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캐서린은 인상이 옅은 편이었다.
그간은 여기를 떠날 생각밖에 없었고, 뭐든 빌린다는 마음이 강했던 만큼 최소한의 기품만 지켰다.
그런 그녀에게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넨시가 분주히 치장을 끝내고 흡족하게 웃었다. 화사한 생기에 캐서린도 약간 놀랐다.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네요.”
오늘은 색감이 짙은 붉은색 계열 드레스를 택했다. 화려한 레이스를 덧입혀서 어깨 부분을 트고, 허리 쪽까지 과감하게 팠다. 어깨선을 따라서 색색이 밝힌 은빛 자수 실이 연꽃처럼 퍼졌다.
“세상에 아름답기도 하셔라. 마님께서는 어떤 색상이든 잘 받는 편이십니다.”
“언제는 헬렌의 새하얀 눈밭처럼 흰 드레스가 잘 어울린다더니, 넨시는 때에 따라 말이 자주 바뀌네.”
긴 금발을 아래로 늘어트리고 피부 화장까지 끝냈다. 눈화장도 은은한 펄을 입혀 칠하고, 입술도 새초롬하게 생기를 넣었다.
“다들 도착했니?”
“소소로 르루 부인과, 앤젤라 아멜리아 부인, 소피 블레윗 부인…… 그밖에도 모두 왔습니다. 르루 백작가는 곡식과 차를 유통하는 상단이고, 아멜리아 백작가는 헬렌의 철광 산업을 각하의 대리인으로 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블레윗 자작가는 전대 가주님의 수석 보좌관님의 가문입니다.”
오늘은 내성에 처음으로 손님을 초대하는 날이자, 그간의 악연을 삶에서 지워 버리는 날이었다.
‘에밀리 밀던.’
의붓언니가 먼 길을 오셨으니, 동생으로서 마땅히 대접하는 게 맞지. 그게 그 인연은 끊어 내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캐서린은 오늘부로 마지막 남은 가족들을 끊어 낼 생각이었다. 미안한 마음은 없다. 오히려 후련했다.
“에밀리 밀던, 내 언니는?”
“네. 손님들 사이에 계십니다. 마님께서 직접 초대장을 보냈는데 마땅히 참석해야죠. 손님들 사이에서 이야기 나누는 걸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차와 다과는?”
“분부대로 준비했습니다. 붉은색 꽃잎으로 된 꽃차라 말씀하셨죠? 찾기가 어려워서, 르루 백작의 상단을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마님……. 야외 테이블이라서 날이 춥습니다. 위에 모피라도 걸치시는 게 어떱니까?”
넨시의 조언에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흰 여우 모피를 어깨에 두르자, 넨시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삼켰다.
그 모습은 꽃이라고 표현하기도 부끄럽다. 그건 독초다. 가시를 품은 게 아니라, 화려하지만 그 속에는 위험한 독을 잔뜩 품었다.
화려하지만 그래서 더 위험해 보이는 헬렌이 우아하게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반가워요. 캐서린 헬렌이에요.”
캐서린의 붉은 드레스는 흰 도화지에 붉은 물감을 칠한 듯 그 인상을 아주 강렬하게 바꾸어 두었다. 흰 모피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쓸리고, 그건 꼭 고독한 여제의 모습을 떠올리게끔 했다.
“처음 뵙네요. 그간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얼굴 뵙기가 힘들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니 기뻐요.”
* * *
“그간 몸이 아프셔서 헬렌 성에 칩거하셨다고요?”
캐서린이 그간 헬렌이 성문을 닫고 지낸 이유를 밝히자, 손님들도 동요했다.
그도 그럴 게 붉은 립글로스를 칠한 캐서린에게서는 기품이 느껴질지언정, 아픈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프시다더니 지금은 괜찮아진 겁니까?”
“지금은 괜찮아요. 남편도 돌아왔고, 예전보다 여유롭게 지내요. 아마, 헬렌을 저 혼자서 지킨다는 부담감으로 무리했던 모양이에요.”
“이제라도 건강을 되찾았다니 다행이에요. 다음에는 상단에 부탁해서 몸에 좋은 약재를 선물로 보내 드려야겠어요.”
르루 부인이 염려스럽다는 듯 슬픔을 표했다.
‘거짓말이지만 여기서 더 거짓말 보탠다고 이젠 별로 죄책감도 안 느껴지네.’
몇몇 이들은 내성에 칩거한 이유가 그런 이유였냐며, 헬렌에서 정보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한 이유를 어림짐작했다.
그간 몸이 약했다며 자신의 약점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데, 그걸 굳이 비꼬아서 들을 이유는 없으니까.
“손님들에게 무슨 차를 내어 드릴까 고민을 해 봤답니다. 르루가의 분이 계시니, 어지간한 차로는 입맛을 만족하지 못할 듯해서.”
“모두 기쁘게 맛볼 겁니다.”
“꽃차를 준비했어요. 예전에 꽃차를 즐겨 마셨거든요.”
그 이야기에 에밀리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린 건, 캐서린만 아는 사실이었다.
“붉은색 찻물이 예쁘고 향기도 참 좋답니다.”
“꽃, 꽃차라니……. 홍차를 두고 왜 꽃차를 마시니? 캐, 캐서린, 손님을 대접하는 데……!”
“언니 예의를 지켜 주세요. 나는 캐서린 밀던이기 전에 헬렌 부인이에요. 손님들을 초대했는데, 언니가 면박을 주시니 제 입장이 참 난처해지네요.”
넨시가 와서 찻잔과 다과를 내왔다. 부드러운 비스킷에 마른 꽃잎을 올려 장식하고, 찻잔은 흰 도자기 찻잔으로 금색 세공이 화려한 접대용 찻잔이었다.
“모두 차 맛을 한 번씩 보세요.”
“어쩜 향긋하기도 해라. 달콤하면서 쌉싸름하네요. 꼭 꿀을 먹는 것처럼 그 향긋함이 입안 가득 퍼져요.”
“꽃을 따면 그 줄기에서 꿀이 나오거든요. 그 꿀을 곁들였어요.”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꽃차 특유의 꽃내음을 잘 살렸다. 손님들도 모두 꽃차를 맛보며 한마디씩 거드는데, 에밀리만 홀로 찻잔을 노려보며 눈살을 구겼다. 그리고, 손님들이 먹는 차를 보며 손끝을 덜덜 떨었다.
“그럼 이게 친정집에서 먹던 그 꽃차인가요?”
“그 향이 좋죠? 홍차를 자주 마시면 밤잠을 설쳐 꽃차를 즐겨 마시는데, 저는 이 향이 참 좋더라고요.”
저는 언니에게 악감정은 없어요. 그 악감정 가져가서 어디 써먹어요.
감정 해소 또한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 그 일말의 애정도 없는 우리는 그저 서로를 남처럼 대할 뿐이다.
“어머, 에밀리 양!”
에밀리가 찻잔을 놓쳤다.
“제 언니가 긴장을 했네요.”
“드레스가 엉망으로 젖었네요. 찜찜하겠어요. 제 손수건으로 닦으세요, 에밀리 양.”
아멜리아 부인이 손수건을 건넸다. 에밀리는 티 테이블에 올라온 다과와 찻물을 혼란스럽게 보며 손톱을 깨물었다.
“에밀리 언니, 숙녀가 손톱을 깨물면 못써요.”
“송구합니다. 손, 손이 조금 떨려서요. 미안해. 손님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어.”
티 테이블 아래로 손을 구깃구깃 숨기고,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그럼 제 창피한 민낯이 가려지기라도 하는 듯 나름 필사적이었다. 그 모습이 애잔했다. 그 노력이 가상해서 캐서린은 푸스스 웃어 버렸다.
‘우리 심약한 언니, 내가 못난 짓이라도 했을까 걱정되나 봐요.’
에밀리는 아멜리아 부인께 받은 손수건으로 드레스를 닦고, 더듬더듬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꽃차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무슨 꽃이니?”
“예전에 집에서 보던 꽃이랑 비슷하죠? 붉은 꽃잎을 말리면 그 향이 더 짙어지는 게 좋더라고요.”
에밀리가 캐서린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바로 옆자리에서 닿는 시선이 따가웠다. 에밀리와는 일부러 옆자리를 잡았고, 그래서인지 에밀리도 조심성 없이 캐서린의 귀에 속삭였다.
“캐서린 밀던! 너는 시골 자작가에서나 먹던 걸 손님들에게 대접하면 어쩌니!”
캐서린은 에밀리의 작은 호통에도 표정이 편안했다.
언니가 당황하면 조금 통쾌할까 했더니 심드렁하다. 아무런 감흥도 감동도 없다. 너는 지금 이게 독초라고 의심되나 봐. 이게 독초로 의심된다면 너는 이 사람들이 꽃차를 음미하지 못하게끔 막아야지. 혼자 스르륵 빠져나가는 게 에밀리 밀던답다.
“나름 어렵게 구한 꽃차인데 서운해요. 아쉽지만 저도 친정집에서 먹던 꽃차는 못 구했어요. 이건 비슷한 차예요.”
“……그, 랬니?”
“그런데 언니가 막 화를 낼 일은 아니잖아요. 어머니께서 직접 구해다 준 차를, 너무 못났다고 욕하시다니 어머니가 서운하겠어요.”
에밀리는 다 안다. 지금 그녀의 표정이 다 설명해 준다.
너는 다 알고 혼자 불안해하고 혼자 두려워하네. 캐서린은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가 짙어지자, 손님들의 표정에도 의문이 서렸다.
“친정어머니께서 꽃차를 챙겨 주셨다고요?”
“네. 즐겨 찾으셨죠. 붉은 꽃잎이 유난히 예뻤어요. 지금 마시는 찻물도 예쁘죠?”
캐서린은 모피로 어깨를 감싸고 에밀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붉은 드레스가 스르륵 흘러내리며 몸을 감쌌다. 레이스 자락이 몸에 감기고, 모피가 흘러내리자 어깨선이 도드라져서 나른하면서도 엄중한 기세가 흘렀다.
“언니는 여벌옷을 내어 드릴게요.”
오늘 에밀리는 헬렌에서 머물게 될 것이다.
캐서린의 사람과 캐서린의 영역에서 그 목을 옥죄며, 새어머니께 편지를 보내도 좋겠다.
* * *
헬렌 공작이 황제의 접견실을 찾았다.
“너는 올 때마다 사람을 갯지렁이 보듯 보더구나.”
“오해이십니다. 폐하.”
그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서 꺼냈던 거 같은데 어디서였더라. 곰곰이 고민하던 로렌디스는 관두고 무릎을 꿇었다.
황실 훈장을 받으러 온 길이었으니, 목적부터 바로 해치울 작정이었다. 그 태도가 어찌나 거만하던지 테슬러는 오만방자한 조카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황족에게 예의라곤 쥐뿔도 없는 게, 또 받아 갈 건 잘 받아 간다.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헬렌 공작에게 감사를 표하며 명예 훈장을 내리니…….”
형식적인 절차가 다 끝나고, 테슬러는 본론부터 꺼냈다.
“그래서 그 혼담은 언제 파기할 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