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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26)화 (26/129)

26.

“혹시 마음이 상하셨어요?”

“네가 이 결혼에 불만이 많은 건 알지만.”

로렌디스가 독주를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크리스털 잔에는 얼음 한 조각 하나 없이, 미지근한 독주만 담겼다. 입안에서 머무는 시간도 없이 그대로 넘기는 그 모습에 캐서린까지 몸이 저릿해졌다.

“헬렌에서는 그 책무와 의무를 온전히 다해. 그게 지금 당신 역할이니까.”

“로렌디스와 다시 재회하면, 그때는 내 뜻대로 하게 해 준다고 그랬잖아요.”

말끝을 흐렸다. 이미 그는 듣지 않는다.

꽉 막힌 벽에 가서 내 이야기 좀 들어 달라 호소하는 꼴이잖아.

그는 독주를 한 잔 더 마셨다. 이제 몇 잔째지. 캐서린이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는데, 로렌디스가 느지막하게 답했다.

“그때와 달라졌으니.”

“…….”

“그 역할도 이젠 달라지겠지.”

로렌디스가 신문을 덮었다. 이제 다 본 듯 마저 접어서 탁자에 내려 두고는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느긋하면서도 그 행동 하나하나가 묵직했다.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기묘한 무게감이 흘렀다.

“그 몸으로 여기서 나가면 그다음은. 네게 그다음은 있나?”

그는 그다음을 논하지만, 캐서린에게는 그다음이 없다.

“여기는 헬렌이고 헬렌은 내 것이지. 너 또한 그러하고.”

헬렌에 있는 모든 게 그의 손아귀 아래 놓인다면, 캐서린이라 해도 다를 게 없다. 로렌디스에게 온전히 묶인다.

“새 혼담을 찾는 게…….”

“어째서?”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이득이 남는 혼사도 아니고, 로렌디스에게는 좋은 혼처가 더 있을 거니까요.”

처음부터 그랬어야 한다. 이용가치가 끝나면 이 이해관계를 끝맺고 서로를 놓아주는 게 옳았다.

로렌디스에게는 그저 수단에 불과한 결혼이었고, 캐서린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곳이었을 뿐이다.

“개인감정은 없어도 돼. 다들 그러고 지내니까.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도 그랬고. 그게 우리 결혼의 흠이 될 일은 없어.”

개인감정은 없다. 그건 문제되지 않는다.

“충분히 이득에 남는 혼사야. 적어도 너와 결혼한 동안에는 다른 압박을 받을 일이 없으니까. 나는 그 이득까지도 다 계산했고.”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저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라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더 좋은 혼처는 누가 정의하지? 네가 정의하는 부분인가? 쓸모없는 이야기로 기력 빼지 마. 나는 다른 혼처는 고려해 본 적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너였어.”

로렌디스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조금의 사감도 없고 조금의 안타까움도 없었다. 차갑고 냉정한 그 시선에 캐서린도 움찔했다.

“다들 안절부절못하는데 당신은 내게 할 이야기 다 하네요.”

로렌디스도 그 말에는 멈칫했다.

“죽게 둘 생각 없으니까.”

로렌디스는 이 결혼을 깨트릴 마음도, 캐서린을 놓을 마음도 없으며, 그녀에게 죽음 또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죽고 싶다며 하는 순간에도, 나는 너를 놓지 않을 테니까. 나는 너를 내 곁에 잡아 둘 거고……. 네가 다 낫더라도 놓아줄 마음은 없어.”

로렌디스가 싱그럽게 웃었다.

“버티다 버티다 마지막에 다른 길이 없어도, 그때도 너를 붙잡고 있지. 유감이야. 너는 내가 놓아주길 바라는 듯 보이지만.”

그 마음을 이미 다 엿봐 두고도,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잡아 두길 택했다.

“이 결혼이 유지되는 데 큰 이변은 없어.”

이 결혼은 이대로 유지된다. 로렌디스에게 몇 번이고 들은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도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또 묵직하게 내려 꽂힌다.

캐서린은 그에게서 도망치듯 뒷걸음쳤다. 느릿느릿 물러나는 발걸음을 로렌디스가 붙잡았다. 그 손은 제법 억셌으며 도망칠 길 또한 막아 두었다. 캐서린이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데, 그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네 속을 도저히 모르겠어.”

“읽기 어려운 속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읽기 쉬운 속도 아니야.”

“로렌디스가 그렇다면 그렇겠죠.”

작기도 작고 여리기도 여린 몸이다. 그는 그 모습을 직접 손안에 쥐었다. 그리고 그 턱에 입을 맞췄다. 거친 입술이 턱 끝에 닿았다. 그 촉감은 마냥 부드럽기보다는 딱딱했다.

“너는 나와 이제 막 재회해 두고 이별을 논하면서, 내가 조금만 닿아도 몸을 웅크리는 건 내게도 못할 짓이잖아.”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이름을 고요히 불렀다.

“캐서린.”

그 이름이 꼭 캐서린을 그의 머릿속에 새겨 넣는 것 같아서 오싹했다. 그는 조목조목 캐서린을 담아냈다.

눈 속에만 담아내는 게 아니라, 감각 속에 담아내고 그려 냈다. 그 눈짓에 캐서린은 울먹거렸다.

‘냉혈한이라면서요…….’

아내가 죽든 말든 애정 한 톨 안 쏟던 냉혈한이라면서요.

이게 어딜 봐서 냉혈한이에요.

“억제제를 먹고 있어요. 처방해 준 의사 이야기로는, 길게 버티긴 힘들다더군요. 이제 곧, 로렌디스도 알게 될 거니까 이야기할게요.”

로렌디스에게 그간 먹던 약을 꺼내서 보여 주었다. 그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무슨…… 약이지?”

“억제제와 진통제예요. 먹은 지 좀 됐어요. 당신에게 솔직하게 말해 주지 못한 건 미안해요. 처음에는 말할 기회가 없었고, 그다음에는 말할 기회를 놓쳤어요.”

개인적인 사정은 변명하지 않겠다. 이미 몇 번이고 말할 기회가 있었지만, 스스로 침묵을 택한 건 캐서린이었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놓아주고 서랍장을 살폈다. 붉고 푸른 약병을 확인하더니, 로렌디스는 그 개수까지 하나하나 셌다. 서랍장 가득 쌓인 약병은 한 손으로는 다 세지도 못할 만큼 개수가 많았다. 로렌디스는 그 모습을 보며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뭐지?”

“예전에 처방받은 약이에요. 억제제가 효험을 보긴 하더라고요. 타운하우스에 다녀온 며칠, 억제제를 빼먹었더니 코피가 났거든요.”

“너는 왜 그걸 지금에서야 이야기하는…….”

로렌디스의 차마 말을 다 뱉지도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는 그 짧은 몇 마디에서 그간의 일을 유추해 냈다. 이미 처방받은 약이 있다는 건, 그 약을 먹은 지 오래됐다는 뜻이다.

또한, 타운하우스에 다녀온 며칠간 억제제를 빼먹었다는 건, 그동안 이미 약을 먹어 왔다는 거고.

“처음에는 그냥 헬렌을 떠날 생각이었어요. 로렌디스도 이 결혼에 감정 따위 없다며 그 입으로 이야기했으니까요. 저를 쉽게 놓아주리라 여겼거든요. 이해관계란 건, 결국 서로에게 이득이 있어야지 유지되는 거니까요.”

이 이해관계가 유지되더라도, 로렌디스에게 이득이 될 건 없다. 처음부터 이해관계라며 설명한 건 로렌디스였다.

이번 계약 결혼을 제시한 건 캐서린이었지만, 캐서린보다도 이 결혼에 냉담하게 반응했던 게 로렌디스였다.

“사랑은 없으니 쉬울 거라고 믿은 게 제 실수였어요.”

로렌디스는 무언가 놓쳤다는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캐서린은 그 멍한 표정을 보며 방긋 웃었다.

“죄책감은 가질 것 없어요. 로렌디스 때문이 아니니까. 그저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여기고, 저를 놓아주세요.”

캐서린이 바라는 건 그것뿐이다. 이제 솔직하게 이야기했으니, 로렌디스도 마땅히 우리의 이해관계를 되짚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헤어짐을 고려하리라. 로렌디스에게는 캐서린을 계속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보잘것없는 캐서린 밀던의 역할은 거기서 끝났으니까. 그런데.

“내가 어째서 그래야 하지?”

로렌디스는 그의 불쾌한 기분을 노골적으로 표해 냈다.

그는 흰 침의 바람이었다. 편안한 차림이었지만 그 위압감은 여전했다. 넓게 벌어진 어깨가 꼭 캐서린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 약을 처방한 건 누구지?”

“지금 당장은 말해 드리기가 어려워요. 나중에 기회가 닿는다면 로렌디스도 보게 될 날이 올 거예요.”

캐서린은 상념에 잠겼다. 데니스 교수가 제자를 데리러 간댔지. 학계에서 쫓겨나서 음지에서 의료원을 차린 제자. 그 성질이 괴팍하며 제자들 사이에서도 성격 나쁘기로 유명했다니까.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제임스 박사.’

인연이 닿는다면, 제임스 박사가 직접 헬렌 내성을 밟게 될 것이다.

“너무 늦지는 않을 거예요.”

“캐서린, 그냥 지금 이야기하는 게-”

“나중에요. 너무 늦지는 않게 말씀드릴게요. 아마도, 데니스 교수가 제자를 데려오면 그때는 말씀드릴 수 있을 거예요.”

로렌디스는 여전히 무뚝뚝하고 사나웠다. 딱딱한 기세는 매섭게 캐서린을 찔렀다. 그 날카로운 눈짓으로 살갗을 긁는 게 날카로웠다. 가시엉겅퀴가 몸에 달라붙듯, 촘촘하면서도 따끔거렸다.

“그간 왜 그러나 궁금했는데 이제 알겠군.”

로렌디스가 자조하듯 웃었다. 그건 캐서린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스스로를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로렌디스의 시선이 탁자에 놓인 독주에 향했다. 그는 한 잔 남은 독주를 따라서 마저 마시고 나긋나긋하게 이야기했다.

“그런 이유로 내가 너를 놓아주리라 여겼나?”

그건 속삭임에 가까웠다. 귓바퀴를 훑는 목소리는 다정하다 못해 따뜻했다.

“몸은 치료받으면 될 일이다. 지금 그 몸으로 나간다는 건, 어디 묫자리라도 제 발로 찾아 나서겠다는 뜻인가? 아주 용감해. 죽음을 바라보는 자세가 아주 바람직해. 전장을 십수 년 떠돈 나보다도 무덤덤한 게 세상을 두어 번 살았다고 봐도 좋겠어.”

“로렌디스, 나는 싸우려고 이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닌…….”

지금껏 보아 온 모습들이 어린아이들을 겁주는 정도라면, 지금 로렌디스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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