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그 모든 것을 천천히 눈에 담아낸 로렌디스의 시선이 캐서린에게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왜, 왜 말하지 않았지?”
“아아, 그게요.”
“그 몸속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지 아나? 헬렌을 떠난다고 네 입으로 이야기하더니, 지금 그런 몸으로 헬렌을 떠난다고 이야기했나?”
그건, 나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르리라 여겼으니까. 남편은 냉혈한이었고, 헬렌을 떠나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울 예정이었고, 우리는 이혼할 예정이었으니까.
캐서린만 떠난다면 끝까지 숨길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 모든 예상도 로렌디스가 전쟁을 반년이나 일찍 끝낸 탓에 어그러졌지만.
“주, 주인님……. 주인님, 쿨럭, 마님을, 마님을 그리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모두 비워 두라 했던 복도에 작은 발걸음이 울렸다. 그리고 그 끝에, 복도를 기어온 데니스 교수가 서 있었다.
“인사 올립니다. 검,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만, 마님 송구합니다. 그 결과가 늦어서 이제야 찾아뵙습니다.”
지난번에 진행한 피검사의 결과가 나왔다. 그 검사지는 예전에 비슷하게 본 기억이 난다. 한라원의 제임스 박사가 보여 준 진단서와 비슷했다.
그때는 제임스 박사의 악필로 대충 내용을 짐작하는 수준이었고, 지금은 또박또박 적힌 글씨로 캐서린이 시한부라는 사실을 확인받았다.
“마님의 혈액에서 아주 미약하지만 중독반응이 나왔습니다. 그건, 독에 노출됐다는 뜻인데…….”
데니스는 품에서 각종 처방전을 부랴부랴 꺼냈다. 넋이 나간 표정을 보아하니, 본인도 뭘 챙겨 온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노출됐습니다. 이유를 모르시겠습니까? 독 반응도 미약합니다. 이래서는 그 몸이 어떤 독에 노출됐는지 알기도 힘듭니다.”
다행이다. 이들은 모른다. 그저, 미약한 독 반응을 잡아낸 게 다였다. 살사초는 이들 세계에서 희귀한 독초이다.
“마님은 왜 그리도 초연하십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니까. 더 놀랄 일도 더 슬퍼할 일도 없다. 캐서린은 조금 씁쓸하고 무기력할 뿐이다. 그렇다고 그게 당신들이 눈물지을 일은 아니고, 슬퍼할 일도 아니다.
“혹시.”
로렌디스는 그 표정에 담긴 의미를 단번에 읽어 냈다. 그 의미가 아주 거슬린다는 듯, 눈살까지 왈칵 찌푸렸다.
“이미 알았나?”
“…….”
“사람이 왜 그리 무모하지? 미리 알았다면 이야기해서 도움을 청해야지 혼자서 끙끙 앓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복도를 비운 이유는 짐작이 된다. 이제 데니스가 캐서린에게 선고를 내릴 것이다. 두 번째로 받는 시한부 선고였다.
“우연히, 외부 의사를 만나서 거기서 진료를 받았어요.”
“왜 외부 의사를 찾았습니까?”
데니스가 울먹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저를 믿지 못했습니까?”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부터 데니스에게 몸을 보이고, 혹시나 문제가 된다면 이 결혼은 처음부터 엎어졌을 거니까요.”
로렌디스에게도 결혼이 필요했듯, 캐서린에게도 이 결혼이 필요했다. 그래서 서로를 이용했고, 오늘부로 그 이용가치는 다했다.
“그 사실을 왜 알리지 않았어?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치료할 시기를 더 앞당길 수도 있었잖아.”
“결혼 전에 알리면 결혼을 안 해 주실 듯 하고, 결혼 후에 알리면 이혼을 안 해 주실 듯하니까.”
나긋나긋하게 속삭이는 말은 로렌디스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고 가냘팠다. 데니스 교수가 큼큼 목을 고르더니 검사 결과를 읊었다.
“피검사 결과에서 독성 반응, 즉 중독 반응이 나왔습니다. 너무 큰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직 어떤 독인지 모를 뿐이지 독만 안다면 해독제를 찾으면 될 일입니다.”
그게 안 된다면, 데니스 교수의 말끝이 길어진다.
“데니스, 나도 알아요. 내겐 시간이 없고 그건 때론 포기를 요구해요.”
“마님……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당신들도 이미 안다. 캐서린에게는 시간이 없다. 그런 캐서린에게 허락된 건 포기뿐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에 미련이 없다는 건, 캐서린에게는 그런 미련을 가질 기회조차 없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둘의 인연이 거기까지라는 뜻이다. 캐서린은 아직 헬렌에 마음도 주지 않았으며, 헬렌을 떠날 마음밖에 없다.
“데니스, 저는 이미 밖에서 진료를 받았어요.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이 어렵다더라고요.”
“아닙니다. 바깥에서 어떤 의사를 뵀을지 모르지만, 그놈이 잘못 본 겁니다. 마님, 희망을 놓지 마시옵소서.”
로렌디스와는 결혼식과 동시에 헤어지고, 며칠 전에 재회한 게 다다. 이런 사이에 인연이나 미련을 논한다는 건…….
“무의미해요.”
“독에 유능한 제자를 불러오겠습니다. 마님께 보이기엔 부끄러운 제자지만, 일단은 찾아는 보겠습니다.”
데니스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사실 데니스 본인도 아직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그놈 자식 더러운 성질머리는 여전할 건데…….
“마님, 마음을 단단히 먹으십시오.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됩니다. 몸도 마음이 건강해야지 낫는 겁니다.”
제 제자들과 할 이야기가 있다며 데니스가 떠났다. 진료동으로 떠나는 그의 뒷모습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굼떴다. 먼 허공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지만, 눈은 웃음 짓지 않는다. 흰 가운을 입은 뒷모습이 유난히 씁쓸해 보인다.
“그간 아픈데…… 내가 자리를 비웠나?”
“그게요, 저 아픈 건 아니었어요. 아프면 모르겠는데 솔직히 아픈 것도 없고…… 조금 무기력한 정도였거든요.”
로렌디스가 답답한지 크라바트를 풀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늘게 뜬 눈이 캐서린을 내려다본다. 캐서린을 무심히 스치듯 지나가는 시선은 언뜻 보기에도 굳어 있었다.
“이혼해 주시면 안 돼요? 조용히 떠날게요. 나, 진짜 조용히 지낼 수 있어요.”
“캐서린 헬렌. 나를 화나게 하지 마. 그 몸으로 떠나긴 어딜 떠나. 사람이 왜 이렇게 초연한지……. 차라리 울던가.”
서툰 말솜씨와 진심으로 화가 난 듯 보이는 표정까지. 캐서린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한기가 가득했다. 그건 실망이었을까. 허망함이었을까.
“이혼을 또 입에 담으려거든 그만둬.”
“제 이야기부터 좀…….”
“너는 예전부터 이혼을 쉽게 입에 담더라.”
그는 캐서린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표정을 찌푸렸다.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시렸다. 그는 차갑게 시선을 내리뜨고 눈짓을 흘겼다. 그러고는 입술을 조용히 다물었다.
“그쯤 해 둬.”
그 순간에도 이미 직감했다. 그는 캐서린을 놓아줄 마음이 없다.
* * *
데니스는 엄숙한 표정으로 로렌디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책임지고 살려 내겠습니다.”
그건 데니스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마님께서는 모든 걸 내려놓은 듯 초연하게 굴지만, 그 마음속은 다 곪아서 병들었을 것이다.
“위중한가?”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제가 목숨을 걸고 마님을 살려 내리라는 겁니다. 그러니 각하께서도 저를 믿어 주십시오.”
왠지 치료가 가능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건 제 목숨을 내건 다짐이었다. 데니스는 입술을 깨물고 간청했다.
“마님께서는 마음이 약하신 분입니다. 그분 앞에서 그분을 환자로만 보지 마십시오. 그분은 몸도 몸이지만 지금 마음속까지 다 곪아서 병들었을 겁니다.”
그런 분께 동정심은 금물이다. 스스로를 비관하지 않도록, 곁에서 붙잡아 주어야 한다. 각하께서 그런 게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마님께서는 생에 무기력하십니다. 그런 분을 치료하려면, 마음부터 다잡아야 합니다. 그러니 마님께서 스스로를 놓지 못하게끔 각하께서 도와주십시오.”
데니스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했다. 마님께서 약해지셨으면 각하께서 곁에서 그분을 붙잡아 주셔야 합니다.
로렌디스는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다. 매캐한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퍼졌다.
“따로 조심해야 할 건 없나?”
데니스는 멈칫하더니 심사숙고하며 이야기했다.
“마님은 병에 걸린 게 아닙니다. 그냥 해독제만 찾으면 됩니다. 하여간 이상한 독입니다. 그 미약한 독이 이만큼 쌓이려면, 도대체 얼마나 노출돼야 가능한지…….”
“생명에는?”
“지장 없게끔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1년짜리 계약으로 맺은 결혼이었다. 캐서린은 처음부터 이별을 입에 담았으며, 어딘가로 떠날 사람처럼 지냈다.
‘답답하군.’
처음부터 허울뿐인 아내를 데려다 놓으려고 맺은 결혼이었다. 로렌디스는 전장에 오를 예정이었고, 결혼식 뒤로 서로를 지나치듯 떠나보냈으니까.
“그, 제자라는 아이 데려다 놔.”
“금방 데려다 놓겠습니다.”
데니스는 주섬주섬 몸을 추슬러 자리를 비켰다.
* * *
캐서린은 잔디밭에 멀뚱히 누워서 마른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우 모피로 된 망토를 덮고 누워 있는데, 브레디가 웅얼거리며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마른하늘을 올려다보는 중이었어요.”
“그런 세상 처연한 표정으로 마른하늘을 올려다보면 꼭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캐서린은 이 사람이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곰곰이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나 아프다고 걱정하세요?”
“당연히 걱정되지요.”
“브레디, 부디 나를 동정하지 마세요. 나도 나름 안락하게 지내고 있어요. 솔직히 헬렌을 떠난다면 그게 더 안락하겠지만…….”
로렌디스가 그리 두지 않을 게 보이니까, 일단은 헬렌에 머무르는 중이다. 몸이 무기력하고 게을러진 건 맞지만 아프거나 슬픈 건 아니다.
“나는 지금도 행복해요.”
“마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나는 행복하게 지내는데 당신들이 나를 동정해 버리면 내가 불운한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내 앞에서 나를 동정하지 마세요.”
캐서린은 고요히 속삭였다. 그리고 시선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그 시선은 집무실에 있는 로렌디스에게 가서 닿았다.
“각하께서 저기 갯지렁이처럼 누워 계시는 마님을 데려다 방에 가져다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픽 웃어 버렸다. 이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캐서린을 감쌌으면, 그게 더 불편했을 것이다. 그 슬픔은 캐서린에게도 전해지니까. 차라리 지금처럼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지켜봐 주는 게 캐서린으로서도 좋았다.
“네. 갯지렁이는 이만 침실로 갈게요.”
브레디는 ‘그게 웃기십니까?’라고 캐서린을 이상하게 흘긋거렸다. 캐서린은 시한부이지만 그 사실에 우울하게 비관하지 않는다. 그런 캐서린 앞에서 울먹거리며 슬퍼하면, 그게 더 캐서린에게는 못 할 짓이었다.
“웃어 주세요.”
“제가 어떻게…….”
“저, 지금 아파 보이나요?”
브레디는 아리송하게 캐서린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픈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나는 아직 아프지 않고 잘 버텨내고 있는데 브레디가 나를 동정하면, 내가 곧 죽을 사람이라도 된 것 같거든요.”
그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직접 산송장 취급 하는 사람을 봐 버리면 스스로도 불편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