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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22)화 (22/129)

22.

저택에는 여벌용 실내복이 마련되어 있었다. 저택 곳곳에서 하녀들의 손길이 곳곳에 머문 게 느껴졌다.

제도는 제국의 권세가 자제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저택의 외향부터 내부 시설까지, 사람들 시선에 닿는 모든 곳이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그런 피곤한 곳이 제도이며, 로렌디스는 피로감에 찌든 표정으로 침실에 누웠다.

“여기는…….”

“부부침실은 하나야. 여기서 그냥 자.”

이제 와 이야기하면 로렌디스와 캐서린은 지난 초야 뒤로 함께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 그간 로렌디스가 전리품과 전쟁 수습으로 바빴던 탓에, 캐서린도 거의 혼자 지냈다. 지금, 이런 그림은 반년 만이었다.

“손님용 방에 가서 자면, 제도의 귀족들 귀에 들어가기까지 하루면 충분해. 헬렌의 타운하우스라도 그 모든 눈과 귀를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헬렌 안에서 하는 통제와 헬렌 밖에서 하는 통제가 다른 건 어쩔 도리가 없다. 헬렌은 그의 영역이지만, 제도는 황실의 영역이었다.

“나랑 같이 자도 괜찮겠어요?”

처음에는 손님용 객실이 있다니까 거기서 잘까 했었다. 우리가 처음부터 가까웠던 사이는 아니니까.

“나랑 같이 자면, 당신이 불편할 거예요.”

“헬렌에서 부부가 같은 침실을 쓰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야. 헬렌에 가서도 침실은 합칠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그간 혼자 잘 잤잖아요?”

“그땐 내가 없었고 지금은 내가 있으니까. 예전에 이야기했었잖아. 헬렌은 부부가 같은 침실을 쓰고, 그건 아무리 사이가 나쁜 부부더라도 마찬가지야. 헬렌은 기본적으로 합방을 원칙으로 하거든.”

이왕 여기서 자는 거면, 이부자리를 펴는 게 나으려나. 이불을 긁어모아서 침대에 눕자, 로렌디스가 맞은편 소파에 기댔다.

“나랑 진짜 그렇게 지낼 거예요? 나더러 눈에 띄지 말라더니…… 이렇게 자주 부딪치면 당신이 나를 더 신경 쓰게 되잖아요.”

우리가 일반적인 부부면 이해한다. 정략결혼으로 묶여 서로의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행하는 귀족들의 표본이면 몰라. 내게는 그럴 의지도 그럴 여유도 없다고. 신경 쓰지 말게 하랬잖아. 거슬리지 말랬잖아.

당신이 이렇게 거리를 좁히면, 그 시야에서 벗어나는 게 불가능해지잖아. 캐서린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둑해지고, 로렌디스는 덤덤해졌다.

“그때와는 달라졌어.”

“어째서요?”

“당신이 신경 쓰여서.”

그는 단조롭게 일축했다. 여기서 이혼을 바라는 건 캐서린 헬렌, 그녀 혼자였다.

“이혼은, 안 해 주세요?”

예전에도 몇 번 꺼냈지만, 못다한 이야기였다. 캐서린이 이혼 이야기를 꺼내면, 로렌디스에게 몇 번이고 가로막혔다. 지금도 이혼을 논하기에는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로렌디스가 독주를 따서 따랐다. 검은색 양주병에 든 독주는 맞은편에 있는 캐서린에게까지 독한 향이 날 만큼, 도수가 높았다.

“너는 왜 내가 이혼해 주리라 믿어?”

“처음부터 그런 계약이었으니까요.”

“그냥 지금처럼 지낼 마음은 없어? 왜 계속 끝을 논해. 왜 끝만 보고 있느냐고.”

캐서린도 안다. 계약이지만 계약서는 없다. 그게 가장 난해한 부분이었다. 계약이라 해 두고 그걸 보증하는 계약서도, 증인도 없다.

‘계약서가 없으니 그걸 공증할 서류조차 없고.’

로렌디스가 이혼을 거부하면 어떡하지. 이건 어느 순간부터 예상해 오던 일이었지만, 캐서린이 의식적으로 피해 온 사항이었다.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해요, 로렌디스. 우리 대화 좀…….”

“너는 그 기간 1년도 채워 내지 못하고 이혼을 논하면서 내게 대화가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정작 대화가 부족한 건 너였지.”

이 사람과는 재회부터 삐거덕거린다. 우리, 지금 잘못된 길 걷는 게 맞지? 어디서 잘못됐는지 알고 바로잡는다면 좋으련만.

곧 죽을 예정인데 이혼해서 요양지부터 찾는 게 먼저지, 이 사람 설득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어딨어. 캐서린은 점점 더 다급해지고, 로렌디스는 점점 더 삭막해졌다.

“계약 기간은 1년이었어. 이제 반년 지났고, 그 남은 기한은 네게 쓸모없으니 관두자는 뜻인가? 이제 다 써먹었으니 씹어 먹고 뱉는다라. 아무렴 어때. 아직 기간은 유효하니, 계약사항을 이행해. 헬렌에서 의무와 책무를 다해.”

“그럼 그 이후는요?”

그는 이번에도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침묵으로 답했다. 나중에는 캐서린을 빤히 보더니 한쪽 눈을 약하게 찌푸렸다.

“어디 아파?”

“아닌데요……?”

저 말, 이미 한 번 듣고 두 번째다. 그것도 타운하우스로 오는 길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무신경한 표정은 여전했다.

당신이 무신경해서 다행이야. 그럼 당신은 왜 이혼을 거부할까. 그저 계약 기간이 남았다고, 그 이유가 다일까?

“1년간은 헬렌에서 지내. 그리고 그 몸이 이상하면 이상한 대로 진단받고. 아픈 환자를 밖으로 내몰 수 없으니까.”

“나 좋아하지 않는다면서요.”

“그것과 별개로 1년간의 계약은 계약이니까.”

아직은 기한이 더 남았지만, 그 기한이 끝난다고 그가 나를 놓아줄까……. 이 또한 불투명하다.

“너랑 이야기하면 꼭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아.”

그만큼 우리 대화가 지금 도돌이표로 걷고 있다는 뜻이다.

“헤어질 사이에 굳이 살 맞대며 지낸다는 게…….”

“살 맞대며 지내는 건 감정 없이도 가능해.”

그의 손아귀가 뺨을 감싼다. 이 사람 손이 원래 이만큼 거칠었나? 딱딱하게 박인 굳은살과 굵직한 손가락이 어색했다. 손바닥 안쪽까지 딱딱하게 박인 굳은살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가 어쩔지 가만히 놔뒀다.

살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점점 가까워져 오는 그 모습에 대수롭지 않게 버텼지만, 눈 밑이 가녀리게 떨렸다. 로렌디스가 언뜻 웃었다.

“그리고 나는 너와 이렇게 지낼 거야.”

미친 짓이다. 이건 미친 짓이다. 여린 눈가가 붉어지며 눈시울이 따끔해졌다. 얘는, 나랑 어쩌려는 건데, 어쩌고 싶은데…….

“이혼해 줄 마음,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는 이번에도 답해 주지 않는다. 이불을 덮고 그런 그를 빤히 보는데, 로렌디스의 시선이 캐서린에게 머물렀다.

“헬렌에 도착하면 네 몸부터 확인하고, 그다음 일은 그 이후에 논의하자.”

텅 빈 크리스털글라스가 그의 손아귀 아래서 깨졌다. 쯧, 하며 그의 시선도 미약하게나마 찌푸려졌다.

전쟁터만 떠돌더니 힘도 무식하게 좋아지셨나. 캐서린의 눈동자가 아련하게 잠겼다. 타운하우스에서의 하루가 저물었다.

* * *

데니스 교수는 여전히 진료동에서 지내는 중이었고, 다행스럽게도 그다음 날까지도 데니스 교수는 결론을 내놓지 못했다.

“마님, 송구합니다. 이 검사를 제가 단독으로 진행하니까 시일이 더 걸립니다.”

하루빨리 결과를 내온다던 데니스는 며칠간 조용했고, 캐서린도 잠깐이나마 긴장을 놓았다. 며칠이 지났다. 하긴, 제임스 박사가 결과를 내오기까지도 일주일이 걸렸으니까. 이번에도 비슷하려나.

“어어……. 실수했네.”

그날은 유난히 바쁜 날이었다. 황궁에 다녀오고, 캐서린도 넋을 반쯤 빼두고 지냈더니 그게 화근이었다. 파란 약통 빨간 약통을 두 손에 쥐어 보았다.

‘억제제를 또 안 먹었어.’

타운하우스에 다녀오며 억제제를 한 번 빼먹고, 이번에도 억제제를 빼먹었다. 손수건으로 코밑을 닦자 핏물이 비쳤다. 하아, 미치겠네. 넋 빼두고 지내다가 애먼 수명만 더 줄일 뻔했잖아. 아닌가. 이미 줄었나?

아픈 기색은 모두 지워 냈고, 아무도 보지 못했다.

“한 번 더 넋 빼두면 목숨 내놓아야 할지도 몰라.”

그리고 그날, 데니스 교수가 캐서린을 찾았다.

“마님. 데니스 님께서 마님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또, 주인님께서도 마님을 찾으시고요. 두 분 다 애걸복걸하십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른 아침부터 넨시가 캐서린 곁을 서성였다. 캐서린은 뜨끔해서 되물었다.

“그들이 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진료동이 아주 음울합니다.”

이른 시간부터 두 사람이 찾아올 일이면 하나다. 데니스 교수가 맡은 피검사 결과가 나왔으며, 그 결과가 아주 나빴기 때문이다. 그냥 나쁜 게 아니라 그것도 대단히 나쁜 쪽으로 나왔겠지.

“죄송합니다. 밖이 소란스럽군요.”

그냥 이대로 잊혀서 지내도 좋은데 그게 또 뜻대로 되진 않고. 캐서린이 막 찻잔을 내려 둘 때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캐서린 헬렌!”

로렌디스는 다른 말도 없이 화부터 냈다. 그 짧은 한마디에 담긴 감정은 먹물이라도 푼 듯 탁했다.

당신은 왜 또 화났지. 이게 화낼 일이었나? 아닌데 숨긴 건 맞지만 속인 건 아니잖아. 거짓말로 당신 눈을 속인 적은 없다고. 그런데 왜 꼭 내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마음이 불편한 건데…….

“다 나가.”

“주인님, 그래도 일단 진정하시고……! 마님께서 불안해하시잖습니까? 천천히 말씀부터 나눠 보시는 게…….”

“다 나가라니까. 왜 아직도 거기 서 있나?”

꺼져! 하는 이야기에 넨시가 도망치듯 떠났다. 저 정도로 입담이 거친 사람이 아닌데, 전쟁터에서나 쓸 법한 언사였다.

복도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나가고 나서야,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옷자락을 거칠게 붙잡았다.

“너는 진짜!”

거친 손아귀가 어깨를 움켜쥔다. 여린 살에 손자국이 나고, 쓰라림이 살갗 안속까지 퍼졌다.

“아, 파요. 잠시…….”

로렌디스가 서랍장 아래에 숨겨 둔 쓰레기통을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이 회색빛 손수건에 닿는다.

그 속에 묻은 옅은 선분홍빛 자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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