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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33)화 (33/129)

33.

로렌디스가 제복을 정돈해서 일어나는데, 테슬러는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을 떠올렸다.

“네놈은 선대 공작을 빼닮았어.”

“그분이 폐하의 아우이십니다.”

“내 그놈 고집 머리는 아직까지도 기억해.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전장만 떠돌다가 실종되어 버린 그런 못난 놈 같으니라고.”

테슬러는 삐딱하게 기대앉아서 축객령을 내렸다. 뻣뻣하고 꼿꼿해서 끝내 머리를 숙일지 모르고, 제 사지로 뛰어드는 무식한 핏줄. 그게 헬렌이었다.

“네 아버지 시신은 아직 못 찾았느냐?”

“네. 아직입니다.”

“공교롭구나, 너희 모두. 그 일에 더 이상 목매지 말아라. 전사자의 유해 수습도 중요하지만 살아 있는 네가 더 중요해.”

그러니 너도 전장 좀 그만 떠돌거라.

테슬러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너는 어디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 같구나. 내가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만, 너는 조금 더 내려놓고 지내도 돼.”

헬렌 공작이 실종되고, 로렌디스는 열아홉이란 나이에 공작위를 승계했다.

한겨울의 헬렌은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눈사태나 폭설에 사람이 파묻혀 실종되는 일도 많고, 이미 험난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었다.

그래도, 헬렌 공작이 실종되는 건 그 무게가 다르다. 헬렌 공작은 그렇게 유명을 달리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젊어서부터 전쟁터를 떠돌고, 가정에 정착할 나이에 실종되어서 제 아들에게 작위를 승계한 못난 놈. 그게 전대 헬렌 공작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데도…….”

“아버지께서 지금 계시면 황권에 위협만 더 됐을 겁니다. 그 이름은 혹독한 헬렌에서 희생되었으며, 그렇기에 지금 제 아버지께서도 영웅으로 칭송받는 것이고요.”

황실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서로에게 위협이 될 사이였고, 스스로 북부를 택한 게 헬렌 공작이었다.

제 아우는 외척 가문이 제 형을 위협하며 황위 계승권을 요구하자, 스스로 그 계승권을 포기했다.

젊은 나이에는 그 아이가 거슬려서 직접 북부에 보내서 못 오게끔 했고, 늙어서는 그쯤 해도 된다고 타일렀고, 이제는 때를 놓쳤다.

“내 죄가 깊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똑같은 놈들이 눈앞에서 똑같은 삶을 이어 나가니, 그 속이 말이 아니었다.

“내 아우도, 내 조카도 어쩜 하나같이 내 속을 썩이는지.”

“제가 제도에 남아 봤자 폐하께 위협밖에 더 됩니까? 황후 폐하께서도 노골적으로 헬렌을 경계하지 않습니까.”

테슬러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로렌디스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헬렌 공작이 실종되고 몇 년 뒤 밀던 자작이 실종되기까지.

“그래도 보통은 헬렌의 사냥개들이 수습한다던데……. 저들은 왜 찾지를 못하는지.”

“폐하.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로렌디스는 이 이상 제도에 머물 마음이 없다는 듯 그 자리를 피했다.

“헬렌은 가혹한 곳이구나.”

그 험난한 전장을 오래 떠돌며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제 아버지와 아끼는 가신을 찾기 위해서라는 건 안다. 그런데도 테슬러는 그게 못내 못마땅했다.

헬렌의 기사들은 이미 떠날 채비를 끝냈다. 제도에 오래 머무른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고려조차 않았다는 듯, 신속한 태도였다.

로렌디스는 로브를 두르고 말 위에 올랐다. 회색빛 로브가 펄럭이며, 월계수 문양이 넓게 벌어졌다. 기사들은 휴가가 끝났다는 걸 체감이라도 한 듯했다. 저마다 거친 기운을 뽐내며 말 위에 올랐다.

* * *

“각하께서 외성에 도착하셨답니다. 그럼 내성까지는 금방 도달하실 겁니다.”

내성이 분주해졌다. 로렌디스가 외성에 도착했다는 기별이 들려오고, 내성도 그를 맞이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분은 이번에도 예상보다 더 일찍 귀환하셨구나.”

캐서린이 화장대에 앉아서 긴 머리를 주섬주섬 만지자, 넨시가 다가와서 어깨를 다독였다.

“긴장하셨습니까?”

“나, 조금 창백해 보이지 않니? 평소와 똑같긴 한데…….”

“아름다우십니다. 아니면, 치장을 도와 드릴까요? 화장품도 가져다 놨으니, 기분 전환으로 칠해도 좋겠습니다.”

캐서린은 리본으로 땋아 묶은 머리를 단정하게 고정했다. 그래서 얇은 목덜미가 유난히 도드라지는 것 같았다.

캐서린이 애먼 목덜미를 더듬거리며 미소 짓자, 넨시도 서둘러 치장을 도왔다.

“피부를 조금 더 짙게 칠해 줄래?”

“마님.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화사합니다. 지금도 아주 곱습니다.”

“그럼 입술 화장을 부탁해. 뺨도 조금 더 수줍음을 타는 소녀처럼.”

캐서린의 의미심장한 부탁에도, 넨시는 능숙하게 그 의미를 끄집어냈다.

‘각하를 전장에 한 번 보내시더니, 며칠 못 봤다고 그리움이 커지셨구나.’

넨시는 붓을 꺼내서 섬세하게 화장을 고쳤다. 불그스름한 뺨은 소녀처럼 앳됐다.

여린 체구 때문인지, 북부의 주인이라고 부르기 송구할 정도로 가녀린 모습이었다. 그 속에서도 고고한 기품이 느껴지는 건, 역시나 북부의 주인이기에 가능한 일 같고.

넨시가 다 됐다며 화장 도구를 놓았다. 캐서린은 드레스를 주섬주섬 추슬렀다. 내성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는데, 멀리서 뿌연 먼지가 일었다. 말 몇 구가 내성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제도에 갔던 일행이었다.

“오늘은 로렌디스가 화를 좀 덜 냈으면 좋겠어.”

“오랜만에 재회하는 건데 주인님께서 화를 왜 내겠습니까? 주인님께서도 기쁘게 맞아 줄 겁니다.”

지은 죄는 없지만 뜨끔한 이 속마음.

앞으로 후폭풍처럼 모든 일이 몰아닥칠 것이다. 제임스 박사와 가족들 일까지. 로렌디스가 듣는다면 또 화내려나.

로렌디스는 이미 도착했는데, 그의 보좌관은 아직이었다. 보통 때라면 가장 먼저 로렌디스를 마중 나왔을 브레디였다.

“브레디 보좌관은 어디 있어?”

“지금 저기 오시는군요.”

브레디는 막 옷차림을 추스르며 나오던 참이었다. 그는 먼저 나와 있는 캐서린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조금 늦었네요?”

“집무실에서 일 몇 가지가 꼬여서 말입니다. 아참, 각하께서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보냈습니다. 데니스 교수도 지금 막 제자를 찾아서, 각하와 합류했다더군요.”

이제 다들 돌아온다. 손아귀에 땀이 고였다. 약간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캐서린은 긴장한 기색을 애써 지워 냈다.

“그럼 셋이서 오는 길이려나요?”

“네. 방금 소식이 도착했으니까 곧 도착할 겁니다.”

캐서린의 예상이 맞았다. 조금 더 기다리자, 저 멀리서 로렌디스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로브를 쓴 다른 일행들도 보였다.

로렌디스는 여전히 무뚝뚝한 낯이었다. 그 뒤로 로브를 쓴 왜소한 체구 두 명을 보니까, 데니스 교수와 그 제자인 모양이다. 그들도 흑마 위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서 달려오고 있었다.

캐서린은 로렌디스의 표정부터 살폈다. 그는 오늘도 심기가 어지러운가 보다.

“로렌디스는 오늘도 표정이 어둡네요.”

“각하께서는 타고나시길 표정이 사납습니다. 저건 화가 난 게 아니라, 각하께서 생겨 먹은 게 그런 겁니다.”

브레디는 ‘뻣뻣하고 고지식한 분께서 생겨먹은 것도 못돼먹게 생겼습니다.’라고 몇 마디 덧붙였다.

“그럼 마님께서는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먼지가 일어서 곱게 치장한 드레스가 더러워질 것입니다.”

희뿌연 먼지가 가라앉고 일행이 속속히 도착했다. 군마가 뿌연 김을 뿜어내며 투레질했다. 로렌디스가 말에서 내렸다.

내성의 정원은 장활했고, 물과 나무를 조각처럼 짜 맞춰 조성해 뒀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로렌디스는 한 폭의 작품 같았다.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길목에 대리석 조각상을 세워 두고, 그 중앙에는 거대한 광장을 조성해 놨다. 헬렌의 기사단이 그 광장을 가득하게 채웠다.

“각하, 오셨습니까. 일찍 오신다 했지만, 이 정도로 귀환이 빨라질 줄은 몰랐습니다.”

로렌디스가 말에서 내리자 브레디가 고삐를 넘겨받았다.

“별다른 일은 없고?”

“헬렌은 늘 고요했습니다. 데니스도 고생이 많았습니다. 뒤에 계시는 분이 교수께서 말씀하신 제자입니까?”

데니스 교수는 넋을 놓고 말에서 미끄러지듯 내렸다. 꼬질꼬질해 보이는 사내가 덩달아 말 위에서 미끄러졌다.

“부끄럽지만 제자입니다.”

데니스 교수는 ‘꼬질꼬질해 보여도 의사입니다.’라고 어설프게 답을 회피했다. 그 제자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 무식한 헬렌 놈들!’이라며 주절거리더니, 굽은 등을 주물렀다.

꼬질꼬질해 보이지만, 그 품에서는 옅은 약초 향이 풍겼다. 한라원에서 억지로 잡혀 온 길인지 얼굴에는 불만감이 가득했다.

“외성에 머무르던 제자인데, 어렵게 찾아서 데려왔습니다. 그 출신지는 불분명하지만, 실력만큼은 알아줍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브레디는 마부에게 말을 맡기고 로렌디스의 뒤를 따랐다.

“각하 어디로 드십니까?”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오지. 그 제자는 응접실에 데려다 놔.”

“아직 예절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마님께 바로 보이기엔, 성질이 조금 괴팍하기도 하고…….”

그때 캐서린이 제임스 박사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안부 인사를 물었다.

“제임스 오랜만이네.”

제임스 박사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중얼거렸다. 헬렌의 기사들은 다 무식해서 힘밖에 모른다며, 삭신이 쑤신다는 듯 무릎과 다리를 쿵쿵 두들겼다.

“니콜은 어쩌고 혼자 왔어?”

“이놈들이 들이닥쳐서 납치하다시피 끌고 오는 바람에……. 그런데, 고객님은 지금 내가 땅바닥에 얼굴 박고 있는데, 거기서 계속 보기만 해? 내가 지금 고객님 생명줄 붙잡는다고 한라원에서 뽑아다 준 약값만 하더라도……!”

로렌디스는 발걸음을 멈췄고, 데니스 교수도 의아하다는 듯 캐서린을 바라봤다. 그 둘은 서로를 익숙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알던 사인가?”

브레디도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두 분이 아는 사이라고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