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폐하께서 묻는 말에는 그냥 예의상으로만 답해 드려.”
월계수 문양이 선명히 박힌 마차가 황실의 보안검색대를 가로질렀다. 그 문양을 본 황실 근위대가 곧장 입구를 열어 주었다. 입구에서부터 넓은 화원이 펼쳐졌다. 꽃보다는 굵은 나무를 심어 두어서 말끔하면서도 거대한 느낌을 풍겼다.
“각하, 오셨습니까? 폐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제도에 자주 오십시오. 발길이 너무 뜸하십니다.”
“다 늙은 큰아버님 뭐 볼 게 있다고 자주 오나?”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빈정거리는 것도 아닌, 담소라도 나누듯 심드렁했다. 시종도 기껍게 웃으며 ‘각하께서는 여전하십니다.’라고 넘겼다.
황궁 입구에서부터 선대 황족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왕관을 쓰고 지팡이를 쥔 모습이 근엄했다. 시종이 접견실로 안내하고, 금으로 된 본궁 문이 열렸다.
“헬렌 부부가 들었습니다. 폐하.”
“들어오너라. 그 못난 놈 얼굴 한번 보자꾸나.”
테슬러 발러하드. 테슬러는 발러하드 제국의 5대 황제이자, 발러하드를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이었다.
황제는 긴 시간 발러하드를 통치하며, 노년의 나이에도 그 기품을 잃지 않았다. 짙은 눈매는 여전히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옥좌에 앉은 그는 턱을 괴고서 헬렌 부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실로 오랜만이구나. 헬렌 공작. 그리고 헬렌 부인까지. 얼굴 보기 힘든 두 내외를 번거롭게 발걸음하게 한 건 아닐지 걱정이라오.”
“폐하께 문안 인사 올립니다.”
“헬렌 부인은 그간 건강히 잘 지냈나?”
가벼운 안부부터 나눴다. 옥좌를 톡톡 두들기는 손짓은 권태로웠다. 진갈색 머리카락 사이사이 흰 머리가 보였다. 눈매에도 주름이 졌지만, 인상을 자주 쓰는지 미간과 눈꼬리만 유난히 도드라졌다. 깊게 파인 주름이 한 번 더 찌푸려졌다.
“잘 지냈습니다. 황궁에 먼저 인사를 올리러 왔어야 했는데, 헬렌을 자주 벗어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헬렌 공작이 전장을 떠도는데, 헬렌 부인이 헬렌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지.”
테슬러는 별일 아닌 것으로 긴 이야기하지 않는다며 손을 가볍게 저었다. 접견실은 벽 한쪽을 통유리로 채우고, 그 위를 금실이 박힌 커튼으로 가렸다. 벽 한쪽을 차지한 금빛 물결과, 옥좌 뒤로 펼쳐진 제국의 지도까지. 이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넘쳤다.
“발러하드가 이제껏 강대해진 건 헬렌 공작 덕이 크다. 그간의 노고는 크게 보상할 거야. 야만족과의 싸움은 헬렌가에서 이끌었고, 헬렌이 있기에 발러하드가 그간 건재했던 것 또한 사실이지. 헬렌에 큰 훈장을 내려, 제국에서도 그 성의를 보이는 게 옳다.”
“보답을 바란 일이 아닙니다.”
“하긴. 나는 그만하라 했고, 네가 고집부려 떠난 일정이긴 하나…….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이다. 헬렌은 발러하드를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이지. 비록 그 기둥의 잇는 근본이 유지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테슬러가 꼬집는 건 캐서린의 가문이다. 시골의 자작 가문. 가주의 빈자리로 가문은 갈 길 또한 잃었으니, 테슬러는 그 부분을 예리하게 꼬집었다.
“나는 이 혼담에 큰 이견이 없지만, 모두가 나 같은 건 아니오.”
조심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테슬러는 침묵했다. 헬렌에서 로렌디스가 가지는 의미는 상상 이상이어서 이견을 감히 내보이지 못하지만, 다른 제국민은 다르다.
“이 혼담에는 작은 흠도 있어선 안 된다. 기억해 둬. 이 혼담이 처음부터 기이한 면이 있었지. 그게 무엇이든 제자리로 돌려놔.”
폐하. 우리는요, 시작부터 이미 어울리지 않았어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으며, 되돌아오기는 먼 길이고, 폐하께 말씀드리지도 못할 이야기입니다. 그건 작은 흠도 아니고 아주 큰 흠이며, 폐하께서도 크게 진노하실 일이에요.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흘끔 내려다보고 여상한 말투로 답했다.
“소음 나올 일은 없습니다.”
테슬러는 머리를 짚고 탄식했다.
“오만한 놈.”
캐서린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마지못해 다물었다.
로렌디스의 시린 시선이 닿는다. 그 강압적인 시선에 캐서린도 움츠러들었다. 입술을 다물고 한 걸음 물러서자, 테슬러가 시큰둥하게 턱을 괬다.
“헬렌 부인은 이해했지? 저놈은 몰라도, 그대는 내 말뜻을 이해했으리라 믿어.”
“네. 이해했어요.”
“내가 너무 무정하다고 서운해하진 마. 나는 그저 황실의 큰 어른으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을 뿐이니까. 헬렌 부부는 그만 제자리로 돌아들 가. 용건은 끝났다. 이만 나가 보거라.”
테슬러는 삐뚜름했다. 시종장이 이들을 밖으로 이끌고, 로렌디스는 미련 없이 떠났다. 테슬러는 기가 차다며 ‘저놈 보거라. 저놈.’이라고 중얼거렸지만, 이미 그들은 떠난 뒤였다.
테슬러는 혀를 끌끌 찼다. 저 집안 내력이 어디 가겠나. 선대 헬렌공을 닮아서 성질머리 한 번 까다로운 자식이다. 못난 놈. 제 걱정해서 하는 이야기에 눈 한 번 깜빡이지도 않는 매정한 놈.
“썩어 문드러질 자식.”
테슬러의 험담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 * *
“폐하께서는 로렌디스를 크게 아끼시네요.”
‘이 혼담이 처음부터 기이한 면이 있었지. 제자리로 돌려놔.’ 이 결혼은 시작부터 흠집이 가득했다.
“폐하께서도 이혼을 바라시는 듯 보여요.”
“네 편이 생겨서 좋은 모양이네. 그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이는 게, 왠지 불쾌해졌어.”
그간 이혼을 쉽게 여긴 건 곧 다가올 죽음을 알아서지, 남겨질 사람은 생각지 못했다. 몇 달 요양지에서 지내다가 조용히 객사할 예정이었지…….
“몸은?”
“네?”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고.”
헬렌가의 마차는 성문을 막 지나가는 참이었다. 이미 한 번 지나왔듯, 나가는 길목도 말끔했다. 이제 다시 월계수의 성으로 가나, 제도는 처음인데 마차로 그냥 스치듯 보내려나.
발러하드는 발전한 문명사회 같았다. 높은 건물이 드높게 하늘을 찌르지만, 그 모습을 보는 캐서린의 눈동자는 낮게 잠겼다.
“어디 아픈가?”
“아니에요.”
“아프면 이야기해. 아마 내일쯤 가면 데니스 교수도 진단서를 내놓겠지. 그럼 지금 네 표정도 설명될 일이니까, 더 캐묻진 않을게.”
그 목소리는 심드렁했고, 높낮이 하나 없는 그 어조가 그의 무던한 성격을 대변해 주었다. 헬렌가의 마차는 제도를 가로질러 중심가로 들어섰다.
“왜 서둘렀어요? 보통 헬렌을 떠나면 몇 년 동안 떠도는 일이 잦다더니.”
“세상 미련 없어 보이는 아내가 헬렌에서 뭔가 이상한 마음을 품은 듯 보이는데,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둘 수 없으니까.”
캐서린은 표정을 더듬거렸다. 그런 게 표정 밖으로 보이나. 나름 잘 숨긴다고 숨겼는데, 로렌디스에게는 무용지물인 모양이다.
“우리 어디 가요?”
“타운하우스에서 하룻밤 지낼 거야. 피곤해 미치겠군. 더 할 이야기 없으면 잠깐 눈 좀 붙여도 되나?”
“죄송, 해요.”
“됐으니 오늘은 조용히 가지.”
캐서린은 대답 대신 침묵했다.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됐는지, 그는 팔짱을 끼고 머리를 벽에 기댔다.
긴 다리를 꼬고 앉아서 삐딱하게 기댄 모습은 오만했다. 청색 휘장과 홍색 견장을 매단 제복은 빳빳했고, 가죽 구두는 반들반들했다.
“각하.”
그쯤 마차가 멈췄다. 마부석에 오른 브레디가 나지막하게 고했다.
“셀레나 양입니다.”
“누구요?”
“셀레나 소펜 영애라고 각하의 소꿉친구입니다.”
로렌디스는 피곤하다며 눈을 감고 있었고, 캐서린만 커튼을 젖혀 창밖을 살폈다. 그 빛이 거슬린다는 듯 로렌디스가 눈살을 옅게 찌푸렸다.
“됐으니 그만 가.”
창밖 너머로 금빛 머리카락이 아른거렸다. 마차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 그 거리에서도 그 고고한 모습은 또렷하게 보였다. 연노랑 드레스에 양산을 쓴 모습에, 흰 피부와 입술에 맺힌 희미한 미소까지.
셀레나…… 소펜. 익숙한 이름이었다. 소펜, 소펜이 어디더라. 제도에서 유명한 가문이었나. 그 기억을 끄집어내니까 어렴풋이나마 기억난다.
‘셀레나 소펜.’
캐서린이 죽고 로렌디스가 10년 뒤에나 다시 재혼하는 그의 소꿉친구이다.
“인사 나눴으면 됐네요. 이만 가요.”
흐릿한 인상에 초연해 보이는 모습까지. 소펜가이면 나름 권세가인데, 그 집안의 사람치고는 조용한 인상이다.
“이 바로 앞이 타운하우스입니다.”
제도의 타운하우스는 흑청색 대리석으로 된 건물이었다. 헬렌의 월계수 성처럼, 월계수 모양의 대문을 지나자, 저택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화강암이 저택의 입구에서부터 위용을 뽐냈다.
* * *
아주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별일 아니라면 별일이 아니지만, 작은 문제가 생겼다. 하룻밤 잔다는 이야기를 오늘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약이 없다.”
억제제나 진통제를 챙겨 오지 못했다. 제임스 박사가 지난번에 다녀가며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직접 오기 싫다더니, 제임스 박사는 한라원에서 약통을 바리바리 챙겨 몇 번 더 헬렌 저택을 찾았다.
그는 저번에도 그랬듯, 진통제와 억제제를 꺼내서 탁자에 쏟아냈다. 붉은 라벨과 파란 라벨을 붙여서 약병을 구분해 뒀는데, 억제제가 개수로는 더 많았다.
‘너는 조금이라도 더 늦게 죽고 싶거든, 억제제부터 꼬박꼬박 먹어.’
학계에서 쫓겨나며 평판은 바닥을 쳤지만, 책임감까지 나쁜 건 아니란다. 입담이 거칠긴 해도, 음지에서 지낸 까닭이지 싶다. 그땐 저택에서만 지냈으니 대충 흘려들었지만…….
“며칠 빼먹어도 되나?”
헬렌 타운하우스는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웠다. 월계수 성보다는 작았지만, 특유의 몽환적인 그 느낌에는 예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