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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29)화 (29/129)

29.

“가끔 당신은 무서우리만큼 집요하면서도 날카로워요.”

로렌디스는 그 속을 끄집어내서 낱낱이 읽어내고 싶다는 얼굴이다. 차마 그러지 못하는 건, 그랬다간 정말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봐서 그러는 것 같고. 삐뚜름한 표정만 봐도 심기가 어지간히 언짢은 게 느껴진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아.”

“다녀오세요. 어디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제가 사라지기라도 하나요.”

로렌디스는 일부러 말을 삼갔다. 그 뒤에 꺼낼 이야기를 몇 번 심사숙고하던 로렌디스가 몇 마디 더 꺼냈다.

“제도 다녀오는 길에 사 올 건 없나? 다녀오는 길에 사 올 테니까 갖고 싶은 거 이야기해 봐. 보통 이렇게 다녀오는 길에 뭔가를 사다 준다던데.”

“우는 아이 선물로 달래 주는 것도 아니고…….”

로렌디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캐서린을 타박했다.

“화해하자는 거잖아.”

“우리, 싸웠었어요?”

“토라졌으면 달래 둬야 할 것 아니야.”

사람을 진짜 아이 취급하네. 캐서린은 설핏 미소 짓다가 그런 기색을 지워 냈다. 화해랄 것도 없는데. 애초에 싸운 적도 없었으니까. 그냥 서로 지극히 무신경하고 무던할 뿐이었다.

캐서린은 로렌디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곰곰이 고민했다.

“유명한 제과점에서 케이크 하나만 사다 주세요. 당근 케이크가 유명한 맛집이 있대요.”

“그게 다야?”

“네.”

“그냥 내가 알아서 사지.”

로렌디스는 괜한 걸 물었다며 답을 일축했다. 캐서린은 홍차를 음미하며 얕게 웃었다. 긴 머리카락이 가늘게 흘러내렸다. 손끝이 찻잔에 머물렀다. 참 가느다랗다.

“왜요, 케이크 사 달라니까?”

“욕심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또 케이크를 하나만 사다 달라는 건 또 뭐야? 물욕이 왜 그렇게 없어?”

캐서린은 그의 타박에 얼이 빠졌다. 이거 지금 혼나는 거 맞나? 상념에서 빠져나온 캐서린은 가볍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너무 늦지만 않게 와 줘요. 나중에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서요. 당신도 그 사람을 한번 만나 봐야죠.”

로렌디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늦지는 않아.”

“좋아요.”

“다른 건?”

“나랑 산책이나 같이 나갈래요?”

못 본 척. 못 들은 척. 서로 거리를 두기엔 점점 어려워진다. 그리고 캐서린의 불안감도 점점 커진다. 로렌디스는 사감 따위 없다며 이야기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에서는 점점 괴리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잠자리는 나눴어도, 로렌디스와 시간을 나눈 기억은 없네요. 오늘은 그 시간을 나눠 보려고요.”

* * *

산책이 다 끝나고, 텅 빈 후원에 로렌디스와 남았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후원은 고요했고, 그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당신이랑은 산책 한 번 같이한 적이 없네요.”

둘이서 나란히 똑같은 하늘을 올려다본다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건 오늘 처음 안 사실이었다.

“다음에 같이 하면 돼.”

“그다음이 또 언제 오리라고 여기시나요.”

로렌디스의 표정에 당황스러운 낯이 스며들었고, 그 짧은 변화도 금방 사그라들었다. 로렌디스는 평소의 덤덤한 낯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중에 또 기회는 오겠지.”

“쌀쌀맞아 보이면서도 또 그건 아닌 것 같고. 당신 속도 알아보기가 어렵네요.”

로렌디스가 픽 웃으며 넘겼다. 캐서린은 그 시큰둥한 표정에 발끈하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나를 동정해도 돼요. 차라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동정하지 않아. 적어도 지금은.”

“어째서요?”

“사람 놔두고 홀로 죽을 생각은 마.”

차라리 동정심이라도 받으면 저 사나운 성격이 누그러질까 했더니, 다 망했다. 로렌디스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는 상념에 잠겨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캐서린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캐서린은 그의 시선 아래 꽉 붙들린 기분이었다.

‘이상해, 당신.’

무언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런 기이한 기분은 사그라지지 않고, 더더욱 깊어져 갔다.

“외부에서 본 의사 이야기 좀 해 주겠나? 캐묻는 건 아니고 어쩌다가 만났는지 좀 묻고 싶거든.”

로렌디스는 제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손을 닦고 다시 넣었다. 그 일련의 행위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짙게 물들었다. 저녁녘의 어둠 때문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그런 눈빛으로 캐서린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몰래 진료받고 싶던 거라서, 조용히 찾아다녔어요.”

“그럼 그 약도 외부에서 처방받았나?”

그런 이야기는 왜 묻지. 캐서린은 조심스럽게 고개만 끄덕였다. 예전에 이미 꺼냈던 이야기라서, 로렌디스도 알겠다며 넘겼다.

마지막 확인이었다는 듯, 로렌디스는 궐련을 꺼내 물었다. 캐서린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예전에도 이상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이상하네.’

로렌디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딱히 다른 감정은 아니고.”

“네?”

“네가 이혼을 너무 쉽게 입에 담아서 약간 빈정이 상해서 그랬다고. 그 정도만 이야기해 두지.”

그 이야기는 더더욱 아리송했다.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도 여기까지였다. 산책길을 지나서 걷는데, 로렌디스가 궐련을 바닥에 비벼 껐다. 툭툭― 담뱃불이 미약하게 꺼지고, 로렌디스가 구둣발을 돌렸다.

굵직한 손가락이 드레스 자락으로 파고들었다. 레이스가 그의 손아귀에 감겨서, 야릇한 모습을 자아냈다.

“이혼 이야기 거절할 때나 그런 표정 짓는 줄 알았더니, 이럴 때도 짓네.”

“……너무하신데요.”

당혹스러움에 물든 얼굴은 붉은 낯빛을 띠었다. 그 거친 손끝이 살갗을 스치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다리에 맥이 풀려 휘청거리는데, 로렌디스가 커다란 손아귀로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이건 예법에 어긋나요.”

“너는 불리하면 예법을 운운하는데, 헬렌에는 헬렌의 법이 있어. 거기에 그딴 예법은 없고.”

처음 느꼈던 위압감과 고급스러움은 퇴색되어 간다. 그 대신, 원초적인 강렬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헬렌은 비교적 예법에서 자유로운 편이야. 국경선에 맞닿아 있어서 다들 성향 자체가 거칠거든.”

투박한 손이 입술을 쓸어내렸다. 그 감촉은 가볍기보다는 묵직했다. 손가락이 혀끝에 닿았던 것 같다. 쌉싸름한 맛이 퍼졌다.

기분 이상해. 가만히 있는 사람 콕콕 찌르며 이래도 되나 그 속마음을 엿보는 것 같고.

“어렵게 여기지 마. 손안에 닿는다는 게, 꼭 그렇게 거창한 일은 아니잖아. 깊게 고민할 일도, 어렵게 여길 일도 아니야.”

그냥 손을 뻗으면 닿고, 그게 끝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렇게 지낼 거니까.”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로렌디스가 윗입술을 베어 물고, 입안으로 혀를 넣었다. 커다란 손아귀로 가느다란 목덜미를 받치고, 그는 더 깊게 혀를 얽었다. 숨이 막, 막혀.

입안에 타액이 고이고, 타액에는 그의 흔적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눈을 낮게 내리뜨며 맞춰 올 때, 본능적으로 침을 삼켰다.

“으응…….”

“혼자 둬도 되나?”

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도 아니고 대답은 해야지.”

“다녀오셔도 돼요. 어차피 자주 비웠잖아요.”

그 부분은 미안해. 매끄럽게 답한 로렌디스가 입술을 닦아 냈다.

“그럼 됐어.”

우리는 싱겁게 끝냈다. 로렌디스는 이 결혼에 개인감정은 없으며 그저 이해관계로 맺어진 계약이라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조금 서운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그저 그렇게 끝나길 바라는 건, 이제 캐서린 쪽이었다.

* * *

“브레디는 남겨 둘 테니까, 필요한 건 브레디에게 부탁하고. 기사단 중 일부는 나와 같이 입궁한다.”

로렌디스가 떠나는 날이 되고, 캐서린도 그를 배웅해 주기 위해 나왔다. 큰 군마에 오른 로렌디스는 위압적인 기세를 적나라하게 풍겼다.

“갯지렁이처럼 지내지 마.”

저 이야기는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며칠 전에 잔디밭에 누워서 빈둥거렸더니, ‘그 몸이 갯지렁이라도 되나?’라고 악담을 늘어놓았다. 돗자리와 담요는 어디 놔두고, 왜 홀로 청승맞게 궁상을 떠냐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처음에는 우스갯소리로 그 입 좀 다물면 안 되냐고 그에게 이야기했지만, 나중에는 진담이 됐다.

“다녀오세요.”

“못 보내서 안달 났군.”

로렌디스도 쯧, 혀를 차는 게 기분이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속이 쓰려 보이네요.”

“그 늙은이를 또 볼 생각하니까 속이 어지러워서 그래.”

브레디가 들으면 기함할 이야기다. 황실에서 전언을 받고 가는 분께서, 황실 어른을 늙은이라 칭하며 귀찮다고까지 빈정거리다니. 헬렌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제도에서 잘못 그랬다간 목이 달아날 사안이었다.

“손님도 좀 초대하고.”

“진짜 가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그러시네. 왜 머뭇거리세요?”

물끄러미 서 있던 로렌디스가 답했다.

“싫어.”

“그간 노력한 일을 보상받으러 간다는 분께서……. 기사들의 사기가 저하될까 걱정이네요.”

제도로 떠나는 일행은 로렌디스와 그의 휘하 기사단 일부로 단출했다. 모두 가벼운 복장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캐서린은 손을 내밀었다. 미약한 손길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빤히 올려다보자, 로렌디스가 말 위에서 익숙하게 캐서린의 머리를 툭툭 만졌다.

말이 푸르릉 떨며 투레질하자, 그는 익숙하게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그의 수하들은 그런 로렌디스를 가만히 지켜봤다. 로렌디스가 말의 고삐를 고쳐 쥐며 이야기했다.

“나중에 봐.”

“조심해서…….”

다녀오시길.

그동안, 여기서도 찬찬히 일을 매듭지을까.

일단은 심약한 언니부터 어머니와 따로 떼어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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