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로렌디스는 지금껏 캐서린만 보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캐서린이 오롯이 비쳤다.
새까만 어둠 속에 캐서린만 홀로 덩그러니 있었다. 로렌디스가 그 어둠 자체였고, 그가 캐서린을 꽉 쥐고 어둠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몸이 침대 시트에 파묻혔다. 온몸이 어딘가 묶이기라도 한 듯,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캐서린은 어느덧 침대에 멀거니 누워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치료받아서 버텨라. 못 버티겠다면 내가 억지로라도 잡아 놓을 테니까. 그 미련 없다는 눈짓으로 나를 바라보지 마. 아파도 버티고, 죽고 싶어도 버텨라. 그래도 언젠가 죽을 듯싶을 때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헬렌에서 헬렌으로 죽어.”
몸이 뻣뻣하게 굳어 간다. 아무것도 마음대로 풀리지 않고 서서히 옥죄어 오는 게, 단단히 잘못됐다.
“나는 너를 놓아줄 마음이 없으니.”
로렌디스가 침대 옆을 짚고 속삭였다. 그 표정이 소름 돋으리만큼 차가워서 감히 그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너 또한 나를 놓지 않기를 바라.”
로렌디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몸을 스스로 포기하지 말기를.
마지막까지 버티다 그 몸을 포기할 때는 헬렌의 땅에서 헬렌으로 남기를.
* * *
아침이 밝았지만, 진료동에는 아직 어둑한 어둠이 가득했다.
데니스 교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마님께 시한부 선고를 내리며 암울한 마음에 통곡한 게 며칠째.
‘뭐지?’
데니스 교수는 매일 아침 주인마님께 안부 인사를 여쭙고 혈액을 몇 방울 채취했다.
그건 데니스의 하루 일과이며, 마님께서 완치 판정을 받기 전까지는 매일 아침 이어질 것이다.
“스승님, 뭐가 이상하십니까?”
“이놈아! 내가 여기는 들어오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아, 아니 그게 말입니다. 바깥에서 스승님을 찾아도 말씀이 없으시니……. 죄송합니다.”
마님의 중독 증세는 아직 외부적으로 비밀이었다. 제자 중에서도 측근 몇몇만 겨우 아는 사실이었다. 어린 제자는 죄송하다며 쩔쩔매며 여쭸다.
“무슨 고민이 크십니까?”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구나.”
제자는 스승의 어깨 너머를 흘긋거리다 혈액 샘플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 피인지는 모르지만…….
“피가 희석이 됐네요.”
“네 눈에도 그게 보이냐?”
“그, 그…… 보면 안 되는 겁니까?”
처음에도 미약한 독이었다. 아주 미약하지만 꾸준히 노출된 탓인지 피에 잔류한 독이 가득했다. 그런데 지금 그 독이 점점 더 옅어지고 있다.
“각하께서 독에 내성을 키우는 중이십니까? 높은 귀족 어른들은 어려서부터 독에 내성을 키운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린 제자는 호기심을 보이다가 금방 관심을 꺼트렸다. 높으신 분들 일에 관심을 보이면, 목이 일찍 달아난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모양이다.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데니스 교수는 아주 미약하지만 손톱만 한 변화를 보고 희망을 품었다. 마님께서는 여전히 견뎌 내고 계시다.
초연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듯 보이지만, 마님께서는 굳건한 마음으로 독 기운을 견뎌 내고 계시다. 데니스는 그 사실에 눈물을 흘렸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
로렌디스가 진료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 표정이 얼마나 사납던지, 데니스는 움찔하며 무릎부터 꿇을 뻔했다. 하얀 가운에 손바닥을 슥슥 닦은 데니스는 혈액 샘플과 보고서를 보여 주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님께 희망이 보입니다.”
“무슨 뜻이지?”
“피가 스스로 독을 희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성이라는 걸 쌓는 것 같습니다. 보통 그 과정이 엄청 고통스러우실 건데…… 어째서 마님께서는 큰 내색 하나 없이!”
로렌디스는 눈살을 찡그렸다. 아내는 내색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어디 아픈 곳 하나 없는 낯빛이었는데…….
“그리고, 독 기운이 개미 손톱만큼이지만 아주 옅어졌습니다.”
“어째서?”
“보통은 해독제를 먹어야 옅어지는데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위험한 수준이긴 합니다. 내성이 쌓여도 여전히 위험합니다. 이만큼 버텨 온 게 더 신기할 지경입니다.”
데니스 교수는 벅찬 눈물을 삼키며 주인마님의 의지에 경의를 표했다. 이건 마님께서 살겠다는 의지가 강하기에 일어나는 기적이다.
보통 그 정도로 오랫동안 독에 노출되면, 몸 안쪽에서부터 병들어서 고통도 클 것이다. 이건 마님께서 독하게 버텨 내신 게 분명하다.
“마님께 알리겠습니다.”
“아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더 경과를 지켜보고 교수의 제자부터 기다리지.”
데니스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아주 작은 희망은 그저 등불일 뿐이다. 이 등불이 꺼진다면 마님을 다시 그 어둠 속에 집어넣는 꼴이 된다. 그 사실을 잊다니, 마님께 가혹한 일을 저지를 뻔했다.
‘확실해지면 꺼내자는 뜻이구나.’
데니스 교수는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예의를 올렸다. 마님을 살려 내지 못한다면, 목을 내어놓겠다는 각오로 치료에 임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침묵하겠습니다. 그 제자를 데려와서 연구하면 분명 성과가 나올 테니, 각하께서도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로렌디스는 기이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라면 왠지 저 소식을 크게 기뻐하지 않을 듯한데.’
살 기회가 보인다면 기뻐하는 게 맞는데, 캐서린은 오히려 죽음 앞에서 더 편안해했다. 지금도 초연하게 해탈해서 죽음을 마주 보는데, 어쩐지 그 소식을 들으면…….
“나한테 따져 물을 것 같군.”
“네? 각하?”
“아니다. 일단은 연구를 계속 이어 나가도록.”
로렌디스가 턱을 옥죄는 크라바트를 푸는데, 브레디가 진료실 문을 두들겼다. 이른 새벽부터 진료동에 모여든 이들의 기운이 고요함 속에서 파도처럼 너울거렸다. 로렌디스는 때를 기다리는 듯, 천천히 숨을 골랐다.
“아내는?”
“오늘은 일찍 기침하셨답니다. 데니스 교수께서도 다녀갔다던데, 마침 이야기 나누고 계셨군요.”
로렌디스는 브레디에게 일정을 전달받고 침묵에 잠겼다.
* * *
맑은 오후였다. 푸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날씨도 선선했다. 그래도 바람은 여전히 쌀쌀했다.
캐서린은 탁자에 앉아서 따뜻한 망토로 몸을 덮었다. 로렌디스가 맞은편에서 캐서린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내게 용건 있으세요?”
노골적인 그의 시선이 캐서린의 마음 한구석을 불안하게 긁었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빤히 볼 때면, 짙은 눈동자 아래로 깊이 모를 감정이 넘실거렸다.
“그 시기가 얼마나 됐지?”
“그, 그게…… 지금 왜 궁금해지신 건가요?”
“그냥 오랫동안 홀로 앓았을 듯 보여서. 네 곁을 비운 시간만큼 혼자서 다 버텨 냈는가 했어.”
로렌디스가 떠나 있던 반년과, 자작저에서 지냈던 시간을 합친다면 짧지 않은 시간이다. 캐서린이 찻잔을 들고 찻물을 음미하는데 로렌디스가 되물었다.
“아픈 곳은 없나?”
“브레디에게도 이미 이야기했지만 크게 아픈 곳은 없어요. 혼자서 버틸 만했으니까 혼자 버텼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어요.”
이 이야기를 하면 로렌디스가 화를 낼 거라고 여겼다. 말을 이미 뱉은 뒤에야 실수했다고 깨달았으니까.
꼭 스스로 아픈 걸 숨기고 꾹꾹 눌러 담는 사람처럼 보이잖아. 사실이긴 하더라도, 적당히 아픈 내색도 했어야 맞나…….
“모시는 주인이 아픈지도 모르는 하녀들이면, 너의 곁에 놔둘 필요도 없으려나.”
무던하게 나오는 이야기에 캐서린은 흠칫하며 어깨를 굳혔다.
“로렌디스, 나는 평소와 같아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데니스 교수를 만나고. 지금 제게 아픈 기색이 느껴지나요?”
로렌디스가 턱을 괴고 캐서린을 빤히 바라본다. 그 시선은 캐서린을 조목조목 뜯어내서 읽어내는 것 같았다. 그 시선에 온 신경을 빼앗겼다. 그는 이미 캐서린을 시야 아래에 두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고 있었다. 그 시야에서 자유로워진 뒤에야, 캐서린도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기색은 없네.”
“저는 무기력할 뿐이에요. 제가 무기력해 보인다고, 제 곁에서 우울해하시면 저는 아마 그게 더 우울할 거예요.”
로렌디스는 그러면 됐다며 일축했다. 두꺼운 손가락이 그의 눈두덩이를 덮었다. 툭툭― 눈썹을 쓸던 손이 느릿하게 멈췄다. 로렌디스는 손을 거둬 내고 느릿하게 목을 꼿꼿하게 폈다.
“그럼 됐어.”
그 뒤로 로렌디스는 매끄럽게 이야기를 넘겼다. 며칠 전 캐서린에게 크게 화를 냈던 로렌디스를 떠올리면, 예전과는 다른 기운이 흘렀다.
그 차이점은 모호했다. 무덤덤하고 고요한 기색이 비슷했다. 짙고 노골적인 눈동자도 여전했고.
‘예전과는 다른 게 특정하기가 어렵네.’
찻잔은 천천히 식어 갔다. 넨시가 찻물을 다시 데워 온다며 주전자를 가지고 갔다. 차가운 바람에 몸이 금방 식었다.
로렌디스도 그걸 느꼈는지 하녀에게 부탁해서 담요 하나를 더 가져다 달라 했다.
하녀는 눈썰미 좋게 그 담요를 캐서린에게 가져다주고, 로렌디스는 그 길로 앉은 자리를 정돈했다.
“너무 오랫동안 밖에 머물지 마.”
“네? 네……. 알겠어요.”
보좌관이 로렌디스를 찾아서 데려가고, 캐서린은 후원에 홀로 남아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