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넨시가 은으로 된 티스푼으로 찻잔을 휘젓고, 찻물을 느긋하게 내렸다.
“주인님께서는 보좌진과 회의에 드셨습니다.”
로렌디스는 보좌진과 자리를 떠났다. 캐서린은 후원 벤치에 앉아서 넨시가 가져다준 찻물을 음미했다.
“주인님께서도 온전히 오셨으니, 마님께서도 대외활동을 시작하는 게 옳습니다.”
캐서린은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별일 아니야. 못 들었는데, 방금 뭐라고 이야기했었어?”
“대외활동을 슬슬 하시는 게 어떤지 제안드렸습니다. 마님께서도 헬렌에서 지내니, 헬렌의 주인으로 사람들 위에 서는 법을 배워야지요?”
그간 미뤄 둔 대외 활동이 더는 미루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로렌디스의 공백이 길어지며, 그 핑계로 사교 모임과 대외 활동을 거절했는데…….
헬렌의 주인이 왔으니, 내성의 성문을 열라는 뜻이다. 가주가 오래 자리를 비웠던 만큼, 사람들에게도 그 주인을 다시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처음이라서 어려운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럼, 가까운 가신들이라도 불러서 가볍게 사교 모임이라도 갖는 건 어떠십니까?”
“가까운 가신들의 명부를 가져다줄래?”
그 목록을 미리 작성해 둔 넨시가 서둘러 명부를 펼쳤다. 캐서린은 목록을 펼쳐 두고 손끝으로 탁자를 툭툭 두들겼다.
목록을 추려 놨어도, 이들의 인적 사항을 일일이 기억하기란 힘들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알아 둘 가문을 먼저 확인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종이를 하나하나 넘기자, 익숙한 가문이 몇몇 보였다.
“소펜…….”
“소펜가의 셀레나 소펜 양이 막 귀환했다더군요. 마님이 막 결혼할 무렵 유학길에 올라서 결혼식 때는 참석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얼굴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셀레나는 현 소펜 가주의 외동딸이었다. 소펜가는 제국 황실의 외척 가문으로, 현 황후가 즉위한 이래로 상승세를 타는 가문이었다.
금지옥엽 외동딸이 대외적으로 1년씩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이제라도 다시 그 공백기를 채우려 대외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그 셀레나가 다시 왔구나.”
“마님께서는 처음 뵙는 것이죠?”
“지난번에 황궁에 다녀오는 길에 봤어. 지나가듯 본 거라서 인사는 못 나눴지만.”
소펜가는 제국의 외교와 무역을 좌지우지하며, 소펜 상단은 외국계 자본을 끌어오는 데 큰 주축을 담당했다. 그래서 가주도 딸아이의 유학에 열린 편이었다.
셀레나 소펜이 온다는 건, 로렌디스와 셀레나의 재회가 가까워진다는 뜻이었다. 제도에서 스치듯 지나친 인연이 이렇게 닿았다.
“일단 가까운 가신 가문에 서신을 넣겠습니다. 가볍게 먼저 만남을 한번 가져 보십시오.”
넨시의 조언에 그리하라 답했다.
“차가 다 식습니다. 마님.”
“이런, 벌써 다 식었네.”
“다시 데워 오라 하겠습니다.”
하녀 하나가 찻물을 다시 끓이러 가고, 캐서린은 귀족 명부를 덮었다.
“소펜 영애의 주변 평판은 어때?”
“사교계의 꽃이라 불릴 만큼 아름답고 총명한 분이십니다. 현 황후님의 조카 되는 분이시지요. 조용조용하고 조심스럽지만, 때로는 과감하게 결정할 줄 아는 모습이 소펜가의 자제답습니다.”
“소펜가는 상단으로 큰 가문이었지?”
“네. 외국의 자본을 받아들여서 무섭게 큰 가문입니다. 현 소펜 공작님께서 특히 그쪽으로 능통하십니다. 황후 폐하의 오라비 되는 분이지요.”
귀족 중의 귀족입니다. 그 이야기로 모두 일축됐다. 황실의 외척 가문으로 황실과 소펜가에서 귀염받고 자란 아이이자, 깐깐하기로 소문난 소펜 부인의 교육으로 귀족들의 표본이 된 여인, 그게 셀레나였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습니다.”
“무엇이?”
“마님과 전체적으로 닮았습니다. 조용조용한 분위기나, 여린 몸이나……. 셀레나 양도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고 전해 들었거든요. 그래서 지난 유학도, 유학이 아닌 요양차 다녀온다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소펜가에서 금지옥엽으로 키운 아이라면, 몸이 약했던 만큼 특히나 더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다. 길게 흘러내리는 금발에, 얄쌍한 몸과, 뽀얀 피부까지. 떠오르는 모습만 해도 연약한 인상이 강했다. 스치듯 봐서 그 인상도 흐릿했는데, 가냘픈 인상이 아니라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왕 초대장 적는 거, 하나만 더 적을게.”
“네. 말씀하십시……. 이분을요?”
넨시가 조심스럽게 다시 되물었지만 캐서린은 미소로 답했다.
“지시대로 처리해 줘.”
“마님 뜻이 그러하다면 저는 따를 뿐입니다.”
넨시는 제 마님께도 깊은 뜻이 있거니 하며 조용히 넘겼다.
“그럼, 로렌디스에게도 허락을 받아야 되려나.”
“어떤 허락 말씀이십니까?”
“그냥 손님을 초대하는 건 처음이라서…… 로렌디스는 집무실에 있을까?”
넨시가 맑게 웃었다.
“그럼, 집무실로 모실까요?”
“걱정되네. 잘할 수 있을는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가신들은 마님의 초대라면 기쁘게 응할 테니까요.”
캐서린은 넨시의 충심 어린 말에도 쓰게 웃었다.
“남편에게 다녀오자.”
굳게 닫아 뒀던 내성의 성문을 열 때가 됐다. 벽돌을 쌓아서 올린 성벽은 굳건했고, 그 위용도 여전했다.
성벽은 캐서린을 가두면서도 보호하는 역할을 해 줬다. 지금까지는 이곳 사람들만 보면 됐는데, 이제부터는 가신과 그들의 자제들까지 속여야 한다. 문득, 캐서린은 그런 앞날이 까마득해졌다.
* * *
“그런 건 내게 허락받을 일이 아니야.”
로렌디스는 흔쾌히 허락했다.
“헬렌 부인이잖아. 내성은 처음부터 너의 영역이었어.”
내성은 캐서린의 영역이다. 그간 내성을 다스려온 게 캐서린이었고. 그걸 남에게 허락받는다는 게 모양이 이상하긴 한데…….
“그건 그렇네요.”
“의외로 엉뚱한 면이 있어. 그거 허락받으려고 온 거야?”
“그건 아니고요. 당신 얼굴 보려고요. 요즘 어색해진 것 같아서요.”
캐서린은 로렌디스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당신 얼굴 봤으면 됐어요. 얼굴 보고 대화 좀 하려고 온 거니까.
며칠 서먹한 듯해서 이상한 마음에 확인하러 왔는데, 캐서린이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다.
“혹시 방해된 거예요?”
“왜?”
“당신 일하는데 괜히 왔는가 해서요. 보좌진도 다 바빠 보이고요. 방해된 건 아니죠?”
로렌디스는 캐서린이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또 거슬린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다.
“네가 오면 안 될 곳은 없어. 네가 하면 안 될 것 또한 없고.”
“그런 것치곤 요즘 제게 안 된다, 입 닫아라, 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
“그건 네가 말도 안 되는 말을 자주 하니까 그러잖아.”
로렌디스는 윽박지르듯 소리를 지르려다, 캐서린의 말간 낯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애틋한 마음으로 결혼했어도 자주 싸우는 게 부부 사이다. 결혼한 뒤로도 서로 가까이 지내지 못했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니 부딪칠 때마다 소음은 어쩔 수 없다.
“네게 화낸 게 아니야.”
“답답해 보이시네요.”
로렌디스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몸도 성치 않으면서 여기까지는 왜 왔어. 데니스 교수가 다시 오기 전까지는 충분히 쉬어 두라 했잖아.”
툭툭 말을 뱉던 로렌디스가 제 말실수를 깨달았다는 듯 다시 되짚었다.
“비꼬려던 게 아니야. 아프댔으니 그냥 몸이나 더 돌보라는 뜻이었어. 그리고 네가 못 올 곳은 아니지. 헬렌의 내성은 안주인인 네가 다스리는 게 맞잖아. 헬렌 부인. 그 이름으로 불러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 위치를 자꾸만 잊는 거야?”
저걸 다시 되짚으며 정정해 줄 만큼, 로렌디스가 세심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는 직설적이고 대범하며, 때로는 과감하기까지 한 성격이었다. 그런 로렌디스였으니까 지금껏 그 험난한 전쟁터를 유유히 떠돌았을 것이다.
“온 김에 이야기하지.”
캐서린은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말씀하세요.”
“내성을 잠시 비우게 될 거야.”
그 이야기를 꺼내던 로렌디스는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는 듯, 건조하기만 했다.
“이번에는 오래 자리를 지키는 것 같더니, 자리를 비우시네요.”
이 시기면 무슨 일로 비우는 거지. 캐서린이 곰곰이 고민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로렌디스가 매끄럽게 답했다.
“앞으로 대략 일주일간 비우겠지. 제도에 다녀와야 하는데, 이번에는 나 혼자 다녀오는 거라서 빨리 다녀와도 그쯤 될 거야.”
로렌디스가 또 자리를 비운다. 그가 자리는 비운대도, 하루이틀 일이 아닌지라 헬렌에서는 별거 아닌 일로 여겼다.
온 지 며칠이나 지났지. 제도까지 다녀오면 아마 또 못 보겠네. 물론 금방 다녀올 거리이고, 금방 끝날 일정임을 안다.
“다녀오세요.”
“그렇게 홀연히 보낼 게 아니라, 사정이라도 좀 물으면 안 되나?”
그걸 묻는 게 먼저였구나. 캐서린은 뒤늦게 깨닫고 되물었다.
“왜 다녀오는 거예요?”
캐서린이 얇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갸웃거리자, 그의 시선이 그 손끝에 내려앉았다. 작고 여린 손끝이다. 그 손은 깨끗하고 뽀�R다. 그 손끝이 머리카락에 감기자, 그의 시선도 같이 따라붙었다.
“황실에서 훈장 받으라고 칙서를 보내왔어. 그건 나만 잠깐 다녀오면 되고 어차피 금방 올 거야. 이상한 생각은 그쯤에서 그만둬.”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사람 같네요.”
“세상 다 관두고 싶다는 표정이잖아. 지금 내가 눈앞에서 꺼지기라도 하면 다 관두고 잠적할 얼굴이라서 하는 이야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