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15)화 (15/129)

15.

깃펜으로 첫 글귀를 적었다.

[오늘 하루는 안녕하신가요.]

캐서린은 편지지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몸은 건강하시죠? 전쟁은 직접 겪어 본 적이 없어서, 걱정되는 마음이 앞서요. 저는 헬렌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보좌관께서 잘 챙겨 주신 덕에, 이곳에서의 불편함은 없답니다. 그래서 로렌디스에게 편지도 보내요.]

시작은 가벼운 인사말로 시작했다. 일단은 계약직이더라도, 1년간은 그의 아내로 지내야 한다.

헬렌의 가신과 그 가솔들의 의심을 피하려면, 아내 역할도 충실해야 하며 그의 빈자리도 채워야 하니까. 캐서린은 편지를 매끄럽게 적어 내려갔다.

[아직은 이곳이 낯설어요. 그래도 로렌디스의 빈자리를 채워 보도록 노력할게요. 보좌관과 가솔들이 있으니, 당신의 공백을 채우기엔 부족하더라도 큰 무리는 없을 거예요.]

깃펜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캐서린의 말끔한 글씨체가 흰 종이 위에 찍혔다. 글씨체도 캐서린을 닮아서 가녀렸다. 가느다란 획이 종이 위에 펼쳐졌다.

[무운을 빕니다.]

캐서린이 편지지에 마침표를 찍을 때였다.

“마님, 넨시입니다.”

“응. 들어와.”

넨시가 화사한 꽃을 한 아름 끌어안고서 캐서린을 찾았다. 은은한 꽃내음이 방 안 가득 퍼졌다. 짙지도 마냥 옅지도 않고, 은은한 향이 오래도록 풍겼다.

“부탁하신 눈꽃솔이 꽃을 가져왔어요. 탁자에 올려 둘게요.”

넨시가 꽃잎을 뜯어서 캐서린에게 내밀었다. 눈꽃솔이는 나무 이름에 어울리게 눈꽃처럼 흰 꽃이었다. 흰 눈송이를 크게 확대하면 얼음 결정이 보인다는데, 그 얼음이 꽃이 된다면 저런 꽃이 아닐까 싶은 그런 모양이었다.

“편지를 보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내일 아침에 전령새를 보내겠습니다. 그럼 하루면 도착할 겁니다.”

캐서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꽃을 작은 가위로 잘랐다. 익숙하게 꽃대를 자른 뒤, 꽃송이를 편지지에 붙였다. 거기에 향수까지 한 번 덧입혀 주자, 편지지에서 향긋한 향이 풍겼다.

“그럼 부탁할게.”

넨시가 편지 봉투를 챙겨 떠났다.

* * *

로렌디스는 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눈발이 바람에 날렸다. 지금도 점점 더 굵어지는 것 같다.

“각하 도착하셨습니까!”

미리 도착해서 야만족의 동태를 파악하던 기사단장이 로렌디스 앞에 부복했다. 로렌디스의 눈앞에 하얀 설경이 펼쳐졌다. 세상이 하얀 눈 위에 덮였다. 헬렌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전경이었다.

“눈 내리는 겨울에 헬렌을 건드리다니……. 이들은 야만족이라고 불리더니 머리까지 돌덩이처럼 굳어 버린 모양이군.”

헬렌이 폐쇄적인 이유 중 하나다. 헬렌에서 눈은 동화책 속에서 나오는 일이 아니다. 재난서에서 나오는 자연재해다. 폭설로 도시가 마비되거나, 사람이 실종되는 일도 이따금 발생할 정도니까.

한겨울이 다가오는데, 헬렌의 기사단을 건드린다는 건 자살행위다. 헬렌은 소수의 인원만으로 야만족을 거의 다 토벌했고, 마무리 작업만 남았다. 로렌디스에게는 아주 가볍고 간단한 일이다.

“심경이 복잡해 보이십니다.”

“그래 보이나?”

“표정이 평소와 다른 것 같아서 말입니다.”

로렌디스의 표정이 평소보다 낮게 침전되어 있었다. 기사단장은 그런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십니까?”

“헬렌에 아내를 남겨 두고 왔는데…….”

기사단장은 미리 야만족의 동태를 살핀다며 전장에 올라서, 이번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도, 주인 내외가 얼마 전 결혼식을 치렀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신경 쓰이십니까?”

제 주군께서는 기본적으로 무던한 분이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도 무신경한 편이었는데, 이번 혼인으로 제 주군도 많이 변한 모양이다.

“이번 전쟁도 금방 끝날 겁니다. 저쪽도 이미 많이 지친 듯 보이더군요.”

야만족과 충돌하는 내내, 눈은 한 번도 그치지 않고 내렸다. 헬렌의 기사단은 가호를 받기 때문에, 헬렌의 추위에 강하지만 야만족은 아니다.

기사단장이 서둘러 로렌디스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이전에 기사단 건물을 방문하셨을 때 뵀던 것 같은데, 마님께서는 어떤 분입니까?”

주인마님과는 저번에 기사단에서 본 게 다였다. 기사단장이 호기심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로렌디스가 고요히 읊조렸다.

“그 눈빛이 너무 익숙해.”

로렌디스는 공작성에 남아 있는 아내를 떠올렸다.

‘계약직 아내.’

아내가 그 말을 입에 담을 때부터 느꼈다. 그녀는 삶의 미련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은 죽음을 목전에 둔 병사들을 닮아 있었다. 모든 걸 내려 두고서 죽음을 경건하게 받아들이는 기사들의 눈빛이 딱 그랬다.

로렌디스가 그 눈빛을 되짚으며 눈살을 찌푸리는데, 기사단장이 큼큼-목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마님의 사진은요. 챙겨 오셨습니까?”

“사진이라니?”

“각하께서도 이제 혼인을 하셨으니, 결혼사진을 챙겨 오셨어야지요? 기사들은 모두 회중시계에 가족들의 사진을 담아 두고 전쟁에 참전합니다. 더군다나 각하께서는 결혼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결혼사진 안 가져오셨습니까?”

가족사진도 다양하다. 다들 딸아이 사진이나, 막 결혼한 신혼부부 사진이나, 부모님, 헤어진 가족사진까지. 모두들 사진을 가슴속에 품고 ‘꼭 만나러 갈게.’라고 속으로 기도한다.

“마님께서 이해심이 깊은가 봅니다.”

“그건 아니고…… 그런 사진 꺼내 보지 말라더군.”

“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로렌디스는 기사단장에게서 회중시계를 빼앗았다. 거기에는 기사단장과 작년에 결혼한 아내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기사단장은 우락부락한 근육질이었고, 아내는 단발머리의 체구가 작은 여인이었다.

‘단장님은 산적처럼 챙겨서는 너무 욕심이 큰 것 아닙니까! 형수님, 정말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합니까?’

기사단 단원들도 기사단장과 친해서 나눈 장난이었다. 기사단장도 산적처럼 소리만 쩌렁쩌렁 지르고 웃어 넘겼다.

“지금 혼자 두면 안 될 거 같은데…….”

“당연하지요. 결혼식 다음 날 신부를 혼자 두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아주 큰 죄입니다. 나중에 집에 가거든 꼭 사죄하십시오.”

“기사들 사이에 섞여 지내면서 감이 무뎌졌어. 도통 짐작이 되질 않으니…….”

사령관의 막사 쪽으로 전령새가 날아왔다.

“공작성에서 보낸 전령새입니다.”

로렌디스가 서신을 뜯어서 확인하자, 곁에서 기사단장이 작게 감탄했다.

“마님께서 보내셨는가 봅니다!”

“답신을 보낼 편지지와 봉투를 가져와라. 전령새에게 가볍게 먹을 먹이를 챙겨 주고.”

로렌디스는 편지지를 찬찬히 읽어 보고 답신을 적어 내려갔다. 편지에는 가벼운 안부 인사와, 그를 걱정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로렌디스는 의자에 기대앉아서 깃펜을 꺼냈다. 어젯밤에 쓰던 깃펜은 추운 날씨에 잉크가 이미 한 번 얼어붙었다.

“여기 새 깃펜입니다. 날씨가 추우니까 깃펜마저 얼어붙는군요.”

“정찰대를 보내서 야만족의 동태는 한 번 더 확인했나?”

“네. 눈 때문에 발을 묶인 걸 세 번씩이나 확인했습니다. 정찰대도 한심해서 말을 잃었다더군요.”

기사단장의 보고에, 로렌디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님께서는 뭐라고 보내셨습니까?”

“안부 인사다.”

“떠나온 지 이제 이틀째인데, 마님께서도 걱정이 되는가 봅니다.”

로렌디스는 깃펜을 꺼내서 글자를 한 글자씩 적었다.

[나는 건강해. 그대는 어떤가? 지난밤에 피곤했을 건데, 편지를 보낼 체력이 남아 있었는가 보군.]

첫 소절을 적은 로렌디스는 깃펜을 쥐고서 고민했다.

“이대로 적어 보내면 되겠나?”

“큼큼, 뭐, 뭐, 일단은 그대로 보내십시오.”

기사단장은 급하게 시선을 피했고, 로렌디스는 편지지를 마저 채워 나갔다. 결혼식을 치르고 체력이 많이 부족했을 거다.

[지난밤에 유난히 앓던데, 주치의는 만나 봤나 모르겠네. 나는 괜찮으니, 당신 몸부터 챙기는 게 더 좋겠어. 사람이 체력이 그렇게 안 좋으면 어떡해. 주치의에게 일러두지. 진단부터 받아 봐.]

로렌디스는 편지지에 마침표를 찍고서, 마지막으로 찬찬히 읽었다.

“지난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건데…….”

편지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한 로렌디스는 깃펜을 내려 두었다. 깃펜이 탁자에서 굴러 막사 바닥에 떨어졌다.

기사단장은 툴툴대며 깃펜을 주웠다. 우리 각하께서는 깃펜을 하루에 한 번씩 바꿀 생각이신가. 저번에 쓴 깃펜도 얼어붙어서 새 깃펜을 꺼낸 건데. 이러다간 펜촉이 먼저 부러지겠는데……. 기사단장은 깃펜을 주워서 쓱쓱 닦고 탁자에 올려 두었다.

“다 적었습니까?”

“한 통 더 적는다.”

로렌디스는 길게 설명하는 대신 빠르게 편지지를 하나 더 꺼냈다. 하나는 아내에게 보낼 편지고, 다른 하나는 집사에게 보낼 편지다.

[아내가 결혼식을 치르고 피로감을 호소하는 것 같으니, 주치의를 불러 진단하게끔 하거라. 아내는 헬렌의 일원이다. 헬렌의 일원이 됐다면 그에 맞춰 성심성의껏 모셔야 한다.]

편지는 짧고 간결하게 본론만 담았다.

“이건 집사에게 보내는 거다. 집사에게 일러, 주치의를 저택으로 불러 아내를 진단하게끔 하거라.”

기사단장이 편지 봉투를 조심스럽게 챙겼다.

“마님이 어디 편찮으십니까?”

“어디 아픈 사람처럼 보이는 건 아닌데……. 세상 미련 없는 그 표정이 곧 죽을 사람 같아서.”

로렌디스는 갑옷 위에 로브를 덧입었다. 막사 밖으로 나가자, 로브가 어지럽게 펄럭였다. 짙은 눈발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래도 로렌디스는 헬렌의 주인이다. 이런 폭설에는 이미 익숙해졌다.

“그리고…… 경.”

“네?”

“그건 압수다.”

로렌디스는 그 말과 함께, 기사단장의 가슴팍에 있던 회중시계를 빼앗았다. 회중시계를 누르자, 뚜껑이 열리며 가족사진이 나왔다.

로렌디스는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이 나쁘다. 왜 나쁘지……. 결국 회중시계를 닫고 품에 넣었다.

“회중시계는 나중에 돌려주지.”

“각하! 그건 왜 가져가십니까!”

기사단장의 울음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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