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데니스 교수의 건물은 내성에서 거리가 좀 있는데, 데니스가 조수들을 직접 키운다 해서 진료동을 따로 내어 줬지.”
데니스가 머무는 진료실은 진료동이라는 이름으로 건물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데니스에게 의료술을 배운다며 찾아온 조수들로 그 규모도 나날이 커져 왔다.
진료동 초입에서부터 씁쓸한 약초 향이 그윽하게 퍼졌다. 로렌디스는 수습 제자들을 지나쳐 데니스 교수의 진료실을 찾았다.
“스승님.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진료실 문이 열렸다. 데니스가 둘을 마중 나왔다. 그는 흰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미리 진료 준비를 끝내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기고 씩 웃는데, 무언가 ‘걸렸다.’라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마님 오셨습니까?”
“진료 준비는 끝냈나?”
데니스가 로렌디스를 안으로 이끌었다. 캐서린은 그 뒤에 서서 가만히 고민했다. 땅 밑으로 꺼지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 이대로 그냥 가만히 숨만 쉬며 쉬고 싶다. 치료는 애당초 포기했다. 제임스에게 받은 억제제로도 충분한데…….
“들어와.”
캐서린이 우두커니 서서 버티자,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안으로 이끌었다. 데니스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며 푸근하게 웃었다.
“앉으십시오. 진료실이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오는 길이 어렵진 않았습니까?”
“곳곳에 데니스의 제자들이 많아서 건물은 어렵지 않게 찾았어요. 로렌디스도 같이 동행해 줬고요.”
캐서린은 진료실 의자 한쪽에 먼저 앉았다. 로렌디스가 벽에 기대서서 캐서린의 어깨를 눌렀다.
그 손짓이 무거웠다. 도망갈 마음이 없는데도, 로렌디스가 뒤에 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압박감이 넘실거렸다.
“각하께서도 마님을 걱정하는 마음에 그러십니다. 전장에서 오래 떠돌면서 마님과 떨어져 보낸 시간이 길었잖습니까? 일단 진료부터 좀 보겠습니다.”
데니스 교수의 진료실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데니스가 직접 본관의 침실까지 와서 캐서린을 진료하고, 약만 처방해서 돌아가는 식이었다.
진료실은 단정하고 지적인 분위기였다. 책꽂이에는 여러 의학 서적이 가득했고, 바닥이나 선반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각하께서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님께서도 요즘 헬렌에 잘 적응하고 계시니, 별일 없을 겁니다.”
데니스 교수는 진중하게 캐서린을 진료했다.
“그럼 피부터 뽑겠습니다.”
“잠……깐, 데니스. 당신을 탓하는 건 아니지만요. 뽑은 뒤에 말씀하는 게 어디 있나요?”
데니스 교수는 뽑아낸 피를 용기에 담아내며 허허허 웃었다. 캐서린이 억울함에 로렌디스를 보자, 로렌디스가 흰 솜을 캐서린에게 건네주며 되물었다.
“꼭 필요한 과정이었나?”
“네. 피검사는 겉으로 보기 힘든 병증을 알아내기에 좋은 방법입니다. 아닌가? 엄밀히는 좋은 방법이라고 누가 예전에 가르쳐 주었습니다. 주사기를 말도 없이 꽂은 건 죄송합니다. 꽂기 전에 말씀드렸으면 마님께서 거절하셨을 듯해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 뒤로도 진료가 이어졌다. 보통은 문답 형식이었고, 데니스는 예전에 했던 질문을 다시 꺼내며 문진했다.
“하하.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결과는 언제쯤…….”
“검사 결과는 일주일쯤 걸립니다. 저도 이런 검사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래도 노력해 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캐서린은 이미 반쯤 마음을 내려놓았다. 아직은 이들도 모른다. 나중에는 알까? 그때 가서도 모를 수도 있다. 나중에라도 알려면 데니스가 살사초라는 약초를 알아야 하는데, 살사초는 음지의 약초이다.
빈민들이 뭣 모르고 먹는 약초라고 제임스 박사가 이미 이야기했다. 즉, 귀족들을 진료해 온 데니스는 모를 확률이 더 높았다.
“그럼 저는 검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찾아뵙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데니스가 우리를 배웅하고, 진료동에서 나와 본관으로 가던 길이었다.
곱게 치장한 드레스는 캐서린의 지위를 보여 주듯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지난 반년간 하녀들은 캐서린을 화려하게 꾸미려 노력했다. 이유는 하나다. 로렌디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캐서린의 입지가 낮아지면 안 되기에.
캐서린은 헬렌의 안주인이었다.
“검사 결과는 곧 나올 거야. 진짜 어디 아픈 건가? 못 보던 사이에 낯빛이 막 흐려진 곳은 없는데. 캐서린, 내가 지금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면, 미리 이야기라도 좀 해 주면 안 되나?”
캐서린은 입술을 한 번 물었다 놓았다.
우리들의 인연은 계약대로 끝내는 게 맞다. 계약은 계약대로. 그건 아주 쉽다. 적당한 거리감만 갖추면 될 일이다.
“로렌디스는 좋은 사람이에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래서 당신이 내게 죄책감을 가지면, 내가 미안해질 것 같아요.”
“내가 무언가를 지금 놓치고 있나?”
“나중에요. 나중에 말씀해 드릴게요.”
어차피 끝날 인연. 가위로 잘라 내듯 매듭만 잘라 내면 언제라도 끊어질 것 같은 인연이다. 마음이 복잡해지면 그 인연도 복잡해진다.
불현듯이 로렌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캐서린을 조목조목 뜯어 보고 있었다. 그 시선 위로 어둑한 감정이 싹텄다.
‘집착.’
그래. 우리 인연은 이미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진 모양이다. 쉽게 끝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 * *
넨시가 상냥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주인님께서 오시고 영지가 활기를 되찾았네요. 마님께서도 기쁘시죠?”
헬렌의 주인이 헬렌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헬렌 내부에서는 아주 기뻐했다. 하녀들의 낯빛도 밝아졌다. 다만, 캐서린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응. 남편이 왔다는 실감이 나더라고.”
처음의 계획이 서서히 어긋났다. 또한, 그 전조증상은 이미 예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첫째, 1년은 걸릴 줄 알았던 정복 전쟁이 너무 일찍 끝났다.
둘째, 그 결과로 로렌디스가 일찍 돌아왔다.
마지막 셋째는 로렌디스가 헬렌으로 오며 저택 곳곳에 그의 시선이 닿기 시작했다. 그 시선의 끝은 늘 캐서린이었다.
“요즘 남편의 간섭이 심해지는 기분인데 착각이려나?”
“주인님께서요?”
“내 남편이 나를 잠시도 혼자 놔두지를 못하잖아. 사람을 시야 아래에 두려는 게 보여.”
넨시는 난처하게 웃었다. 실제로도 로렌디스는 하인들에게 아내를 시야에서 놓치지 말라 이야기해 뒀다. 단순히 아내를 걱정하는 거라기엔 미심쩍었다.
‘괜찮으실까?’
그래도 이 집안의 하인이 돼서 주인에게 의구심을 품는 건 안 된다. 그래서 넨시는 평소처럼 매끄럽게 웃어넘겼다.
“각하께서도 걱정하시는 겁니다. 요즘 통 기운이 없으시니까요.”
캐서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잊을 뻔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로렌디스가 요즘 바쁜 것 같던데.”
“네. 요즘 저녁때만 되면 영지를 시찰하러 떠나십니다.”
“하긴 빈자리가 길었으니까. 확인할 일이 많겠지. 어젯밤에 이어서 오늘 밤에도 안 들어오려나?”
“저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요 며칠간은 바쁠 거라서요.”
로렌디스는 헬렌으로 귀환한 뒤에도 밖으로 출타하는 일이 잦았다. 어젯밤에도 그랬고, 오늘 밤에도 그럴 것 같았다.
헬렌의 부부는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며 이야기를 들은 게 반년 전인데, 우리는 여전히 따로따로 잤다.
“로렌디스가 좀처럼 쉬지를 못하네. 그만큼 북부의 수장으로 자리를 지킨다는 게 힘들다는 거지만, 요즘은 좀 피곤해 보여.”
“그래서 헬렌의 가신들도 걱정이 컸어요. 주인님께서는 워낙 자리를 자주 비우고, 빈자리는 언젠가 커지기 마련이니까요.”
그 부분만큼은 헬렌의 가신들이라면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다. 헬렌이 개집도 아니고 주인이 시시때때로 자리를 비워 버리면 어쩌나. 그러다가 전장에서 별세라도 했다간, 헬렌의 미래는 누가 책임지고. 끌끌.
타당한 이야기다. 황제는 결혼이라도 하면 한곳에 자리 잡을까, 하는 마음으로 결혼 압박을 해 왔다. 그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했다.
“지금이라도 마님을 만났으니 됐어요.”
“나 하나 만났다고 다 해결이라도 된 듯 이야기하면 어떡해.”
“다 해결된 거죠. 혼사 문제도 해결되고 후계 문제도 해결되고.”
넨시는 배시시 웃으며 캐서린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 은근한 손짓에 노곤하게 졸음이 쏟아졌다.
“어제 진료동에 다녀오셨다더니 몸은 괜찮으세요?”
“다들 나만 보면 어디 아픈가 묻는데, 내가 어디 아파 보이나 봐?”
캐서린은 진지하게 넨시를 붙잡고 물었다. 딱히 아픈 곳은 없는데……. 억제제와 진통제로 통증 하나 없이 반년을 지내 와서, 솔직히 지금도 아픈지는 잘 모르겠다.
“마님은 몸이 아프기보다는 마음이 아픈 사람 같아요.”
“어……째서?”
“마님께서 너무 무기력해 보이니까요. 지금도 솔직히 큰 병에 걸린 사람보다는, 마음이 외로워서 스스로를 꾹꾹 감춰 둔 사람 같이 보이거든요.”
주제넘은 이야기로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죄송합니다. 넨시는 캐서린에게 조심스럽게 사과하고 웃었다. 그래도 일부러라도 밝게 이야기하는 게 느껴져서, 거기에서 ‘나 시한부인데요.’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쯤, 집사가 캐서린을 찾았다.
“마님 황실에서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갑자기?”
“아아, 원래는 어제 말씀드려야 했는데 제가 기회를 놓쳤군요.”
집사가 이제야 이야기한다며 조심히 아뢰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입궁하라는 전언이십니다. 각하께서도 오셨으니, 폐하께 이제 얼굴을 비출 때가 됐네요.”
이제는 황실에서까지 이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몸으로 어설픈 연기를 이어 나가란 뜻인가? 지금도 힘든데, 로렌디스 앞에서 숨기기도 급급한데…….
이 어설픈 연기를 절대 들켜선 안 될 황실과의 만남이 가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