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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17)화 (17/129)

17.

시간은 고요히 흘렀다.

헬렌에서는 한창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은 고요하게 세상을 덮었다. 그리고 헬렌의 전령새들은 눈 내리는 하늘이 이미 익숙해졌는지, 추위를 뚫고 하늘을 날아다녔다.

“지긋지긋한 눈이로군요.”

“나는 볼 때마다 새로운데, 넨시에게는 지겨운가 봐.”

침실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타오르고, 장작불이 방 안을 따뜻하게 데웠다. 붉은 불길이 은은하게 피어올라서 빛을 비추었다. 넨시가 벽난로에 장작을 넣으며 이야기했다.

“각하께서 편지를 보내셨나요?”

“응. 여기도 이제 눈이 내린다고 말씀드렸더니 답신을 보내 주셨어.”

우리는 공작성에서 같이 지낼 때보다, 서로 떨어져 지낼 때 나눈 이야기가 더 많은 것 같다.

“이번에는 뭐라 말씀하셨나요?”

캐서린은 편지지를 조용히 펼쳤다.

[기다려. 곧이니까.]

캐서린은 긴가민가한 마음에 달력을 확인했다. 로렌디스가 헬렌을 떠난 지 이제 다섯 달이 겨우 넘었다.

이번 전쟁은 1년간 꾸준히 이어질 거다. 단기간에 끝날 일이 아닌데……. 이 사람이 진짜 빨리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앞선다.

* * *

여섯 달이 지났다. 그리고 캐서린도 공작성 생활에 슬슬 적응했다.

[공작성의 생활도 슬슬 적응되어 가요. 조용하고 아늑하네요. 조금 따분하긴 해도, 당신이 온들 어차피 우리는 헤어지는…….]

캐서린은 깃펜을 끄적거리다, 성 안을 두리번거렸다. 공작성은 웅장한 요새 같았다. 그런데 그 안은 고요하고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계약 기간이 길다.”

계약 기간은 앞으로도 반년 더 남았다. 시간은 느리게만 흘렀다. 헬렌은 평화로웠지만, 그 평화로움은 따분함으로도 연결됐다.

시간은 충분했고, 로렌디스는 전장에서 연이은 승전보를 보냈다. 캐서린은 공작성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고, 공작성 안에서만 지냈다.

성 꼭대기 창문으로 긴 금빛 머리카락만 내밀고 내려다보는 모습이…… 꼭 어느 동화 속의 공주님 같았다.

* * *

헬렌의 전령새가 주둔지 위를 날았다. 그리고 익숙하게 사령부 시설을 찾아서 하강했다. 로렌디스는 다리에 묶인 편지를 풀어서 확인하고, 보좌관에게 전령새를 맡겼다.

“먹이와 마실 것을 챙겨 줘라.”

로렌디스는 막사로 들어와서 그간 받은 편지들을 펼쳤다. 그리고 고민에 빠졌다.

“왜, 계속…… 어딘가 멀리 떠날 사람처럼 보일까.”

둘은 계약 관계다. 이 계약은 이해관계로 맺었고, 어디까지나 책임감 때문이었다. 헬렌의 가신이었고, 죽은 아버지 친우에게 보이는 예우였다.

캐서린이 떠나길 바라는 건 안다. 계약 기간이 끝난다면, 캐서린은 언제든 떠날 것이다. 그런데 꼭 그게 다가 아닌 것 같다. 처연한 문장과 글귀를 보면…….

“헬렌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려는 사람 같군.”

홀로 중얼거리던 로렌디스는 편지를 내려 뒀다. 막사가 열리고 보좌관이 급하게 부복했다. 로렌디스는 갑주 차림으로 의자에 느른하게 기댔다. 은빛 갑주가 조명에 빛났다.

“일대의 야만인들을 모두 처치했습니다.”

“그럼 한동안 조용하려나.”

“앞으로 몇 년간은 이들도 몸을 사릴 겁니다.”

그 존재감은 미약하지만 꾸준히 산에서 내려와 헬렌을 들쑤시는 게 날벌레보다도 못났다. 줄곧 싸웠고 줄곧 이겨 왔지만, 여전히 지겹고 질긴 인연이었다.

“이번 전쟁은 완벽한 각하의 승리입니다. 이만 헬렌으로 갈 시간입니다.”

전쟁이 끝났다.

그리고 돌아갈 때가 됐다.

* * *

며칠 뒤.

캐서린은 느지막하게 소파에 기댔던 몸을 추슬렀다. 몸이 점점 더 게을러진다. 캐서린은 하녀들이 입혀 주는 옷을 입고, 하녀들이 차려 주는 식사를 하며, 하녀들이 따라 주는 차를 마셨다. 스스로 한 건 없다. 삶이 무기력해지니 몸도 저절로 게을러졌다.

“전장에서 편지가 왔어요.”

“로렌디스야?”

혼인 후 몇 달이 더 흘렀고, 캐서린은 로렌디스를 편히 이름으로 불렀다. 편지 내용은 안부 인사부터 사담까지 다양했다.

캐서린은 편지지를 펼쳐 읽어 내려갔다. 로렌디스의 글씨체는 언제 보아도 정갈하고 말끔했다. 획을 긋는 특유의 버릇이 있는데, 마지막 획은 꼭 끝을 휘게 적는다.

[곧 가.]

편지 내용은 이게 다였다.

곧 온다니. 당신 지금 올 때가 아니라고요.

1년을 넘겨야 할 전쟁이 일찍 끝났다. 헬렌에는 다행인 일이지만, 캐서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계약기간을 다 채워서 올 거라고 예상했건만, 로렌디스의 귀환이 더 빨라지면서 일정이 꼬였다.

‘어쩐다.’

힘없이 침대에 기대앉았던 캐서린은 편지지를 덮어 두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아-이 사람 진짜 곧 올 것 같다.

* * *

공작성의 내부 장식을 바꿨다. 짙은 남색 빛의 커튼을 뜯어내고, 새로 장식했다.

하녀들은 오랜만에 내부 장식을 뜯어고치자 활기차게 대청소까지 시작했다. 캐서린은 복도 한편에 멀거니 기대서서 마른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래간만에 하늘이 맑게 갰다.

“눈이 그쳤어.”

“그러게요. 하늘이 오래간만에 맑아졌어요. 마님께서는 바깥에서 산책이라도 하십시오. 요즘 바깥 외출이 뜸하시더군요.”

하녀들은 부지런하게 복도를 쓸고 닦았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융단을 복도에 깔았다. 자줏빛 융단은 나무와도 잘 어울렸다.

“눈이 그쳤으니 미뤄 둔 대청소를 하는 겁니다.”

“어쩐지 다들 신난 것 같더라.”

“네. 이 지겨운 눈발이 그만 좀 날렸으면 좋겠어요. 마님은 안 그러십니까?”

캐서린은 짧게 고민하다 답했다.

“나는 눈 좋아해. 꼭 솜뭉치가 내리는 것 같잖아. 내 마음도 포근해지는 것 같아.”

“어쩜 감상적이시다. 그래서 각하께서 마님을 아내로 맞이했는가 봅니다. 너무 보기 좋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캐서린의 머리는 어느덧 허리 아래까지 내려왔다. 머리를 기르는 게 더 어울린다는 조언에 길렀다.

부스스했던 금빛 머리에 생기가 돌고, 뺨도 희고 맑아졌다. 피부에 향유를 듬뿍듬뿍 발라서, 몸에서는 향긋한 향이 풀풀 풍겼다. 긴 머리도 하녀들이 대신 관리해 줘서 그냥 내버려 뒀다.

“어쩜 이리도 아름다우실까.”

“마님은 역시 긴 머리가 잘 어울리십니다.”

“마님은 짧은 단발도 잘 어울려요. 특유의 처연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짧은 머리와 더 잘 어울립니다.”

캐서린은 모른 척 벤치에 가서 앉았다. 눈이 뽀드득하며 밟혔다. 폭신한 쿠션이라도 된 듯, 구두에 밟히는 눈이 보드라웠다.

‘졸려.’

공작성의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가문과의 인연을 끊고, 헬렌에서 조용히 지냈다. 몸에 살집도 붙었다. 몸선이 가늘긴 해도, 그건 선천적인 부분이었다. 하녀들도 캐서린의 변화에 눈에 띄게 기뻐했다.

“잠을 좋아하는 건 여전하십니다.”

“요즘 따라 유난히 졸리더라고.”

하녀들의 말대로, 캐서린은 하루의 절반을 잠으로 보냈다. 그 잠이 지겨울 때면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자작저에서 책만 읽으며 시간을 보낸 덕분인지, 캐서린은 교양이나 지식이 남들보다 월등했다. 그래서 보좌관의 업무를 최소한의 선에서 도와줄 수준은 됐다. 적극적으로 이들을 돕기보다는 뒤에서 적당히 도와주며, 보좌관들 사이에 묻혀 지냈다. 지금도 그랬다.

캐서린이 상념에 잠겨 있는데, 작은 부름이 들렸다.

“마님. 작위 승계 작업이 끝났습니다.”

보좌관 브레디가 캐서린 앞에 머리를 숙였다.

“작위라니요?”

“밀던 자작가의 작위 승계 작업이 끝났습니다. 마님께서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게 장치를 마련해 뒀습니다. 마님께서 허락하지 못한다면, 계모나 그 가족들은 자작가의 재산 또한 함부로 융통할 수 없습니다.”

헬렌의 이름이 가진 힘이다. 말 몇 마디로 자작가를 다시 뺏어 오다니. 헬렌의 이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위는 마님께 흡수될 겁니다. 계모와 의붓언니는 마님께서 처분하시면 됩니다.”

자작가에서는 어렵던 일들이 헬렌의 이름으로 다 해결된다.

“헬렌에서는 모든 게 쉽네요.”

아버지께서 실종되고, 밀던 자작가는 새어머니께서 이끌었다. 시골의 한미한 가문을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그래서 새어머니는 집 비운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문을 장악했다.

‘어맨다 밀던.’

떠날 때 떠나더라도,

가문을 다시 빼앗아 오더라도 가족과의 매듭을 짓는 건 캐서린이 해야 할 일이었다.

가족들과 만날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다 진짜 끝나 가는 기분이네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 시작입니다. 곧 각하께서 오시면 큰 승전식을 열고 제국에서 훈장도 받게 될 겁니다.”

전쟁이 끝나가는 건 다행이다. 헬렌은 전쟁영웅이 돼서, 이번에도 그 이름을 드높게 세울 것이다. 헬렌이 압도적으로 이길 전쟁이라도, 반년 만에 끝낼 규모는 아니었다.

예정대로라면, 전쟁이 끝났을 때는 우리들의 계약기간도 1년을 꽉꽉 채우면서 지나 있는 게 맞다.

“여기가 연회장입니다.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서 먼지가 쌓였지만, 청소하고서 수리한다면 멋진 연회장이 될 겁니다.”

연회장 문도 오랜만에 열었다. 연회장 문을 열어젖히자, 뿌연 먼지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연회장은 거대했다. 그런데 그 쓸모를 다하지 못해서인지 황량했다. 회장 안에 먼지가 가득하게 쌓였고, 화려한 창문에는 거뭇거뭇한 얼룩이 졌다.

“먼지가 아주 가득하게 쌓였습니다. 연회장을 쓸 일이 없었다지만…… 마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치우면 됩니다.”

“그간 연회장을 쓸 일이 없어서 오래 비워 뒀더니, 손볼 곳이 한두 곳이 아니네요. 그래도, 청소만 한다면 예전의 그 화려함을 되찾을 겁니다.”

“이 연회장이 이제야 쓸모를 다하겠네요!”

하녀들은 기뻐했다. 저마다 몇 마디씩 말을 섞으며 청소 도구를 가져온다더니, 자리를 떠났다. 모두 기뻐 보인다.

“유리 조각이 신기해.”

“네. 예전에 패망한 왕족들이 쓰던 연회장입니다. 사치를 제법 부린 건지, 유리창마다 천사상을 조각해 뒀지요.”

천사상이 뿔피리를 불고 있었다. 나무 바닥이 삐거덕거렸지만, 수리공을 불러서 고친다면 멋스러울 것 같았다. 로렌디스가 돌아온다는 게 실감이 났다.

로렌디스가 돌아온다. 전쟁영웅 로렌디스가 승전보를 울리며 헬렌의 성문을 두드린다. 그럼 나는…….

“내 쓸모도 그럼 끝나려나.”

캐서린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말은 고요히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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