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14)화 (14/129)

14.

본성의 서재를 찾았다. 조용하게 혼자 시간을 보낼 곳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그럼 마님, 필요하실 때 불러 주십시오.”

캐서린은 서재에서 책을 한 권 뽑았다. 헬렌의 서재는 고즈넉한 편이었다. 책장도 모두 나무였다.

나뭇결도 부드러운 게, 장인이 섬세하게 만든 게 나뭇결만 만져 봐도 느껴진다. 그래서 책장을 더듬거리며 천장을 멀거니 올려다봤다.

‘높다.’

침실에서도 맡았던 그 나무 향이 서재에서도 났다. 그 짙은 향이 온 신경을 잡아끌었다. 책장은 나뭇결을 그대로 살려서 조립한 식이었다.

캐서린이 책장 모서리 손끝으로 더듬으며 천천히 걷는데, 그 뒤로 인기척이 따라붙었다.

“나무 향이 짙습니까?”

브레디가 활짝 웃으며 서 있었다. 브레디는 로렌디스의 수석 보좌관으로, 저번에 로렌디스를 따라서 자작저에 왔을 때 안면을 텄다.

“브레디, 로렌디스를 따라나선 게 아닌가요?”

“알아봐 주셔서 영광입니다.”

브레디가 외알 안경을 꼼꼼히 올려 쓰며 이야기했다.

“저는 무관이 아닙니다. 뼛속부터 문관입니다. 저를 전쟁터로 보내다니, 마님께서는 정말로 잔인하신 분입니다.”

어쩐지 안경을 쓰고 펜대를 잡는 게 아주 익숙했다. 안경도 도수가 높은지 두꺼웠다. 자작저에서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 눈 안 가득하게 담겼다.

‘여기 사람들이랑 자세히 알고 지낼 마음은 없었건만.’

이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되 적절히 섞여 지내는 게 나을까. 손님으로 머무는데, 괜히 주인 노릇을 한다고 마음이 불편해진다.

캐서린이 책장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기대는데, 브레디가 책꽂이를 손등으로 툭툭― 두들기며 이야기했다.

“헬렌에서만 나는 눈꽃솔이나무라고 합니다. 이름이 독특하지요? 꽃잎이 눈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한겨울 눈이 내릴 시기에 꽃이 핀다고 하지요.”

“헬렌에는 신기한 게 많네요.”

“그 향이 짙고 오래 여운처럼 남아서 가구로도 많이 씁니다. 헬렌에는 널린 게 나무니까요.”

헬렌의 혹독한 지리 특성상, 헬렌에서 살 법한 식물은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부유한 귀족들이나 큰돈을 들여서 화려한 유리 화원을 짓고, 보통 서민들은 흔하디흔한 눈꽃솔이나무를 심어서 키우는 편이었다.

“헬렌의 일원이 되신 걸 감축드립니다.”

“고마워요.”

“이제 크게 춥지는 않으시지요? 예식을 치르면서 의식까지 치렀으니, 북부의 한기는 막아 줄 것 같은데…….”

브레디의 말을 곰곰이 떠올리던 캐서린은 아차 싶어서 답했다.

“그 숄을 두르는 게 의식이었던가요?”

“네. 그게 헬렌의 일원이 된다는 의식이었습니다.”

헬렌은 신비롭다. 그 신비로움을 다 겪지 못하고 떠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캐서린은 책장을 손끝으로 찬찬히 훑었다. 특유의 부드러운 나뭇결이 손끝에서 전해진다. 그리고 우뚝 멈춰 서서 아무 책이나 한 권 꺼냈다.

“따로 찾는 책이 있으십니까?”

“헬렌의 역사서나, 북부 생활에 도움 될 만한 책이 있나요?”

“그럼 이 책으로 보십시오.”

캐서린은 책을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꽂아 두었다. 그리고 브레디가 챙겨 준 책을 받아 들었다.

두꺼운 양장본이었다. 책 자체도 낡았으며, 예전에나 썼을 법한 고대어가 가득했다. 표지는 닳고 닳았으며, 그만큼 많은 시간을 지내 왔는지 많은 손때가 묻어났다. 책 표지만 봐도 알 만했다. 패망한 고대 왕국의 역사서였다.

“헬렌 공작가의 영지는 패망한 고대 왕국의 땅입니다. 그건 그 일대의 역사를 담아 둔 책입니다. 옛날에는 눈이 쌓이는 왕국이라고 해서, 겨울왕국이라고 불렸지요. 지금도 겨울왕국 아니면 설국이라고들 많이 부릅니다.”

“헬렌에는 눈이 많이 오나요?”

“겨울이 되면 지겹도록 볼 겁니다. 헬렌의 사람들은 눈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하니까요. 폭설이 내릴 때면 도시가 마비될 때도 많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캐서린은 움찔하며 책을 내렸다.

“그런 곳치고는 문명이 많이 발전했네요.”

“모두 각하께서 헬렌을 보살펴 주신 덕분이죠.”

브레디가 로렌디스에게 품는 존경심은 캐서린이 생각한 이상이었다. 헬렌의 역사를 이야기해 주던 브레디는 설레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쯤 되니까 ‘좀 긴데……?’ 싶었다. 캐서린은 배시시 웃으며 책을 제자리에 꽂고, 브레디의 손을 맞잡았다. 대화가 더 길어지면 피곤해지지 싶었다. 캐서린은 적당한 처세술로 브레디를 칭찬했다.

“훌륭해요. 보좌관님도 그렇고, 헬렌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주인에게 무조건적이군요?”

“당연합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이 땅을 일궈 준 분들이시니까요. 헬렌은 예로부터 척박한 지형이었습니다. 경계선에서는 야만족이 넘어오지, 계절의 절반이 겨울이고, 농사가 발달하기도 어렵잖습니까?”

캐서린은 조금 몽롱해진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조금만 넋을 놓는다면, 대화를 따라가지 못할 것 같다.

“헬렌은 철광 산업으로 발달했습니다. 밑에 광석이 많거든요. 그 산업을 찾아내서 일궈 준 분이 선대 공작님이십니다.”

캐서린은 서재를 조금 더 살펴보기로 했다. 책장 사이사이를 지나다니자, 드레스가 가볍게 살랑거렸다.

헬렌의 서재에는 오래된 서적들이 많았다. 고대 왕국의 도서들과, 그들의 일대기 등등……. 서재를 보니까 느껴진다.

‘지배자.’

헬렌은 지배자였다. 이들에게는 황권 이상의 지배력이 있었다. 패전국에서 가져온 책들로 꽉꽉 채워 놓은 서재가 그 증명이었다.

“헬렌에는 이런 서재가 많나요?”

“여기는 본성의 서재고, 별관에도 서재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외에도 중앙도서관이라고 중앙광장 인근에 건물이 하나 더 따로 있는데, 그곳은 영지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편이죠.”

캐서린은 놀라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본성 서재라면, 바깥 유출이 안 되는 책들도 여럿 있겠구나.

“여기는 가주님과 마님만 출입할 수 있는 서재입니다. 그래서 외부 손님들은 출입허가 자체가 안 나옵니다.”

“귀중한 책들이 많아서 그런가요?”

“네. 고대 왕족의 일대기부터 패전국의 도서들까지, 바깥에 유출된다면 예민할 도서들도 많고요. 아, 저는 각하의 수석 보좌관이라서 임의 출입이 가능합니다.”

캐서린은 뽑았던 책을 다시 조심히 꽂아 넣었다. 브레디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만, 본질은 하나였다.

여기 있는 책들 대부분이 금서다. 금서란 외부 유통을 금지하는 책을 뜻하며, 그만큼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캐서린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헬렌에 너무 깊게 발을 담갔다.

‘1년간 자리만 지켜 주고 떠날 거면서, 여기서 과한 존재감을 보이면 어떡해.’

캐서린이 무모했다. 존재감은 죽이고 조용히만 지내야 한다.

“더 안 살피십니까?”

“피곤해서요.”

“그럼 쉬면서 각하께 편지라도 부치는 게 어떠십니까? 각하께서도 마님을 걱정하셨답니다. 혼자 남는데 잘 보살펴 달라 제게 부탁까지 하셨거든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이다.

“로렌디스와 그런 이야기도 나눴어요?”

“새 신부를 저택에 남겨 두고 전장에 오르는데, 누가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계모와 가족들이 걱정되니까, 자작가도 처리해 두라며 지시했습니다.”

캐서린은 멈칫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건만, 뒤에서는 보조관에게 미리 지시해 둔 모양이다.

“작위가 제 주인에게 가게끔, 오늘부로 작위 승계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자작가는 원래 마님 거였습니다. 이제 제 주인을 찾아가는 것뿐입니다.”

캐서린에게는 어렵기만 한 일인데, 여기서는 쉬운 일이라는 게 묘한 회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로도 브레디가 흐뭇하게 이야기했다.

“모두 각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모든 작업은 반년 내로 마무리될 겁니다.”

“고마워요.”

“각하께, 편지라도 한 통 적어 보내 주십시오. 외딴 전쟁터에서 마님의 편지를 받는다면, 각하께서도 좋아할 겁니다.”

브레디가 눈을 아이처럼 깜빡였다. ‘그래서 편지는? 편지는 적으실 겁니까?’라고 눈짓으로 묻는데, 캐서린은 픽-웃어 버렸다.

“그럼, 부탁드려요.”

“편지지와 봉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캐서린은 보던 책들을 내려 두고 서재에서 나왔다.

* * *

“보좌관님께서 마님께 편지지와 봉투를 가져다 드리라더군요.”

넨시가 편지지와 봉투를 챙겨 줬다. 캐서린은 편지지를 펼쳐 두고 펜대를 톡톡 두드렸다. 편지지는 무난한 흰색 편지지였다. 아무런 무늬도 없고, 문양도 없다. 그런데 종이만큼은 고급스러웠다.

“눈꽃솔이나무로 만든 종이입니다. 그 펜대도 눈꽃솔이나무로 만들었고요.”

“가구부터 일반 생필품까지, 여러 방면으로 두루두루 이용하네.”

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펜대에도 헬렌의 상징인 월계수 나뭇잎이 선명히 박혀 있었다. 검은색 깃펜을 꾹꾹 누르자, 잉크가 선명히 찍혔다. 캐서린은 밋밋한 편지지를 손으로 쓸어 보고, 곰곰이 고민했다. 이 편지를 채워 줄 다른 장식이 필요하다.

“지금이면 눈꽃솔이나무에 꽃이 펴 있을까?”

“네. 지금쯤이면 꽃봉오리가 막 필 때네요.”

“그럼 저 대신 꽃을 몇 송이만 따다 줄래? 편지지를 장식해야겠어.”

넨시가 뺨을 붉히더니 서둘러 침실을 나갔다.

일단…….

첫 소절부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