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내가 전장을 다녀오는 동안…….”
그의 목소리가 탁하게 내려앉았다.
“그대는 내게서 도망칠 생각만 한 건가?”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 여기서 이혼 이야기라도 꺼냈다간 일이 모두 엎어진다. 캐서린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렸다. 로렌디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머릿속을 통째로 다 읽힌 기분이었다.
“내가 전쟁을 끝내는 동안 그대는 이혼할 생각부터 하고 있었고.”
“공작님께서 전쟁만 끝난다면 모두 내 뜻대로…….”
캐서린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로렌디스가 그런 캐서린을 지적했다.
“로렌디스. 이름을 부르랬더니 왜 계속 호칭이 예전으로 돌아가나? 그리고 내 눈은 또 왜 피하는 거지? 비록 우리가 계약 관계더라도, 어디까지나 혼인을 치른 부부라는 사실을 기억해 둬.”
“미안해요. 로렌디스, 저는 그저 약속대로 계약을 이행하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로렌디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몹쓸 사람이라도 된 것 같다. 마치 우리가 부부 사이였던 과거를 거부하고, 꼭 나 몰라라 한 것 같잖아. 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아직은 헬렌의 이름으로 헬렌에 머무르고 있다. 그럼 헬렌답게 행동하는 게 맞다.
“제가 경솔했어요.”
캐서린은 머리를 긁적이며 로렌디스에게 사과부터 했다.
“당신이 고생한 건 알아요. 그래서 수고했다는 말과 잘 돌아와 주었다는 말부터 하고 싶었어요. 말의 순서가 바뀌었네요.”
로렌디스가 느른하게 이야기했다.
“계약기간은 앞으로 반년 더 남았고, 헬렌은 가벼운 가문이 아니야. 이혼을 함부로 입에 담고, 결혼한 지 한 해도 넘기지 못하고 이혼하는 그런 가벼운 가문과 달라.”
사랑 없는 결혼이라면서.
이해관계만 맞으면 된다면서.
“헬렌은 한평생 한 반려만 만나. 한평생 한 아내만 바라보고 사는 게, 헬렌의 주인이다. 그런 헬렌에서 그대는 너무 이혼을 쉽게 입에 담는군.”
으르렁거리는 포효 소리가 들린다. 이빨을 숨겼지만 날카로운 발톱이 남았다. 심사가 조금만 뒤틀려도, 저 발톱으로 그녀를 할퀼 것 같았다. 몸을…… 몸을 사리자. 이건 생존 본능이었다.
“폐하께서 전언을 보내셨다더군. 기사단이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대로, 제도로 출발할 거니까 알아 둬.”
* * *
집무실 문이 닫혔다. 로렌디스는 갑옷을 벗고, 집사를 불러들였다.
“찾으셨습니까?”
“은밀히 주치의를 불러와라.”
집사가 사색이 돼서 물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내 일로 물어볼 게 있어. 그러니까 조용히 불러와.”
집무실은 본성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집사가 데니스 교수를 부르러 가고, 로렌디스는 탁자를 살폈다.
탁자에는 황궁에 보낼 보고서가 한가득이었다. 그래도 당장 급하게 처리할 안건은 없다. 로렌디스가 의아하게 집무실 책상을 살피자, 보좌관 브레디가 큼큼-하며 설명했다.
“마님께서 대신 처리해 주셨습니다. 아주 유능하신 분입니다.”
“아내가?”
“네. 큰 도움을 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브레디의 말대로였다. 반년 가까이 공작성을 비웠는데도, 업무는 빈틈없이 잘 진행됐다. 유능한 보좌관을 둔 덕에 항상 매끄럽게 업무가 흘러가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물결 같았다. 아무런 막힘도 없이 일이 척척 진행됐다.
“그래서, 아내는 잘 지냈나?”
“마님께서도 잘 지냈습니다. 다만…… 들꽃 같았습니다. 금방 저버릴 들꽃 말입니다. 모두들 그 들꽃이 거기 있는 줄 알면서도, 존재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곧 사라진대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느낌 아십니까?”
아내가 거기 있는 줄은 모두 다 안다. 그 자리에 당연히 있다고 여기면서도, 막상 그 존재감은 너무나 흐릿하다.
로렌디스도 그 느낌에 동의했다. 존재감마저 흐릿한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처연한 느낌이 특히나 그랬지.’
아내는 특별히 눈에 띄지도 또 거슬리지도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잘 지냈다.
“데니스 교수는?”
“불렀으니 곧 올 겁니다.”
데니스 교수가 로렌디스의 부름을 받고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보좌관이 직접 문을 열어 주자, 데니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로렌디스 앞에 납작하게 부복했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로렌디스는 제복 옷깃을 답답하게 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의료 기록지를 가져와라.”
“어디 아프십니까?”
“나 말고. 아내 말이야. 아내의 의료 기록지를 가져와. 지금 당장 확인해야겠어.”
데니스 교수는 손아귀를 주물럭거리며 식은땀을 가운에 닦았다.
헬렌의 기사단은 강인하기로 유명하다. 로렌디스도 어려서부터 자잘한 상처 없이 잘 자랐다. 흔한 감기몸살 한 번 없이 건강하게 자라 준 덕분에, 주치의도 공작성에서 아주 편히 지냈다. 개인진료보다는 개인연구가 더 활발할 지경이었다.
데니스 교수가 재빠르게 인사를 올리고 의료 기록지를 꺼냈다. 로렌디스는 의료 기록지를 확인하는 동안, 데니스 교수가 그간 진단해 온 캐서린의 몸 상태를 전했다.
“마님께서는 아주 허약한 체질입니다. 세상에 이런 유약한 체질이 또 없을 겁니다. 감기기운도 자주 호소하시고, 피로감은 물론이고, 세상에 그런 무기력한 분이 또 있을까…….”
“헬렌의 가호를 받고도, 감기 기운을 호소한다고?”
“워낙 허약한 체질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데니스 교수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며 대꾸했다.
“지내는 동안 자주 아팠나?”
“잘 모르겠습니다. 마님께서 아파도 아프다고 말씀할 분이 아니잖습니까? 저를 경계한달까요…….”
“아내에게는 물어봤나?”
“그냥, 각하께서 나중에 은근히 여쭈십시오. 마님께서 헬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탓이 큽니다. 이게 다 각하께서 결혼식만 치러두고 전장에 오른 탓이 아닙니까?”
데니스 교수는 입이 열리자 줄줄줄 말을 읊어 냈다. 보좌관 브레디가 ‘너 그쯤 해 둬라.’라고 은근히 눈짓을 보냈지만, 데니스 교수야말로 알 바가 없었다.
“각하께서 마님을 모시고, 진료실로 한번 방문해 주십시오. 그럼, 정밀검진을 해서라도 몸을 아주 꼼꼼히 살피겠습니다.”
“그간 아내가 검사를 회피했나?”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적극적인 건 아닙니다. 헬렌의 기사들이야 다들 무쇠들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보통 귀족가의 여인들이라면 조금만 아파도 의사를 찾습니다. 그런데 마님은 아니십니다.”
데니스 교수가 고요히 답했다.
꼭, 저를 피하는 사람 같습니다.
“나중에 내가 진료실로 데려가지.”
“마님께서 거절할지도 모릅니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든다.
* * *
캐서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불안감이 솟는다. 어디서 온 불안감인지는 모른다. 그저 직감이다. 로렌디스가 오고서부터 무언가 일이 틀어질 것 같다는 직감이 가슴속에 날카롭게 꽂혔다.
“산책 좀 하고 올게.”
“마님, 이 시간에요?”
넨시가 걱정스럽게 캐서린의 뒤를 따랐다. 이른 저녁이었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라도, 헬렌의 추위는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로렌디스는?”
“기사단을 데리고 식당으로 갔습니다. 각하께서도 아마 식당에서 식사를 하시고 올 겁니다. 보통 크고 작은 전투가 끝나면 꼭 기사단과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반년 만에 긴 전쟁을 끝내고 왔으니, 기사단에게도 여독을 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 오늘 로렌디스는 늦으려나? 기사단과 식당에 갔으면 술을 마실 거니까.
“그럼 오늘은 늦겠구나.”
“아니. 이미 기사단만 보내 두고 돌아오는 길이야.”
낯익은 목소리가 복도 가득 울렸다. 낮은 저음이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고요하게 불렀다.
“캐서린.”
낯익은 이름이지만 낯설었다. 이름으로 불린 게 얼마 만일까. 모두 ‘마님’으로만 캐서린을 부르면서 이름을 거의 잊고 지냈다. 바닥을 훑는 듯이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에서 무뚝뚝함이 묻어났다.
“갑자기 이름은 왜…….”
그의 진중한 목소리가 퍼진다. 로렌디스가 뚜벅뚜벅 걸어와서 거리를 좁힌다. 그리고 우뚝, 캐서린 앞에서 멈춰 섰다. 감성 구두 특유의 묵직한 구둣발 소리도 점점 사그라졌다.
‘위험하다.’
캐서린은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왜 여기 있어요?”
“내가 오늘 무얼 본 줄 아나?”
목덜미에 쭈뼛쭈뼛 소름이 돋았다.
“당신의 의료 기록지를 봤어.”
“그건 왜……!”
서늘하다. 서늘한 비수가 날아와서 가슴에 꽂힌다. 척추를 타고서 싸늘한 한기가 흘렀다. 등줄기가 파르르 떨렸다. 캐서린은 그 떨림을 숨기려고 숄을 꼼꼼히 여몄다. 이 몸은 지금 시한폭탄을 품에 껴안은 격이었다.
그나마 의료 기록지에는 별거 없다. 데니스에게서 감기약만 처방받고 다른 증상들은 다 숨겼으니까. 의료 기록지에서 빌미를 잡힐 만한 건 없다. 그럴 아는데도 불안한 마음은 어째서일까.
캐서린은 로렌디스를 설득하지 못할 것을 이미 느꼈다. 캐서린이 뻣뻣하게 버티고 서 있는데, 커다란 손아귀가 캐서린의 어깨를 눌렀다.
“그 몸이 얼마나 빈약한지 충분히 알아보았으니.”
감기약만 처방받으면서 허약한 안주인을 연기했는데, 감기약을 너무 자주 처방받은 모양이다.
“따라와. 데니스 교수의 진료실로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