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그게, 무슨 뜻이니?”
“나는 왜 죽이려고 그랬어요? 나, 나름 조용히 숨죽여 지냈잖아요. 이런 미래를 조금 눈치채긴 했지만……. 가족들이 그런 짓까지 하며 나를 죽이려고 한 건, 솔직히 너무 했어요.”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지만 이건 너무 마음 아픈 일이니까요. 내 가족이 내 죽음을 바란다는 건 너무 가혹하잖아요.
캐서린은 울지 못해서 웃었다. 독을 품은 미소는 화사하지만, 그만큼 탁했다. 미안하지만요. 언니는 빠져나가지 못해요.
“내가 모르리라 여겼다면 애석하네요.”
나는 다 알았어요.
슬프게도 다 말이에요.
“나는 언니가 직접 이야기해 주길 기다렸어요. 그 입으로 잘못했다고 사과한다면, 언니만큼은 그래도 마음으로 용서해 보려고 그랬는데……. 어째서…… 내게 그런 시련을 안겨 주셨나요.”
큰 상처를 받은 아이처럼 눈시울을 붉히며 에밀리의 어깨를 손으로 밀쳤다. 세상은 내게 가혹하기만 합니다. 입술을 막고 원통스럽게 에밀리를 내려다보자, 에밀리가 손을 벌벌 떨며 입가를 가렸다.
에밀리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흐느꼈다. 캐서린은 그런 에밀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거기에 턱을 괴고 느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랬어요. 왜, 왜? 언니, 언니처럼 심약한 분이 왜 그런 죄를 저질렀어요?”
“나는, 나는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캐서린! 지금 이 언니를 모함하다니…… 우리가 서먹했다지만, 나를 모함하지는 마!”
에밀리는 캐서린의 말을 다 막아 버리고 혼자 울어 버렸다. 아아. 우리 언니 또 눈물보가 터져 버렸네. 꼭 이럴 때 울어 버리면서 사람의 말문을 막아 버리더라. 이건 에밀리의 몹쓸 버릇이었다.
캐서린도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울든 말든 그건 캐서린이 상관할 바 아니었다.
‘사과나 받자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고.’
긴 금발이 찰랑대며 흩어졌다. 눈가에 바른 반짝이 펄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은은히 날렸다.
나, 이런 촌극에는 면역력이 없어요. 그래서 언니가 우는 척해도 언제까지고 다 받아 주지는 못해요. 캐서린은 에밀리의 적발을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내가 언니에게 먼저 다가가면 언니가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이야기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편지까지 쓰며 기다린 건데…….”
“잠시만이라도 좋으니까 내 이야기를 들어 줘. 네가 나를 내쫓아도 좋고 거부해도 좋으니까. 네 오해만 바로잡자. 우리는 가족이잖니? 가족끼리는 대화로 해결해 보며 차근차근 풀어 나가야지. 어머니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
“지금은 손님들이 있으니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그리고 손님들이 떠나며 이 어설픈 촌극도 끝났다. 저녁 무렵 저택을 찾은 손님들이 하나둘 떠날 채비를 했다.
“헬렌 부인,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다음에도 또 초대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모두 선물을 준비했으니 가지고들 가세요. 넨시, 손님들에게 선물을 내어 줘요.”
선물로는 세공이 정교한 펜던트를 준비했다. 귀족들의 눈을 만족하려면 그만큼 정교한 선물이어야 한다며 넨시가 준비한 선물이었다.
손님들이 다녀가고 헬렌 성도 고요한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이 침묵의 한가운데에 밀던 자매가 있었다. 캐서린이 에밀리를 손님방에 데려다 두고 나오는데, 하녀들의 어수선해졌다.
“무슨 일이랍니까? 마님의 가족분께서 헬렌에 머무르신다고요?”
“마님께서 가족들과 사이가 좋았던가요? 다들 함구하고는 있지만, 사이가 나쁠 텐데요?”
하인들은 ‘몸이 요즘 약해지시더니 마음 또한 약해지셨나?’라고 의구심을 표했지만, 조용히 넘어갔다.
노련한 집사가 제 주인에게 의구심을 품는 것 자체가 불충이라며 따끔하게 혼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집사마저도 우려를 표했으니, 그만큼 모두들 걱정이 컸던 모양이다.
“마님, 괜찮은 겁니까?”
“무엇이?”
“마님과 가족들 사이가 나쁜 건 이미 압니다.”
저택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할 만큼, 사이가 나빴구나. 캐서린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렇게 집사만 해결하면 될 거라 여겼는데, 브레디 보좌관이 늦은 저녁 캐서린을 따로 찾아왔다.
“브레디도 뭔가 궁금해서 온 건가요?”
“이건 각하께도 보고가 들어갈 겁니다. 나중에 각하께서 아시면 저희가 혼날지도 모르는 사안이라서.”
브레디는 로렌디스의 보좌관이다. 또한, 헬렌을 따르는 이들이 로렌디스를 섬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캐서린이 웃으며 부탁드린다며 어깨를 다독여 주자, 브레디가 흠칫했다.
“왜 자매분을 붙잡아 두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지난 반년은 서로 잊고 지낸 듯싶었는데……. 마님께서 몸이 아픈 건 압니다. 최근에 진료동이 분주해진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마님께서 마음이 약해지는 것 또한 이해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가까이 두는 거라면…….”
“인근 수도원에 자리가 남나요?”
브레디는 뜬금없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도원이라면 보통 귀족들에게는 유배지로 불리는 곳이다. 수도원은 제도에서 거리가 떨어져 있고, 일단 명단에 오르면 그때부터는 바깥출입도 제한적이었다.
“수도원의 자리야 늘 부족하지요. 그래도 자리를 만든다면야 만들 수 있습니다. 보통은 죄를 지은 귀족들에게 그간의 죄를 되짚어 보라는 취지에서, 수행하러 가는 곳이잖습니까?”
“두 자리만 만들어 주세요.”
이제는 내 것을 다시 돌려받을 시간이었다.
붉은 드레스 자락이 너풀거렸다. 레이스가 하늘하늘하게 날리는 모습은 화려했지만, 뒷모습은 지독하리만큼 고독했다.
* * *
하녀들의 분주함에 역시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에밀리가 캐서린을 손님방으로 불렀다.
“캐서린 내, 내 이야기를 들어 주렴. 우리는 가족이잖아. 내, 내 어머니가 네게 실수라도 저질렀니? 혹여, 오해라도 있던 건 아닐까?”
“나도 서운한 마음이 커요. 나는 오래 살지 못하고, 이 여린 몸은 곧 한계를 맞이할 거거든요.”
아직은 따뜻했다. 그런데 이 숨이 멎는다면 이 몸도 곧 차갑게 식어 버릴 텐데…… 그럼 자작저는 계모와 의붓언니가 꿀꺽 집어삼키려나.
아니, 꿀꺽 삼키기 전에 그 입들부터 치워 버리면 될 일이었다.
“일, 일단은 나를 집에 보내 주렴.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한 번 묻고, 어머니께 내가 사죄하라 이야기할게. 어머니께서도 지금 나를 걱정하실 건데……!”
“언니 필체로 편지를 보냈으니 조용할 듯싶은데요.”
티 파티에 초대하고, 에밀리가 여기서 하룻밤 묵는다고 손님들께 이야기하고, 편지를 보내 소식을 전한 것까지. 모두 에밀리를 홀로 떼어 두기 위해서였다.
긴 다리를 꼬고 앉아서 탁자에 기대자, 에밀리의 시선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나름 고민을 해 봤거든요? 아주 우연히 알게 됐어요. 자작저에서 있었으면, 나는 내가 죽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갇혀 지냈을까 싶고. 사람 삶이라는 게 그렇더라고요. 언니는 다 알잖아요. 그 예쁜 독초 말이에요.”
이곳에서 혼자 고민하면, 어리석은 언니라도 반성은 하겠죠. 그 집에서 캐서린이 홀로 고립됐듯, 에밀리도 홀로 고립돼서 우두커니 남아 버리면, 그때 그 시절 캐서린의 마음도 알아주려나?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작은 아이, 캐서린 밀던의 마음을 말이다.
“죽음을 앞두니까 다 덧없더라고요. 크게 화는 안 나요. 그런데, 헬렌 부인이 독으로 죽는 건 그 의미가 달라요.”
헬렌 부인이 독으로 비명횡사하는 것과, 시골 가문의 딸이 비명횡사하는 건 다르다.
헬렌에서 헬렌 부인이 독으로 비명횡사했다는 게 알려진다면 그 시작이 어디인지 사람들은 파고들 것이다.
“나, 나는…… 네가 진짜 죽게 될 줄 몰랐어! 그저, 조금 아프기만 하는 줄 알았다고. 이건 모두 어머니가 한 일이었어! 어머니께서 저지른 죄야! 어머니가 저지른 일로 나까지 벌한다거나…….”
나를 죽음으로 내몬 이들이 본인의 삶을 구걸한다. 내 삶을 진창으로 처박고 앗아 갔으면서, 본인들에게는 자유와 용서를 바란다.
“나약한 우리 언니. 어머니는 이만 놓으세요.”
“엄, 엄마를 놓으라고?”
“언니 살 길이라도 찾아서 도모해야죠. 어머니를 놓고 언니라도 살아남으세요.”
어머니를 놓아라. 언니는 젊고 산 사람이니까 살아야죠. 그 죄를 직접 고해서, 언니라도 살 길을 찾으세요. 캐서린은 그렇게 속삭였다.
“언니, 산 사람은 살아야죠?”
“알았어. 내가 놓을게, 어머니를 놓을게! 다 어머니 짓이야. 어머니 혼자 한 짓이라고!”
어머니. 모녀간의 정이 참 쉽게 끊겨요.
나의 나약한 언니.
하지만 그 용서가 마냥 편안한 길이라는 기대는 마세요.
* * *
“각하. 헬렌에서 전서구를 보내왔습니다.”
제도에서 지낸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헬렌에서 보내온 전서구가 타운하우스에 도착했다. 전서구에는 붉은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월계수 문양에 붉은색까지 칠해진 경우면 급보로 보낸 전서구를 뜻했다.
[데니스 교수입니다. 제자를 찾았습니다. 그 성격이 고약해서 저 혼자서 데려가기가 힘듭니다. 각하께서 사람을 보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로렌디스는 전서구를 접어서 재킷에 넣고 하인을 불렀다.
“입궁 준비를 하거라.”
테슬러는 일주일간 머무르며 제도에서 자리를 지키라 했지만, 그 시일은 적당히 지켰다. 이만 제도 일정을 마무리 지어야지 싶다.
테슬러도 접견 요청에 반쯤 기대를 내려 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좀 오래 지낸다고 했더니.”
“헬렌으로 가 봐야 합니다.”
헬렌은 네놈 하나 없으면 돌아가지도 않느냐. 며칠이나 그 얼굴을 비췄다고, 매정하게도 또 그 길을 떠난다.
“결혼이라도 하니까 헬렌에 오래 붙어 지내긴 하는구나.”
“얼굴 뵀으니 이만 가겠습니다.”
테슬러는 떠나는 로렌디스를 배웅하며 되물었다.
“언제 또 올 것이냐?”
“기다리지 마십시오.”
“표정이 안 좋구나. 급하게 돌아가는 것 같긴 한데 헬렌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네가 며칠 자리를 비운들 무슨 일이 있기야 하겠느냐. 애초에 헬렌을 시시때때로 비운 것 또한 너잖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