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로렌디스는 눈발이 날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유난히 눈발이 거칠었다. 하얀 폭풍이 일고, 눈앞에 설원이 펼쳐졌다.
“날씨가 오늘따라 따라 주지 않는군요.”
“헬렌은 늘 이랬다.”
로렌디스는 은빛 갑주를 툭툭 털었다. 갑옷은 눈보라 속에서도 고고히 빛났다. 헬렌의 깃발은 그 속에서 경건하게 날렸다.
“일정을 늦추겠습니다. 이 눈보라를 뚫고 가기는 힘듭니다.”
“아니다. 일정을 앞당긴다.”
로렌디스는 눈보라 너머를 흐린 눈으로 바라봤다. 다른 이들이라면 그 길도 분간하기 힘들 만큼, 상황이 나빴다.
그 눈보라를 본 헬렌의 기사단에서는 시름 소리만 더 깊어졌다. 막사를 펼쳐 두고 조금만 더 쉬어 가도 좋을 걸…….
“폐하께서 일찍 귀환하시랍니까?”
기사단장이 갑옷에 묻은 눈을 털어 내고서 다가왔다. 로렌디스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목을 꼿꼿하게 폈다.
“마무리는 다 끝났나?”
“네. 끝났습니다. 이것으로 일대의 야만족은 다 처치됐습니다.”
경계선 일대는 조용해졌다. 약탈을 일삼던 야만족이 조용해지고, 이들이 싸웠던 곳은 눈보라에 파묻혔다.
이 일대의 기후에 익숙한 헬렌이라면 괜찮지만, 야만족에게는 그렇게 좋은 기후 환경이 아니다. 로렌디스는 예정보다 빨리 끝난 전쟁을 마무리 짓고 말 위에 올랐다.
“눈보라가 고요해지면 출발한다.”
* * *
캐서린은 손을 뻗어서 햇살을 만졌다. 아침부터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헬렌의 거리 곳곳이 어수선하네.”
“개선식 준비가 한창일 테니까요. 마님께서도 나가 보시렵니까?”
헬렌의 거리가 개선식 준비로 분주해졌다. 상인들은 음식을 값싸게 팔고, 행인들도 개선식을 구경하러 나왔다. 사람들은 헬렌의 승리를 당연히 직감했고, 이미 축배를 들 준비까지 끝냈다. 오죽하면 여기까지 영지민들의 환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따뜻해.”
성 안에서는 특별한 일 없이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넨시가 활짝 웃으며 캐서린에게 제안했다.
“오늘따라 날씨가 참 좋습니다. 밖에서 산책이라도 하시렵니까?”
“로렌디스가 오기 전에 마무리 지을 서류가 산더미야. 이걸 다 끝내려면 오늘 잠까지 다 포기해야 해.”
“그래도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헬렌과의 작별을 앞두고, 캐서린도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잠만 자면서 미뤄 뒀던 일부터 순차적으로 끝냈다. 헬렌이 영원히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에서, 마지막은 아름답게 끝맺고 싶었다.
캐서린이 집무실에서 서류를 확인하는데, 하녀 아이들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마님, 정원사가 화단의 꽃을 꺾어다 줬습니다. 향이 아주 향긋합니다.”
“꽃은 저쪽 화병에 꽂아 줘.”
“각하께서는 먼 전장에 계시는데, 마님께서 이 공작성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얼마나 안심되는지 모릅니다.”
보라색 라벤더꽃이 아름다웠다. 몇 송이 꺾어서 화병에 꽂아 뒀더니 집무실 한편이 화사했다.
“황궁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로렌디스의 귀환을 앞두고, 황실에서도 전언을 보냈다.
“황제 폐하께서 전언하시길, 각하께서 복귀하면 함께 입궁해 달라십니다.”
“이런.”
“1년 만에 오는 조카를 보려는 백부의 마음이잖습니까.”
캐서린은 눈을 감고서 깃펜을 꾹꾹 눌렀다.
“나는 몸이 오슬거려서…… 미안해.”
“이런……. 마님이 유약한 건 사실이군요. 헬렌의 가호를 받아도 감기 기운이 돌다니요. 주치의를 부르겠습니다.”
마음 한쪽에서 불안감이 솟았다. 그런데 어디서 기인한 불안감인지는 모호했다. 캐서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넨시가 유난히 의기소침해진 캐서린을 난처하게 보더니, 그녀의 신경을 밖으로 이끌었다.
“헬렌이 오랜만에 축제 분위기로군요. 마님, 느껴지십니까?”
“응. 바깥을 보니까, 다들 좋아하는 게 느껴져. 헬렌의 주인이 진짜 곧 돌아오려나 봐.”
캐서린은 자줏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추운 감이 있어서 자줏빛 드레스에 흰 양털 숄을 둘렀다. 양털은 보드라웠다. 손끝으로 양털을 더듬자, 특유의 보들보들한 감촉이 손끝에 감겼다.
‘이제 다 끝나 가는데, 내 마음은 왜 불안할까?’
그때 데니스 교수가 공작 부부의 침실을 찾았다. 캐서린은 소파에 기대서 손목을 내밀었다. 데니스가 손목을 만져 보고 체온계로 체온까지 확인했다.
“열은 없습니다만 괜찮으십니까?”
캐서린의 어깨를 주물던 넨시가 눈살을 찡그리며 답했다.
“괜찮다면 주치의를 불렀겠습니까? 무슨 그딴 무능력한 말씀이 다 있습니까!”
“그, 하녀분은…… 말씀을 좀 가려 주십시오. 저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님께서 자주 아프니, 제 걱정도 나날이 늘어납니다.”
“하녀들이 날밤을 지새우며 마님을 곱게 가꾸면 뭐 합니까? 주치의가 무능해서 우리 마님께서 항상 아프잖습니까!”
데니스 교수는 끙끙 앓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아이만 있었다면…… 왜 그런지 알아봤을까…….”
데니스 교수가 중얼거리며 의료 가방을 내려놨다. 의료 가방을 열자 약초 냄새가 은은히 풍겼다. 의료 가방을 뒤적일 때마다 더 약초 향이 더 짙게 풍겼다.
“옛적에 학계를 떠난 제자가 있는데, 그 아이가 이런 쪽으로 아주 재주가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캐서린은 잠깐이지만 멈칫했다.
“학계에서……?”
“창피한 이야기입니다. 저보다 솜씨도 좋고 환자를 보는 감각이 아주 탁월했습니다. 워낙 성격이 개차반이라서 학계에서 쫓겨나다시피 하고 지금은 어디 있는지 찾기도 힘들지만요.”
왠지 아는 사람 이야기 같다.
캐서린은 움찔하면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설마…….
* * *
캐서린은 집을 찬찬히 살폈다.
로렌디스는 마중 나가는 길이었다. 마지막이니까 예쁘게 끝맺자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손봤다. 헬렌에서 지내면서 바꿔도 되지만, 떠날 때를 앞두고 바꿀 건 바꿔 두고 가야지 싶다.
“계단 난간이 삐걱거리는데, 수리공을 불러서 수리해 둬야겠어.”
“앗! 몰랐습니다. 금방 불러오겠습니다.”
“커튼도 남색으로 바꾸고, 관리하기 좋게 먼지가 덜 날리는 원단으로 해 두자. 기사단이 복귀하면 사람들이 자주 다닐 건데 커튼 원단 소재도 중요하겠어.”
자줏빛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끌리고, 머리카락이 살랑대며 흔들렸다. 캐서린은 환호 소리를 따라서 몸을 틀었다.
“기사단에게 베풀 고기와 포도주는 다 마련됐어?”
조용했다.
“넨시?”
하녀 무리와 따라붙었다고 여겼는데, 어디로 간 건지 없다. 캐서린이 숄을 꼼꼼히 여미고서 몸을 트는데, 묵직한 발걸음이 울렸다.
그리고 누군가 손목을 낚아챘다. 캐서린은 그 힘에 이끌려 몸을 다시 틀었다. 머리가 헝클어지며 허리 아래로 흘러내렸다.
“로렌디스?”
로렌디스가 갑옷 차림으로 서 있었다. 예전의 그 은빛 갑옷이었다. 반년 동안 전쟁을 끝내고도, 그 은빛 갑옷은 녹슬지 않고 영롱한 빛을 유지했다.
“반년 만이군.”
“제 예상보다 일찍 오셨어요.”
“일찍 끝내랬잖아.”
그런 말을 하긴 했다. 계약 기간 1년만 채우면 바로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계약 기간이 남는다면, 우리끼리라도 조금 사적인 이야기를 나눠도 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도 있었다.
로렌디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막 전쟁을 끝내고 와서일까? 로렌디스의 품에서 거친 기운이 넘실거렸다. 서늘한 북풍을 몸에 가득 품고서 온 것 같다. 한 걸음 다가서자 찬바람이 거칠게 뺨을 할퀴었다.
“그대는…….”
“축하드려요. 이번에도 승리하셨네요.”
“꼭 떠날 준비를 이미 끝내 둔 사람 같군.”
우리는 서로를 보고 있지만, 서로 다른 말을 했다. 자줏빛 드레스를 손아귀로 쥐고서 식은땀을 닦았다.
반년 만이다. 익숙해질 틈도 없이 헤어지고, 이제 떨어져 지내는 게 더 익숙해질 무렵에 전쟁이 끝났다.
로렌디스의 손이 캐서린에게 닿았다. 뺨에 닿은 손바닥이 거칠었다. 굳은살이 가득 박인 손을 보자, 그간 얼마나 고생했는지가 보여서 마음이 쓰였다.
‘나는 누군가를 걱정할 처지가 아닌데…….’
캐서린은 손을 뻗으려다가 멈칫했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처음부터 허울뿐인 계약이었어요. 우리 서로 이해관계가 잘 맞았고, 음, 그래서 가치 있던 결혼이었잖아요? 내가 이런 이해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힘들어질 거라고 말씀한 건 로렌디스예요.”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하나다.
“우리들의 이해관계는 끝났어요.”
로렌디스가 먼저 꺼낸 이야기였다. 이 결혼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으로 맺은 일반적인 결혼과 다르다.
가문과 가문이 만난 정략결혼과도 다르다. 우리는 가문의 이익으로 얽힌 사이가 아니다. 개인의 이익으로 얽힌 사이다.
“무언가 오해가 있군.”
로렌디스가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만큼, 쉽게 끊어 내기 어려운 결혼이라는 뜻이었어.”
“……그게, 어차피 허울뿐인 결혼이었잖아요. 로렌디스는 나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런 가능성도 아주 무궁무진하시고요.”
밀던 자작가라는 한미한 가문이 아니라, 더 좋은 가문의 여자와 만나라. 시한부로 곧 죽을 사람 끌어안고 지내는 건 당신에게도 불행이다.
로렌디스에게 해 줄 말은 많다. 그런데도 캐서린은 어버버 입술만 달싹였다.
‘눈이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아.’
캐서린은 천천히 뒷걸음쳤다. 이건 본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