 어머니는 마땅히 죗값을 받게끔 할게!”

“독초는 어디서 얻었나?”

로렌디스가 묻자, 에밀리는 울며 이야기했다.

“어머니께서 살사초를 얻어 오셨어요! 그 유통 경로는 저도 잘 몰라요. 그저, 꽃차라며 캐서린에게만 먹이고 저는 먹지 못하게끔 항상 단단히 주의를 주셨어요!”

횡설수설하는 목소리는 어딘가 홀리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로렌디스가 다리를 꼬고서 캐서린을 눈짓했다. 너는 이 녀석을 용서하겠다고, 그런 약한 마음 먹은 거냐. 실망감으로 물든 눈이 캐서린을 바라봤다.

“어머니께서 하시는 일을 막지 못한 제 죄 또한 커요! 다시는 헬렌에 모습을 보이지 않겠어요. 죽은 듯 지낼게요!”

로렌디스는 소파에서 느릿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보좌관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그 거친 기운이 꼭 사람 하나를 죽이기라도 할 듯 위협적으로 살기를 내뿜었다.

“각하. 응접실입니다. 여기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건…….”

“네가 한 짓이 아니니 용서하라. 어리석었어. 지금껏 침묵한 것 또한 죄야. 그 뻔뻔한 낯짝을 베어서 그 어머니에게 가져다주고, 이 여인 또한 베어 낼 거야.”

캐서린은 로렌디스의 옷자락을 당겼다.

“진정하세요. 로렌디스 흥분하셨어요.”

“너는 왜, 어째서…… 용서를 입에 담지?”

브레디도 그건 이해되지 않는다며 조심스럽게 캐서린의 낯을 살폈다.

“캐서린 헬렌 너는 좀 더 사람이 영악해질 필요가 있어. 네가 지금 용서해 준다고 하면, 누가 네 마음을 갸륵하게 여길까? 죽어 없어진 너만 억울하지.”

로렌디스는 여기서 당장이라도 에밀리의 목을 베어 낼 것 같았다. 전장에서나 보일 살기가 응접실 안을 가득 채웠다. 그게 숨이 막혔다.

여기까지 예상하긴 했어도, 그 수준이 더 날카로웠다. 살기를 정면에서 맞은 에밀리는 이미 혼절해 버린 지 오래이고.

“살기를 거둬 주세요. 지금, 제가 숨이…… 막혀서.”

“이보십시오! 환자 잡으려고 작정하셨습니까? 이분은 제 고객입니다. 아직 받지도 못한 금화가 몇 개이고 돈주머니가 몇 자루인데요!”

제임스는 본인이 쏟아부은 억제제와 진통제가 몇 통인데, 그 약값 다 하기도 전에 살기로 사람을 보내 버린다며 투덜거렸다.

로렌디스는 검을 응접실 바닥에 내팽개치고 캐서린에게 다가왔다. 그 서슬 퍼런 눈이 캐서린을 꼼꼼히 훑어 내렸다.

“어디 아픈가?”

“아, 아니에요.”

로렌디스가 데니스에게 진단하라 하자, 데니스가 제임스에게 다시 눈짓했다. 제임스는 삐뚜름하게 캐서린을 진단하고 진정제를 처방했다. 제임스는 그래도 불안했는지, 캐서린만 들리게 작게 속삭였다.

“어디 아프지 마. 아가씨 숨이라도 멎었다간 내 숨도 같이 멎어 버릴 듯하니까.”

데니스는 그 뒤로도 시큰둥하게 로렌디스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 말투가 멋대로인 건 나리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길바닥에서 못 배워 먹어 그런 겁니다.”

“제도의 의사들은 모두 귀족이 아니었나? 평민이 의사가 됐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그 이야기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제국의 의사들은 모두 의사를 대대로 배출해 내는 귀족 가문에서 나오는 편이었다. 그래서 학계에서 자주 거론되는 의사들도 모두 귀족이고, 그 내부에서도 파벌이 자주 나뉘었다.

데니스는 헬렌에서 지내면서 여러 제자를 거둬들였고, 파벌 다툼에는 무신경한 편이었다. 외딴 북부에서 진료동을 하나 세워서 연구만 했으니, 그 전적만 봐도 뻔했다.

데니스는 그저 의학을 좋아할 뿐이었다. 학벌이나 파벌에는 무관심했던 만큼, 평민인 제임스를 제자로 들일 수 있었다.

“평민들도 의학을 접하는 건 가능합니다. 재산이 없으니 직접 자격증을 취득할 길이 없었을 뿐입니다.”

“그럼 제임스와는?”

“제가 제자로 거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캐서린은 조용히 데니스에게 되물었다.

“그럼 사제 관계는 언제 쌓은 거예요?”

“우연히 그 재주를 직접 겪었습니다. 북부에서 눈사태에 휩쓸려 죽어갈 뻔한 걸, 제임스 녀석이 주워다 치료했거든요.”

그 과정이 마냥 평탄하지는 않았는지, 그 이야기를 꺼내는 데니스의 표정이 어둑했다. 그놈 자식, 사람의 생살을 찢어서 봉합하고……. 마취도 없이 지옥이었다며 어렴풋이나마 그때를 떠올렸다.

“제임스는 제가 제자로 거둬 키워 냈……. 제가 제자로 거뒀지만 키우지는 못했습니다. 그 솜씨가 처음부터 월등했거든요.”

“죽어 가는 양반 살려 두었으면 나도 할 건 다했어. 지금 저 아가씨도 나 아니었으면 얼마 더 살지도 못했어요!”

제임스는 미약하게 존댓말을 다시 붙였다. 맞은편에 앉은 로렌디스를 의식한 행동 같았다. 제임스는 보도 못한 납작한 자세로 엎드렸다.

“그 나리, 죄송하지만 살기 좀 거둬 주시면 안 됩니까? 아가씨께 가는 살기는 거뒀어도, 지금 저한테는 그 살기가 고스란히…… 죄송합니다. 입 다물겠습니다.”

로렌디스는 머리를 헝클이며 살기를 거뒀다. 뻣뻣하게 경직되었던 기운이 다시 나른하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몸은?”

“괜찮습니다. 안정제를 처방했으니 아마 차츰 안정될 겁니다. 그래도 환자 앞에서 그런 무식한 살기는 보이지 마십시오.”

데니스는 제 제자의 입버릇을 보며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각하, 이 아이는 제가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결국 데니스가 제임스를 먼저 데리고 나갔다.

로렌디스가 살기를 거뒀어도 그 기세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는 손가락으로 무릎을 툭툭 두들기며 숨을 골랐다.

“내게 숨기는 게 더 남았나? 이왕이면 지금 다 이야기해 주었으면 싶어서.”

“이제 숨기는 건 없어요. 다 로렌디스에게 이야기했고, 그 외부인 의사도 막 재회했으니……. 로렌디스가 모르는 것 또한 없어요.”

로렌디스는 성가시다는 듯 제 발아래를 내려다보며 브레디에게 지시했다.

“내부 사용인들 입단속 시켜 놔.”

“알겠습니다. 미리 주의시켜 두겠습니다.”

브레디가 낮게 한탄하며 속삭였다.

“그래도, 마님께서는 굉장히 유하시군요.”

“음, 어째서요?”

“죽어 마땅한 죄질입니다. 제게 수도원 이야기를 꺼낸 것도, 두 모녀를 벌하기 위해서입니까?”

“네. 그래도 나름 단호했잖아요? 수도원이면 나쁘지 않은 형벌일 거예요.”

수도원이 왜 귀족들에게 악질적인 곳이라고 여겨지는지는,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알기 쉽다.

수도원의 죄인들은 모두 머리를 깎고, 자유를 박탈당한다. 모든 행동을 감시받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며, 행동 하나하나가 관리자 아래서 통제되었다.

“헬렌에는 가신들을 심판하는 권한이 있으니, 이들을 수도원으로 보내는 데 어려움은 없을 거고요.”

“그런 건 굳이 헬렌의 이름은 안 써도 될 일이야.”

로렌디스가 굵은 손아귀로 어깨를 틀어쥐었다.

‘아파.’

눈살을 찌푸리는데, 그 손아귀의 힘이 점점 더 억세졌다. 시퍼런 핏줄이 솟은 손등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데 너는 그것만으로 만족하나?”

“조금 아쉽긴 한데, 가족이잖아요.”

로렌디스가 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기대라고는 일절 없군.”

“아, 아파요. 으읏!”

“너는 지금 네 위치를 조금도 깨닫지 못했어. 그 위치에서 사람을 짓뭉개는데 고작 그렇게 끝낸다라.”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며 웃었다. 그 여린 속을 보면 가끔 다 뒤집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어. 차라리 울릴까 싶어지네. 덤덤하면서도 차가운 표정에 묘한 집념이 깃들었다.

“마음이 약해졌나? 이제야 가족의 정이 그리워져서 그랬나?”

로렌디스가 어깨를 쥔 손을 풀어 주었다.

“그럼 퍽 실망스러워.”

“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에요.”

“그럼.”

“놓으려고요.”

내 손으로 직접 놓으려고 그런다. 미련 따위 남기지 않게끔. 스스로 다 놓고 떠날 기반을 다지는 중이다.

“자를 건 가위로 잘라 내는 게 맞더라고요.”

캐서린이 머리카락을 가다듬자, 로렌디스도 멈칫하며 손을 거뒀다. 군더더기 없이 손길로 팔을 거둬 내고 제복을 가다듬었다.

“제도에서의 일은 잘 끝냈나요? 폐하께서 더 오래 붙잡아 두실 줄 알았는데 일찍 귀환하셨네요.”

로렌디스는 그 이야기를 피하려 한다는 걸 깨달았는지, 더 캐묻는 대신 대답했다.

“며칠 머물면서 비위 맞춰 줬으면 됐지. 폐하께서도 그 이상으로 바란 건 아닐 테니. 오래 머물렀으니 최소한의 도리는 다했어.”

보통 헬렌을 떠나면 잘 오지 않는다더니, 이전과는 달리 그 모습을 자주 보였다.

“이번에는 얼마나 자리를 지키세요? 보통은 한 번 와도 다시금 떠난다고 보좌관 사이에서도 이야기가 나온 듯싶은데…….”

“지금 네 모습을 보고도 전장에 올라라? 너는 나를 어디 보내지 못해서 안달이라도 난 사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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