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혼담을 파기한다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놈이 내 눈에서 벗어나려고 어울리지도 않는 혼인 장사를 한 건 나도 안다. 뻣뻣한 네놈 속이야 뻔하지.”
테슬러는 이 혼담이 제 조카가 결혼 압박을 피하려 멋대로 저지른 짓인 줄 안다. 로렌디스는 어디 얽히거나 매이는 걸 극도로 꺼리는 놈이었다. 그런 놈이 권세가의 자제와 혼인해서 귀족사회에 묶일 리 없다. 그러니 로렌디스도 저를 구속하지 못할 부족한 집안을 골라 곁에 앉혔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상한 걸 아셨습니까?”
“무엇을? 그 혼담? 네놈이 어디 내 말을 순순히 들어 먹었더냐? 시골 가문 여인 데려다가 앉힐 때 대충 짐작했지.”
로렌디스가 접견실에서 다리를 꼬고 앉았다. 테슬러는 그런 조카를 보며 한결같이 삐딱하다고 감상을 내놓았다.
“네가 또 내 속을 뒤집을 줄 알았으면 그런 이야기도 안 꺼냈다. 혼담이 오고 갈 나이에 전장만 떠도는데, 누구라도 속이 뒤집히지.”
“또, 그 잔소리십니까?”
로렌디스는 굵직하고 곧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벌써부터 이 대화가 피곤해졌다.
황실에 자주 오는 건 아니지만, 한 번 올 때마다 발길을 붙잡혀 이렇게 하루를 꼬박 보내 버리니…….
“나도 결혼으로 네놈 인생에 관여하지 않을 테니, 너도 어울리지도 않은 혼인 장사는 그만두거라.”
“이대로 지내도 됩니다.”
저저! 뻣뻣한 놈! 테슬러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너는 그 뻣뻣한 태도 탓에 피를 볼 날이 올 것이다.”
로렌디스는 서늘한 눈길로 테슬러를 바라봤다. 아무리 테슬러라도 그 눈짓에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뭐냐.”
“무엇이요.”
“무슨 일 있느냐?”
로렌디스는 테슬러를 가만히 바라보며 침묵했다. 테슬러도 더 이상 캐묻지 못했다. 그저, 처음부터 흠집이 가득한 그 결혼에 또 다른 흠집이 생겼거니, 할 뿐이었다. 로렌디스는 긴 침묵 끝에 이야기했다. 덤덤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로.
“혼사는 그저 수단입니다. 제게 가장 이득이 되는 쪽으로 결정 내렸고, 아내도 해 줄 일이 남아 있으니 그 이야기는 그만두십시오.”
테슬러는 눈을 감고 제 아우를 떠올렸다. 뻣뻣한 모습이나 제 고집 안 꺾는 모습이나 부자지간이 많이도 닮았다. 어디 한곳에 정착하라고 그리 일러두었는데, 귓등으로 듣고 밖으로 나서는 모습은 매정하기까지 했다.
제 아우 놈도 똑같았고.
저것 보아라. 저 불쾌한 눈동자 하며…….
내가 뭘 잘못 봤나? 테슬러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설마……. 진심이냐?”
“무엇이요?”
“되었다. 차라리 황후가 이어 준 혼담이 싫어서 피했다는 게 더 들어맞지. 네놈이 어디 진심으로 혼인을 논할 놈이냐.”
이미 황후가 제 외척 가문과 헬렌을 이으려고 한 번 시도했다. 황실을 위협하는 기세라며, 외척과 이어서 그 가문의 위세를 황실로 끌어 올 작정이었다.
로렌디스도 이번 혼담에 진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여인이 내성 성문을 닫고 칩거할 때부터 확신했다. 테슬러가 그런 여인을 내버려 둔 이유도 처음부터 그녀를 인정하지 않은 까닭이었고.
그래서 테슬러도 적당히 타이르는 쪽을 택했다.
“조카 놈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군. 앞으로 일주일간은 더 제도에 머물러라. 또 훈장만 받고 헬렌으로 가 버리면, 줬던 것도 모두 빼앗아 버릴 줄 알아라.”
테슬러는 속 썩이는 제 조카를 빤히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제 아버지만 살아 있었어도, 이놈이 지금처럼 뻣뻣하게 자라진 않았을 것을…….
“곧 네 아버지 기일이구나.”
“실종날입니다.”
“10년도 더 됐으니, 기일이라고 보는 게 맞지. 실종된 아버지는 그만 놓아 드리거라. 내 아우도 네가 과거에 머무르는 걸 바라지 않을 거다.”
테슬러는 엄중히 이야기했다.
“일주일간은 제도에서 지내면서 사람들에게 얼굴도 비추고. 제도에서까지 뻣뻣한 자세를 유지하면, 아무리 너라도 경계를 사게 될 거야.”
“그 제도의 주인이 폐하잖습니까.”
시종장이 다과를 챙겨와 꺼내 두었다. 로렌디스의 신경은 또다시 헬렌에 남은 아내에게 향했다. 손님을 초대한댔으니 초대했으려나.
시종장이 조용히 나가자, 테슬러는 주름진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입술을 닫고 침묵하는 자세가 고압적이었다. 제 머리 위에 사람을 두지 않는 로렌디스라지만, 그 자세가 너무 뻣뻣하기만 해서는 꺾이기도 쉽다.
그 사실을 몇 번이고 알려 주어도, 저놈은 듣는 척도 안 하니. 네놈 꼿꼿한 건 그러려니 해도, 여기서까지 그랬다간 적대 받기 십상이니까.
“너, 짐의 말을 듣고는 있느냐?”
“듣고 있습니다.”
듣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시선은 여전히 다른 곳을 향해 있었으니까.
* * *
“언니에게 너무 잘 어울려요. 저처럼 보잘것없는 아이보다는 에밀리 언니에게 훨씬 잘 어울려요.”
캐서린은 에밀리를 접객실로 데려가서 여분 드레스로 갈아입혔다. 은실로 자수를 뜬 보랏빛 드레스였다.
캐서린은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다듬어 주며 은은히 미소 지었다. 손끝이 에밀리의 몸에 스칠 때마다, 에밀리는 멋쩍게 웃으며 제 동생을 내려다봤다.
“이 옷도 언니에게 잘 어울리네요. 보랏빛이 언니한테 이만큼이나 잘 어울릴 줄 몰랐어요. 저라면 그 옷을 소화해 내지 못했을 거예요.”
에밀리는 낮게 되물었다.
“캐서린 어딘가 변했네. 혹시,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니?”
에밀리가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만지작거렸다.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에 에밀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주 아프니 가족들이 그리웠을지도요.”
“그……뿐이니?”
“다른 이유가 있나요? 그래서 예전에 먹던 꽃차도 그립고 그랬나 봐요. 로렌디스가 자리를 오래 비웠더니, 그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듣는데도, 에밀리는 걱정하기보다는 화사하게 웃으며 캐서린을 끌어안았다. 너, 언제부터 나랑 친했다고 포옹이니.
“기뻐!”
에밀리의 뽀얀 뺨이 붉게 상기됐다. 언니는 예쁘게 웃으며 레이스와 자수를 더듬었다. 색색의 은빛 실이 조명 아래서 은은히 빛났다. 그 은빛 실로 고정해 둔 작은 보석들도 꼭 별 조각 같았다.
‘너, 모르는구나!’라고 환호하는 게 얼굴에 선히 보인다. 그 미소가 얼마나 짙던지, 그 앞에서 아랫배를 까뒤집고 웃을 뻔했다.
“네가 나를 미워하면 어쩌나, 언니도 걱정이 컸어.”
“옷은 언니가 마음에 든다면 입고 가도 돼요.”
“고마워. 너무 좋다. 여기, 내 마음에 쏙 들었어.”
찻물로 젖은 드레스는 하녀에게 맡겼다. 그리고 에밀리라면 이 기회를 그냥 보내지 않을 거고.
“아니면 언니, 오늘 하룻밤은 여기서 지내고 갈래요?”
우리는 이런 사근사근한 사이도 아니고, 서로를 애틋하게 위하는 자매지간도 아니다. 에밀리는 욕심이 과했고, 제 것이 아닌 것도 수시로 탐했다.
어맨다는 그런 에밀리를 끔찍이 위했으며, 캐서린의 것까지 야금야금 빼앗아서 에밀리에게 안겨 줬다.
“얘는. 나중에 다시 올게. 나중에 시간 좀 지나거든 어머니와……!”
“다시요?”
“그럼. 내 동생이 사는 곳이잖니?”
캐서린은 그 자리에서 비웃을 뻔했다. 내가 없는 이곳에서요? 내 이름을 빌려 무엇을 요구하려고요. 캐서린은 여유롭게 웃으며 에밀리의 손을 맞잡았다.
“맞아요. 최근에도 로렌디스가 자리를 자주 비워서, 이 넓은 곳에서 저 혼자서 지냈거든요. 그래서 그간 외로웠고요.”
“저런. 그랬니?”
“자매지간에 사이좋게 지낸다면 어머니께서도 마음 놓으실 거예요. 저도 그렇게 헤어지고 속상했어요.”
에밀리는 여전히 계산 중이다. 모르지? 모르겠지. 모르는 게 맞는데……. 저 얼굴 어디에도 구름이 없어. 꽃차를 손님에게 대접한 거면, 아마 그 사실을 모르는 듯싶은데…….
“언니. 여기서 자고 가요. 응?”
“각하께서 내가 있으면 불편해하지 않을까?”
“로렌디스가 며칠 집을 비웠거든요. 응? 여기서 며칠 자고 가요.”
“내가 늦으면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거야.”
“그럼, 어머니께 며칠 자고 간다고 편지로 말씀드리면 되죠. 그러면 어머니도 걱정하지 않을 거예요.”
“그, 그럼 그럴까?”
캐서린이 손짓하자 하녀가 편지지와 실링 스탬프를 가져 왔다. 헬렌의 월계수 문양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왕이면 지금 적어요.”
“네 손님도 계시는데 나중에…….”
“편지가 도착하는 데 시간이 걸리잖아요? 미리 보내놔야 늦지 않게 도착할 거예요.”
캐서린은 느릿한 손길로 에밀리의 어깨를 눌러 앉히고 웃어 주자, 에밀리가 떨떠름하게 표정을 구겼다.
“내일 간다고 이야기하면…….”
“내일보다는요, 며칠 더 지내세요. 하루는 너무 짧잖아요?”
“하긴 우리가 그간 서먹하게 지냈으니, 며칠간만이라도 돈독하게 지내어도 좋지.”
에밀리는 제 글씨로 편지를 적어 내렸다. 내성에서 며칠 밤 지낼 테니까 큰 걱정 마시라. 여기가 마음에 든다. 아주 크고 거대하다. 나중에 기회 되면 같이 오자. 며칠만 어머니 혼자 계시라고.
“다 적었네요.”
“주소는 여기로…….”
주소까지 받아 적은 하녀가 스탬프를 찍어 밀봉하고, 편지를 은쟁반에 담았다. 그 은쟁반이 방 밖으로 나가는 순간이었다.
“나, 얼마 살지 못한대요.”
애석해라…….
어리석은 우리 언니.
“나한테 왜 그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