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그는 숨을 삼켰다. 가까운 처마 아래에 아내가 서 있었다. 흰 드레스가 젖어서 어깨가 투명하게 비쳤다.
“내가 무얼 잘못 봤나?”
“마님이십니까?”
“지금 저기서 처량하게 비를 맞는 게 헬렌의 안주인이라고. 아랫것들은 지금 무엇하고…….”
브레디가 난처하게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누구 죽어 나가는 꼴을 보려 마님을 저기 밖에 세워 둔 것이야!
“저게 진짜…….”
“각하, 각하 제발, 마님은 전장에서 구르는 무식한 사내놈들과 다릅니다. 언사를 조심하십시오!”
브레디는 송구해서 미칠 지경이라며 두 다리를 덜덜 떨었다. 로렌디스가 거친 기세를 풀풀 풍기며 캐서린과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손목을 매섭게 잡아챘다. 맞잡은 손목이 가늘게 떨렸다.
아내가 제 몸 보기를 돌처럼 여긴다는 건 알지만, 이 모습을 보니까 울분이 머리끝까지 솟았다.
“미쳤나?”
“마님 송구합니다. 정말 송구합니다.”
“정녕 미쳤지. 네가 아주.”
브레디는 ‘저질렀다.’라는 표정으로 두 내외를 흘끔거리다 조심히 피했다. 브레디는 조용히 손짓했다. 다들 귀를 닫거라. 주인 내외 불똥에 맞아 죽기 싫거든.
“오셨어요, 로렌디스.”
“왜 그 꼴이야?”
“옷이 젖어서 그런가 처량하네요.”
“내가 지금 그딴 걸 묻나? 여기서 왜 그 꼴로 서 있나 묻는 거야. 하녀들을 모두 잡아다 꿇려 놓아야 내성의 기강이 바로 서는…….”
이제 대충 감이 온다. 그는 흥분하면 전장에서 쓸 법한 언사가 나왔다. 그 언사는 거칠고 노골적이며 때로는 야만적이었다.
“이리 와.”
몸이 추위에 오들오들 떨렸다. 젖어 드는 어깨가 유난히 초라하게 움츠러들었다. 그 꼴이 보기 싫다는 듯 로렌디스가 재킷을 덮어씌우고 매섭게 잡아끌었다. 손목을 움켜쥔 손아귀에 시퍼런 핏줄이 솟았다. 따갑고 쓰렸다.
“비를 왜 맞아!”
로렌디스는 소리를 치다 말고, 본인도 이게 아니라고 느꼈는지 숨을 삼켰다. 그는 당장 뭐부터 꼬집을지 몰라서 애먼 입술만 깨물었다.
그의 적나라한 표정 변화를 보며, 이 사람에게도 인간다운 면모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차라리 못 본 척하고 싶어져. 그 꼴을 보면 속이 다 뒤집혀.”
“그럼 못 본 척해도 좋아요.”
“너는 꼭 말을 그렇게 해야……! 아니다. 됐으니 그쯤 해 둬.”
거칠게 쏘아붙이던 말이 뚝 끊겼다. 로렌디스는 화가 났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옷이 다 젖었다. 드레스를 입으면서 묶었던 리본과 매듭이 빗물에 젖어서 엉켰다. 로렌디스는 엉킨 매듭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내려놨다.
“하녀를 불러 주지.”
침실에서는 벽난로가 타닥대며 불타올랐다. 눈꽃나무 향이 은은히 퍼졌다. 맥없이 풀린 눈이 그를 향했다. 초점을 잃은 눈은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 로렌디스는 또 무언가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당신은 나를 볼 때마다 어떤 식으로든 화를 내는 것 같아.
“잘못했어요.”
속삭이듯 꺼낸 이야기에 로렌디스는 표정만 왈칵 구겼다.
“뭘 잘못했다는 거지?”
긴 침묵 끝에 로렌디스가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너는 아직도 내가 왜 화내는지 모르나?”
냉혈한이라 소개된 남편은 첫인상과 제법 달랐다.
예정대로라면 캐서린은 로렌디스의 무관심 아래 요절할 것이다. 그게 캐서린 헬렌의 미래이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쓸쓸히 홀로 죽어 가는 조연. 캐서린도 그 삶에 순응했다.
“걱정해 주는 사람 앞에서 삶을 놓은 듯 굴잖아……. 그게 참 허망했어. 너는 늘 그런 눈빛이었잖아. 어디 달아나기라도 할 것처럼. 그 눈을 볼 때마다 속이 다 뒤집히는데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단 말이야.”
죽음에 순응하고 미련을 버렸더니, 삶이 캐서린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포기하지 말라고. 마음대로 놓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윽박지르며 그녀를 다시금 뭍으로 끌어 올렸다.
‘차라리 무관심하시지.’
나더러 어쩌자고. 차라리 무관심했더라면 헬렌을 떠나 홀로 죽기라도 하지. 내 삶이 왜 이 꼴이 되도록 흘러온 거지.
로렌디스의 시선 아래 놓인 순간, 홀연히 헬렌을 떠나기는 더 어려워졌다.
“답답해 미칠 노릇이야.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다른 방도를 찾는 건 내가 찾을 테니까. 너도 그렇게 알아놔.”
로렌디스가 답답함에 윽박지르듯 이야기하며 문을 열었고, 밖에서 대기하던 브레디가 비명처럼 외쳤다.
“각하. 마님께 말씀 좀 조심하십시오! 제발!”
“브레디, 집무실에 있을 테니 상황 정리하는 대로 집무실로 와.”
로렌디스가 그렇게 떠나 버리고, 브레디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석고대죄했다.
“각하께서 말주변이 서툴러서 그렇습니다. 마님, 저건 진심이 아닙니다.”
시선이 초점을 잃고 점점 흔들린다. 그를 뒤따르던 시선에는 불안감이 깃들고, ‘너 어쩔래?’라고 스스로에게 되묻기 시작했다. 나도 몰라. 나 어떡해.
“브레디도 이만 가 봐요.”
“마님…….”
“이번에는 제가 잘못했으니까요.”
시한부 사실을 숨기고, 그의 곁에 머물렀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말할 기회가 있음에도 침묵한 건 캐서린의 선택이었다. 캐서린은 그의 앞에서 답답하리만큼 침묵했다. 그래도 그 침묵은 정당하리라 여겼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댔어요.”
로렌디스는 사랑 따위 없이 이해관계 하나로 이 혼담을 이끌어 온 사람이다. 그러니 서로의 이해관계가 끝난다면, 서로를 놓아주는 게 맞다. 그게 이 혼담이 맺어진 이유였으니까.
“그래 놓고 왜 나를 걱정할까요.”
동정심이려나. 아내에게 품는 동정심이라니, 그런 동정은 사양이다. 스스로가 진짜 보잘것없어지고 불쌍해지는 기분이니까.
“이만 나가 주세요.”
“마님 부디…….”
“지금 나눈 이야기는 로렌디스에게 하지 말고요.”
어찌 됐든 끝날 인연이다.
그러니 조용히 끝맺는 게 맞다.
‘나는 당신이 죄책감 따위 품지 않기를 바라요.’
* * *
시간이 늦었다.
집무실에 간다던 로렌디스도 늦은 새벽에야 침실로 들었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이 잔다고 여겼는지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맞은편 탁자에 캐서린이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아직 안 잤나?”
“로렌디스가 아직 안 오기도 했고요. 잠이 오지 않아서요.”
밤하늘은 공허했다. 별빛조차 보이지 않고, 그저 검기만 했다. 예전에는 은하수가 쏟아질 것처럼 그 위를 하얀 별들이 빼곡히 채웠는데. 며칠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하늘도 어둑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침실을 합쳐 지낼 거라고, 하녀들이 지나가듯 이야기하더라고요.”
그간은 서로 각자 일이 바빠서 잠드는 시간도 다르고, 각방에서 따로 지냈다. 보통은 합방이 원칙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라서 미뤘다. 며칠간 영지 시찰이라며, 밤마다 로렌디스가 영지를 살펴서 저택에 없었다. 그래도 오늘부터 침실을 합쳐 같이 지낼 거라고, 넨시가 치장을 도와주며 그랬다.
“로렌디스가 지시했나요?”
“시야에 놓아야 안심이 될 듯해서.”
“당신은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 보듯 하네요.”
“네가 아이였다면 차라리 속이라도 편하지.”
로렌디스가 침의 차림으로 가까이 다가서더니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안쪽으로 가자 양주를 담아 둔 서랍장이 나왔다.
“아이라면 어리니까 그렇다고 이해하더라도, 너는 아이가 아닌데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거든. 술 먹겠나? 아, 먹으면…….”
“좋아요.”
“무슨…….”
“나를 환자처럼 보지 마세요. 그러면 제가 조금 비관적으로 변할 듯하거든요. 평소처럼 지내 주세요.”
어색하게 목덜미를 긁적이는데, 로렌디스가 또 독주를 꺼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제도 타운하우스에서 하룻밤 지낼 때도 그는 자기 전에 독주를 꺼내 마셨다.
‘자기 전 습관이었나.’
반년 전에는 어땠더라. 그때도 독주를 꺼내 마신 기억은 없는데, 내가 잊었나. 초야 날에도 하녀들이 마련해 준 포도주로 가볍게 목만 축이는 수준이었다.
로렌디스는 신문을 펼쳐 두고 크리스털 잔에 양주를 반쯤 따랐다. 그 모습을 보며 캐서린은 그 맞은편에서 여행 책자를 펼쳤다.
“술은 원래 자주 드세요?”
“보통 전장에서 오면 자주 찾지.”
그는 컵을 한 손으로 쥐고 독주를 입안에 넣었다. 쓴맛이 목구멍을 어지럽게 할퀴는 와중에도, 그는 독주를 한 번 더 컵에 따랐다. 곧은 손가락이 크리스털 잔을 내려 두고, 신문을 한 장 더 넘겼다.
“왜 그렇게 전장에서만 머물렀어요?”
“헬렌은 국경선에 맞닿아 있어서 다른 도리가 없어. 내가 게을러지면, 영지민의 안전과 직결되니까.”
헬렌은 야만족과의 국경선이 맞닿아 있어서 그로 인한 충돌이 잦다. 북부는 춥고 험난한 지역이라서, 식량 수급으로 문제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헬렌의 지하에는 지하자원이 많았고, 헬렌에는 그 자원을 다시 재가공할 기술력이 있어서 꾸준히 발달해 왔다. 다만, 그렇지 못한 야만족은 헬렌의 땅을 자주 탐했고 그 일로 이제껏 충돌이 이어졌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나 혼자만 하는 고생이 아니니까 당연히 짊어져야 할 책임이자 의무이지.”
“헬렌은 좋은 주인을 뒀어요.”
이런 로렌디스가 있기에 헬렌도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다.
로렌디스는 고요히 침묵했다.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 곱씹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너는 꼭 남 일이라도 이야기하듯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