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제임스는 흙바닥에 주저앉아서 엉덩이를 살살 문질렀다. 바닥에 패대기쳐지며 나뒹굴었더니 꼴이 엉망이었다.
꼬질꼬질한 꼴이 썩 믿음직스러운 인상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제자 놈입니다.”
데니스는 그런 제자를 짠하게 내려다봤다.
“저 모자란 놈을 믿어도 될지 걱정이로군요.”
“제자라더니 평가가 박하네요? 믿어 보세요. 데니스의 제자잖아요?”
캐서린은 픽 웃으며 데니스를 다독였다. 데니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실력은 좋지만, 성품이 좋지 않습니다. 학계에서도 성격이 나쁘기로 유명했거든요. 지금도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앞서는데……. 이 아이가 실수나 안 하길 바랄 뿐입니다.”
“제임스는 훌륭한 의사였어요. 진단해 준 약도 효험이 좋았거든요.”
“바깥에서 약을 처방받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는데, 그게 제 제자인 줄은 몰랐습니다.”
데니스는 못난 제자를 주인 내외에게 보여 죄송하면서도, 기이한 인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로렌디스는 이미 짐작했는지 무던한 어조로 되물었다.
“밖에서 약을 처방받았다더니 이 의사인가?”
“제임스에게 우연히 진료를 받을 기회가 있었거든요. 거기서 시한부 선고를 받고 약을 처방받았어요. 그런데 데니스의 제자라니 운이 좋았네요.”
제임스 박사는 기가 차다며 눈을 부릅떴다. 한라원의 문을 직접 두들겨 금화 주머니부터 내민 게 누구인데! 세상에 이만큼 억울할 수가 있나! 제임스 박사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목덜미를 짚었다.
“헬렌에 직접 이야기하지 못한 건 죄송해요.”
“그야 너는 조용히 떠나려고 했으니까. 응접실에 가서 기다려. 제임스 박사도 거기에 데려다 놓고.”
로렌디스가 자리를 떠났다. 브레디도 급하게 로렌디스의 뒤를 따라 떠났고, 데니스가 제 제자의 목덜미를 잡았다. 헬렌의 기사들과 같이 오는 모습을 봤지만, 두 사람도 지친 기색이 다분했다.
“나 때문에 두 사람이 고생이 많아요.”
제임스 박사는 제 스승을 발로 꾸역꾸역 밀어내며 투덜거렸다. 저 꼰대 놈과 얽히면 되는 일이 없다며 주절거리는 게, 사제지간이 맞는 모양이다. 의사 가운을 털어 내는 손짓은 털털하면서도 시큰둥했다.
“마님 송구합니다. 이놈이 빈민가에서 지내며 예절교육 받은 걸 다 잊었습니다. 보통 학계에 처음 발을 디디면, 기본적인 교양수업도 같이 받는데…….”
“의사는 진료만 잘 보면 될 일이에요. 그런 거로 데니스의 제자를 책잡을 마음은 없어요.”
염병들 한다. 제임스가 투덜대며 머리를 긁적였다.
“고객님께 할 이야기 있는데.”
“…….”
“스승님은 자리 좀 비켜 주십시오.”
제임스가 캐서린의 눈치를 살금살금 봤다.
“내가 제임스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자리 좀 비켜 줄래요?”
“일단은 알겠습니다. 제임스, 너는 마님께 말조심하거라. 혓바닥을 잘못 놀리다간 잘리는 수가 있다.”
데니스는 제자를 날카롭게 노려보다가, 캐서린과 눈이 마주치자 상냥히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럼 마님께서는 대화가 끝나시면, 응접실로 아이를 데리고 와 주십시오.”
데니스까지 자리를 떠나자, 제임스가 캐서린을 붙잡고 하소연했다. 그건 하소연을 넘어선 한탄이었다.
“의료원 문짝이 뜯겨 나갔어. 의료원은 임시 폐업이며 거기서 납치되듯 끌려오는데, 그 와중에 그쪽 남편이 나를 찢어 죽이려고 들더라?”
제임스는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여러 일이 있었구나. 어쩐지 사람이 넋이 나갔더라. 그는 아직도 등골이 서늘하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라원 문짝이 뜯겨 나갈 때 이미 느꼈지만.”
“응.”
“걸렸나?”
“된통 걸렸지.”
로렌디스와의 이혼을 실패하면서, 시한부 사실을 숨기기 어려워졌다. 이건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다.
“어쩌다?”
“내가 죽을상을 짓는 게 진짜 죽을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야. 나는 그냥 여기를 떠나기만 하면 될 일이라고 여겼는데 말이지.”
제임스는 잠깐이나마 본 헬렌 공작의 낯을 떠올렸다. 그 사내는 얼핏 보면 악귀 같고, 자세히 보면 더더욱 악귀 같았다.
제임스는 눈을 왈칵 찌푸렸다. 그런 사내놈 피해서 어디 요양지 찾아서 떠난다는 거였어?
헬렌이 그 사내의 것이라면, 헬렌을 떠나는 건 포기해야 한다. 그 사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헬렌을 통제하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 사내는 지배자였다. 사람을 통제하고 지배하며 소유하는 통치자 자체였다.
“고객님 때문에 내 미래 계획이 모두 틀어졌어.”
“미안하게 됐어.”
“수익 높은 일에는 고위험이 따르니까. 됐어. 환자 붙잡고 하소연할 만큼 못난 성격은 아니니까.”
이만 가자며 제임스가 앞쪽을 턱짓했다. 캐서린이 앞장서서 걷자 제임스가 뒤따랐다.
“어디로 가는 거야?”
“다들 응접실에서 기다릴 거라서. 응접실로 갈 거야.”
응접실로 가는 길목은 화려했다. 제임스도 그 웅장한 규모에 넋을 놓았다. 순금으로 천장에 고대 신화를 조각해 둔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이 여인이 저택의 주인이었다. 그 거대한 규모를 고려하면, 그 주인도 저택만큼이나 위엄을 갖추는 게 맞다. 그렇지만…….
‘참 이질적이야.’
이 여인은 저택의 주인이라기엔 너무 약하고 가냘팠다. 희고 질린 창백한 낯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마님, 오셨습니까?”
데니스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캐서린이 싱긋 웃자, 데니스는 제 제자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제인! 여기서 말실수라도 했다간 주인님께 치도곤을 당할 줄 알거라.”
“애칭 쓰지 마십시오. 소름 돋습니다.”
제임스가 소름 돋는다며 몸을 파르르 떨며 헛구역질을 해 댔다. 데니스가 뒤를 흘끔 돌아보더니 경악하며 제임스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네놈은 조용히 따라오너라! 마님께서도 응접실로 드시지요. 혹시, 하녀에게 차나 다른 다과는 부탁하지 않아도 됩니까?”
캐서린은 괜찮다는 의미에서 고개만 몇 번 흔들었다.
“그 전에 사람을 한 명 더 데려오고 싶어요. 손님방에 중요한 손님이 머물고 있거든요.”
손님방으로 사람을 보내 두었다. 이번 일로 로렌디스가 크게 화를 내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 * *
“살사초라는 독초입니다. 서남부 산에서 자라는 독초인데 보통은 빈민가에서 먹을 게 없는 아이들이 뜯어먹다가 쉽게 중독됩니다. 이 살사초라는 독초는…….”
제임스는 예전에 보여 줬던 살사초 독초를 보여 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데니스에게 몇 번 잔소리를 듣고는 말투도 정중하게 고쳤다. 그래도, 불만스러운 건 여전한지 ‘내가 이 짓을 왜 하는가.’라는 표정으로 캐서린을 흘끔거렸다.
“살사초라는 게 많이 알려진 꽃인가?”
“아닙니다. 일단은 그게 빈민가, 먹을 게 없어서 풀을 뜯어 먹고 사는 산촌 아이들에게서 처음 발병한 중독 반응이었습니다. 그게 좀 됐는데…… 헬렌은 추운 지역이라서 그런 독초가 자생하는 게 불가능하지만, 따뜻한 지역에서는 독버섯이나 독초들이 의외로 흔합니다.”
제임스는 쭈뼛대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보통은 로렌디스가 묻고 제임스가 답하는 식이었다. 캐서린은 맞은편 소파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럼 그 독이 저절로 회복될 수 있나?”
“살사초가 오래 누적되면 웬만한 독보다도 더 독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이야기고, 예외도 있습니다.”
제임스는 투덜대면서 성심성의껏 답했다. 로렌디스는 충분한 답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데니스도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은 알겠다.”
캐서린은 맞은편에서 이들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넨시가 따뜻한 꽃차를 마시라며 챙겼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입안이 썼다. 캐서린이 찻잔을 밀어내자 로렌디스의 시선이 와 닿았다.
“왜 더 마시지 않고?”
“대화하는 중이니까요.”
찻잔이 미지근해졌다. 넨시가 찻물을 다시 데워 온다며 가지고 나갔다. 제임스는 응접실을 채운 은은한 꽃내음을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아가씨는 꽃차 때문에 독에 중독되고도 여전히 꽃차를 잘 마시네.”
그건 속삭임이었다. 제임스도 큰 의미로 꺼낸 게 아니라, 지나가듯 꺼낸 혼잣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앞으로 캐서린이 꺼낼 이야기의 화두가 됐다.
“꽃차라. 제임스 박사? 내 아내가 꽃차를 즐겨 마신 건 어떻게 아나?”
“괘, 괜한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임스는 혹여나 다른 오해라도 살까 싶어서 서둘러 둘러댔다.
“밀던이었나? 거기 친정집에서 꽃차를 자주 먹었다고, 저기 본인께서 직접 이야기했습니다. 살사초는 강한 독을 품었지만, 향이 아주 좋습니다. 꽃잎을 말려 꽃차로 먹는다면 달콤 쌉싸름한 향이 먹음직스럽거든요.”
마른 꽃잎은 독을 품고 사람을 병들게 하지만, 그 속에 깃든 향만큼은 보드랍고 풍요로웠다.
“그러니까…….”
“그 가족들과 지내면서 노출된 겁니다.”
캐서린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희고 뽀얀 낯빛은 옅은 드레스를 입을 때 유난히 창백해 보이곤 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택하고, 보석과 머리 장식을 덧댔다. 그 모습도 나름 잘 어울렸다.
“손님이 와 계시니까 그분께 들어 주세요. 제 입으로 꺼내기엔 비극적인 이야기라서요.”
“손님이라면?”
캐서린은 천천히 숨을 고르고 답했다.
“에밀리 밀던, 제 언니예요. 이 이름까지 나왔으니까 저는 진짜 이야기할 것 다 이야기한 거예요.”
캐서린은 소파에 기대서 손가락을 곱게 무릎 위에 포개 올렸다.
“이 이후에 어떤 이야기를 듣든, 로렌디스, 크게 화내시면 안 돼요. 다그쳐서도 안 되며, 벌을 준다며 겁을 주어서도 안 돼요.”
그 유리공예 같은 아가씨께서는 마음이 여리시거든요.
“에밀리 언니, 이리 오세요.”
제임스가 질색하며 되물었다.
“에밀리 밀던……? 고객님 잠시만, 지금 그 머릿속에서 어떤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야?”
“그건 심증이잖아요. 결국에는 에밀리가 직접 이야기해야죠. 그래야 확실해지니까요.”
하인이 문을 열자 에밀리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에밀리는 울먹거리며 소파 앞까지 걸어왔다. 그러고는 캐서린의 앞에 무릎부터 꿇고 울기 시작했다.
“캐서린,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잘못했어요?”
“나는 용서해 주는 거지? 용서해 준댔잖아.”
에밀리는 캐서린에게 매달려서 울먹이기 바빴다. 캐서린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우리 나약한 언니.
언니는 너무 약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