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침대에 멀뚱히 누워서 지내길 얼마.
캐서린도 슬슬 지루함에 시달렸다. 삶이 무기력해도 자의로 침실에서 지내는 것과 타의로 갇혀 지내는 건 달랐다.
무엇보다 데니스가 울먹거리며 캐서린을 볼 때마다, 그 시선이 못내 불편했다. 저 사람은 왜 사람을 볼 때마다 울어서는…….
그래서 잠깐이나마 그 시야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데니스에게 허락을 맡고 외출을 나섰다. 로렌디스에게는 다녀온다며 이야기만 꺼내 둔 게 다였다.
‘며칠 전부터 더 서먹해졌는데 어떡하지?’
하긴 처음부터 이러는 게 맞았다.
‘최근 며칠 사이에 부쩍 가까워진 게 더 이상할 노릇이지.’
로렌디스는 캐서린이 시한부로 죽을 때쯤 돼서야 전장에서 귀환하고, 그 뒤로도 잊은 듯 지냈다.
캐서린이 엿본 미래는 그랬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이 죽기 몇 달 전에야 다시 만나서, 서로 잊은 듯 지내다 장례식장에서나 재회할 인연이었다. 그런 인연이 왜 지금에서야 깊어지는지.
‘이대로 서로에게 잊히는 게 나은데…….’
캐서린은 마른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 해서 영지의 중앙광장을 찾은 참이었다. 푸른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높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에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제는 어쩌자고…….”
넨시가 난처하게 되물었다.
“마님, 무슨 일 있으세요?”
“왜?”
“바깥에 나오셨는데도 전혀 기뻐 보이지 않으시니까요. 새로 옷이라도 맞출까요? 아니면, 보석을 맞춰도 좋겠습니다. 기분 전환이라도 한번 해 보세요.”
넨시가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넨시는 아직 캐서린이 어떤지 잘 모른다. 아직 진료동의 몇몇 사람과 로렌디스를 제외하고는 외부적으로는 비밀이었다.
‘나중에는 다 이야기해야겠지만.’
캐서린은 길 잃은 고양이처럼 헬렌 거리를 서성였다. 내딛는 걸음걸음이 가볍고 깃털 같았다.
‘억제제와 진통제가 효험이 좋긴 하구나.’
배시시 웃는데 작은 소란이 들려온다.
그 거리감도 제법 가까운데, 캐서린이 그 출처를 알아차렸을 무렵…… 표정은 극단적으로 차가워졌다.
‘에밀리 밀던.’
캐서린의 의붓언니였다.
기분 나쁘리만큼 붉은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서 빛났다. 새초롬하게 접힌 눈매는 곱게 웃고, 부채를 펄럭이며 입가를 가리는 솜씨는 시골 촌녀라 보기 어려웠다.
“저, 저 여자가 왜! 마님, 다른 길로 모시겠습니다.”
“가족과는 한 번 마주칠 것 같긴 했는데……. 넨시가 보기엔 어때. 우리 언니 얼굴에 기쁨이 가득하니?”
언니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해서 괜한 심술이 났다.
“마, 마님 송구합니다.”
“밀던가의 누구도 월계수의 성문을 넘지 못한다고 이야기 들었는데, 혹시 내가 잘못 알았어?”
“맞습니다! 내성까지는 접근하지 못합니다. 다만, 헬렌의 도심지는 외성이고 개방적으로 열린 곳이라 따로 제한하지…….”
캐서린은 턱을 느릿하게 더듬거렸다. 에밀리는 심지가 약한 아이다. 꼿꼿하고 새침해 보여도, 속은 맹탕이며 작고 사소한 일이더라도 스스로 해결 보지 못하며, 꼭 누군가 통해 대신 해결해 주길 바랐다.
‘이제 슬슬 찾아올 때가 됐다고 여겼는데…….’
계모가 헬렌으로 보내오던 편지도 끊겼다. 그래서 자작가의 소식을 잊고 지냈다.
어차피 자작가는 캐서린에게 남겨진 마지막 유산이니까. 늦더라도 밀던에 깃든 모든 게 캐서린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들은 여전했다. 캐서린이 가장 싫어하는 짓으로, 그 이름을 또 써먹었다.
“제 부족한 동생이지만 예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너는 나를 가족으로 여긴 적 없으면서도,
그 이름을 잘도 써먹는다.
가족들과 다시 보면 어떨까. 서러움으로 분노가 치솟을까? 애석하게도 아니다. 공허함만 남았다.
“마님.”
넨시가 캐서린에게 매달린다. 캐서린은 약한 손짓으로 넨시를 떨쳤다.
“너무 걱정하지 마. 어차피 한 번 다시 봐야 할 인연이었으니까.”
“아이고. 아이고……. 저는 마님께서 또 상처받으실까 걱정하는 겁니다.”
너는 여전하다. 내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서, 내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하게 웃는다. 그 웃음소리가 여기까지도 들려온다.
“밀던 영애와 헬렌 부인은 그럼 자매지간인가요?”
“그럼요. 사이는 조금 서먹하답니다. 그래도, 어디 가족이란 게 떼어 놓는다고 떼어지나요? 먼 곳에 동생을 보내 두고 걱정이 컸어요.”
거기서 우리는 사이좋은 자매가 된다. 지금처럼 말이다. 언니는 오늘도 사이좋은 자매지간을 연기했다.
흰 드레스가 너풀거리며 바닥에 끌렸다. 캐서린은 긴 금발을 쓸어 넘기며, 에밀리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캐빈 백작 일은 이제 없던 일이 되었지만.’
그 일은 캐서린이 직접 이야기해 봤자, 헬렌 부인의 입지만 나빠진다. 그래도, 살사초 일은 남았다.
에밀리도 먼 거리에서 캐서린을 돌아봤다. 피가 안 섞인 가족이지만, 거지 같게도 서로를 알아본다.
세상…… 기분이 더럽다.
캐서린은 화사하게 웃었다. 이제는 잃을 것도 남지 않은 아이의 마지막 미소였다.
“제 언니와 즐거운 담소를 나누고 계시네요?”
“헬, 헬렌 부인!”
“제가 사교 모임을 주최하지 않으니, 여러분과 얼굴을 마주 볼 기회가 잘 없었답니다. 이렇게 보니 반가워요.”
적당한 거리감에 포근함을 섞었다.
“언니는 너무 오랜만이에요.”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니?”
에밀리는 눈을 부릅뜨며 뒷걸음쳤다.
“언니도 참. 제가 헬렌에 있는 게 어디 놀랄 일이던가요. 나는 헬렌의 이름 아래에 서 있어요.”
“그, 그래. 반가워. 캐서린, 더 예뻐져서 못 알아볼 뻔했어.”
“가족들과 너무 갑자기 헤어져서 아쉬웠어요. 제 결혼이 갑작스럽긴 했으니까요.”
여유로움은 기품이 되고, 그건 또다시 은은한 압박감이 됐다. 초탈한 표정에서는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결혼하더니 이제 시골집은 잊고 지냈니? 어머니께서 서운해해. 사랑하는 동생아, 자작가를 잊어버리면 어쩌니. 우리가 비록…….”
“밀던은 제 모든 것이에요. 그 연을 어떻게 끊어요.”
캐서린은 에밀리와 손을 맞잡았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손아귀가 파르르 떨리고, 꽉 움켜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어머니께서는 어디 계세요?”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계셔. 이참에 어머니께 인사라도 올리렴.”
에밀리는 조용했다. 캐서린을 보는 시선이 어쩐 일로 나긋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언니도 이미 다 아는구나.’
곧 죽을 동생에게 보여 주는 마지막 가족애인가?
보란 듯이 웃는 그 모습에, 죄책감도 사그라든다. 언니는 방관자이지만 방관자이기 때문에 피해 가지 못한다.
우리 심약한 언니. 에밀리 밀던. 캐서린은 속으로 은은히 웃으며 에밀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밀리의 어깨에 턱을 괴고 미소 짓자, 에밀리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캐, 서린 네가 가족이 많이 그리웠구나.”
“으응. 제가 요즘 몸이 아파서 가족들에게 편지도 제대로 못 보냈어요. 대신, 나중에 꼭 초대할게요. 내성은 넓고 아름다워요. 언니 마음에도 들 거예요.”
에밀리가 환히 웃는다. 아프다는 이야기에도 ‘그랬니?’라고 환히 웃으며 캐서린을 꽉 끌어안았다.
“꼭 다시 뵈어요. 언니.”
캐서린은 은은히 웃었다.
조금은 서글퍼진다.
* * *
로렌디스는 커프스단추를 풀어서 보관함에 넣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커프스단추는 조명을 받으면 빛을 머금고 푸르게 반짝거렸다.
“아내는?”
“마님께서는 지금 외출하셨습니다. 마님께서 사람을 보내 말씀드렸다는데 듣지 못했습니까?”
“지나가듯 들은 것 같다. 그런데 이미 올 시간이 됐는데 왜 안 오지? 외출이 너무 길어지는 게 아닌가?”
브레디가 눈살을 옅게 찌푸리며 답했다.
“아직 해도 떨어지기 전입니다. 오랜만에 외출하신 분인데 너무 닦달하지 마십시오. 데니스 교수께서도 마님은 마음을 치료하는 게 우선이라 하셨잖습니까?”
몸이 아프면 치료를 받고 쉬는 게 좋겠지만, 주인마님은 그 마음부터 단단히 가꾸는 게 먼저였다. 그 부분을 직접 지적한 게 데니스 교수였다.
“그리고 또, 각하……. 마님과 싸우셨습니까?”
“그건 왜?”
“마님께서 외출하실 때 표정이 어둡더군요. 각하께서는 화내실 때 주의 좀 하십시오. 전장에서 뒹구는 전사들이야 빽빽 소리 질러도 괜찮다지만, 마님은 아니십니다.”
제복을 벗으려던 로렌디스는 멈칫하며 제복을 다시 갖춰 입었다.
“화해하러 가십니까?”
“싸운 적도 없어.”
그럼 서먹한 분위기나 좀 풀어 주십시오. 주인 내외가 서로 내외하면, 아랫것들이 더 눈치 보는 법입니다. 브레디가 조심스럽게 첨언했고, 로렌디스도 알아듣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날 저녁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그날, 제 상관은 분노가 극에 달해 마님을 쏘아붙였다.
* * *
하늘에 먹구름이 꼈다. 캐서린은 어두운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눈과 비가 섞여 내렸다.
그 쌀쌀함에 살갗이 아려 왔다. 기둥에 기대서 찬바람을 쐬는데, 뽀얀 피부가 오늘따라 유난히 창백하게 질려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녀들은 발만 동동 굴리며 속닥거렸다.
“가족분과는 무슨 말씀을…….”
“바깥에 다녀온 뒤로 저러십니다.”
“누가 마님 좀 말려 보십시오. 진료동 사람들도 다들 안절부절못하잖습니까?”
하녀들의 시름이 깊어졌다. 내성의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주인 내외의 말수가 적어지며 더 그랬다.
캐서린도 손바닥을 처마 밑으로 내밀고 흰 눈송이를 잡았다. 눈송이가 빗물과 섞여서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님, 여기서 이러시다간 경을 치십니다!”
하녀들의 숨이 고요히 멎었다. ‘어이쿠. 일 났다.’라고 중얼거리던 이들은 죽은 듯 몸을 납작 숙였다.
눈과 비가 뒤섞여 추적추적 내렸다. 로렌디스가 검은 제복 차림으로 길목을 지나던 길이었고, 보좌관도 동행한 참이었다.
“미쳤나?”
로렌디스는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