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달뜬 숨이 폐부에 깊숙하게 차올랐다. 숨이 막혀 울음을 토해 내고, 격렬한 자극이 버거워 수차례 울먹거렸다. 그 속에서 들끓는 열기로 몸은 붉게 상기되고, 곳곳에 그의 흔적이 묻어났다.
‘아프지 않을 거야.’
그 이야기를 하던 로렌디스는 들뜬 열기에 잠식되어 있었다.
잠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고요하다.
이번에 헤어지게 되면, 우리는 계약 기간이 끝날 때쯤 다시 재회한다. 그 계약 기간이 무사히 끝나면 이제 헤어지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플 일 없다더니. 아프잖아.”
저릿한 통증이 허리에 퍼졌다. 긴 여운이 몸에 머물렀다.
* * *
캐서린은 끙끙 앓으면서 잠에서 깼다.
“깼나?”
이른 새벽이었다. 로렌디스가 갑옷 차림으로 옷을 갖춰 입었다. 익숙한 갑옷이었다. 밀던 자작저의 문을 두드렸을 때도, 로렌디스는 저 갑옷을 입고 있었다.
오늘은 출정식 날이었다. 출정식은 이른 새벽 시간에 잡혀 있었는데, 벌써 시간이 다 됐구나. 캐서린이 막 일어나려는데, 로렌디스가 그런 캐서린을 말렸다.
“더 자.”
“당신은요……?”
“곧 출정식이라서.”
캐서린이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로렌디스가 다시 눕혔다.
“하녀들이 올 거야. 그냥 누워 있어.”
지난 흔적이 묻은 시트에서는 익숙한 체향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녹진함이 침실을 가득 채웠다. 그는 떠날 채비를 끝냈고, 이제 곧 떠난다.
캐서린은 그런 로렌디스를 빤히 바라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몸 안쪽에서부터 근육이 단단히 굳어 버린 게 느껴진다. 이불로 몸을 감싸서 가리자, 로렌디스가 굵은 손목에 보호대를 차며 이야기했다.
“하녀들 앞에서는 피곤하다고 해. 잠을 못 잤다고 하면 그네들도 이해하겠지. 아프거나 피곤한 내색도 좋고.”
“왜요?”
“출정식에 못 나와도 하녀들이 이해할 거니까.”
캐서린은 잊을 뻔했던 걸 되물었다. 이른 아침부터 그의 출정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로렌디스도 이미 출정식 준비를 끝내 두었고.
“당신 오늘이면 전쟁터로 떠나잖아요?”
“그렇다고 출정식에 나올 필요는 없으니까.”
로렌디스가 캐서린에게 이불을 다시 덮어 주고 침대맡에 앉았다. 때아닌 친절에 머리가 몽롱해졌다.
어젯밤 내내 심경이 복잡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머리가 더 몽롱한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도 잠결에 앓던데…… 앓으면서 좀 아파하는 것 같아서 깨우려다가 관뒀어. 나중에는 또 괜찮아지던데.”
캐서린은 멈칫했다. 시선을 피해도 노골적으로 따라와 붙는다. 캐서린은 이마를 짚으며 어설프게나마 답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뒤척였나 봐요.”
“단순히 그런 거면 다행이지만. 출정식 내내 기사들이 이동하면서 먼지가 많이 날릴 거야. 당연히 귀족 아가씨가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닐 거고.”
로렌디스가 은빛 갑옷에 헬렌의 휘장을 달며 이야기했다. 그 휘장에는 월계수 나뭇잎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건 헬렌의 상징이었다. 저 월계수 나뭇잎은 저택의 가구와 조명, 하물며 성의 외각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반년이면 돼. 그 기간 동안만 기밀유지 잘 해 놔. 이 결혼이 계약이고 가짜라는 건, 폐하께도 비밀이니까.”
캐서린은 시한부 삶의 마지막을 장식하려고 결혼에 임했고, 로렌디스는 야만족과의 전쟁에 참전하려고 결혼에 임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았고, 캐서린은 곧 떠날 사람이다. 그럼, 나중에 홀로 남을 당신을 배려하는 게 맞으니. 이 모든 이야기는 혼자서 간직하면 된다.
로렌디스가 갑옷을 마저 갖춰 입었다. 갑옷을 입으니까, 그 날것 그대로의 거친 기운이 넘실거렸다. 로렌디스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다녀올게. 나오진 마.”
로렌디스가 갑옷을 차려입고 나갔다. 캐서린은 로렌디스가 나간 걸 보고서 주섬주섬 숄을 챙겼다.
“말은 그래도, 당신을 이대로 보내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캐서린은 침대에서 숄을 꺼내서 입고 밖으로 나왔다. 로렌디스는 배웅을 나오지 말라 이야기했지만…… 지금 그를 보내면 언제 또 볼지 모를 일이니까.
첨탑.
캐서린은 출정식에 참여하는 대신 공작성의 첨탑을 찾았다. 첨탑 아래로 공작성의 전경이 훤히 다 보였다. 그리고 캐서린은 출정식을 위해 모인 기사단을 내려다봤다.
“저기인가?”
헬렌의 기사단은 흙먼지를 날리며 멀어졌다.
‘이번 전쟁은 반년 만에 끝내지 못해.’
로렌디스는 반년 만에 끝내고 온댔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는 아마 1년은 돼서야 돌아올 거다.
“떠나시네.”
캐서린은 떠나는 로렌디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첨탑에 기댔다.
“마님, 바람이 차갑습니다.”
“이만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몸시중을 들던 하녀가 캐서린에게 우려를 표했다.
“각하께서 주무신다고 깨우지 말라 말씀하셨는데……. 나오실 줄 알았으면 치장을 도와 드릴 걸 그랬습니다. 옷도 침의 그대로 나오셨군요.”
“로렌디스는 배웅 나올 것 없댔지만. 그래도 뒤에서라도 몰래 지켜보고 싶었어.”
하녀들은 눈물을 훔치며 조용히 물러났다.
나를 안쓰럽게 여기나. 하긴. 결혼식 다음 날 신랑을 전쟁터로 떠나보냈으니, 하녀들의 반응도 이해된다.
“각하께서는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로렌디스가 탄 말이 점점 멀어진다. 희뿌연 먼지가 날리고, 캐서린은 그의 뒷모습만 가만히 좇았다.
* * *
캐서린은 침대에 누워 온종일 잠만 잤다. 졸음이 머릿속을 노곤하게 잠재우고, 기분도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각하께서…… 밤새 안 재웠는가 봅니다.”
“아주 간밤에 반쪽이 됐습니다. 넨시 님께서 마님께 말씀이라도 걸어 보십시오. 지금 마님께서는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렵습니다.”
캐서린은 어설프게 웃었다. 이들이 나를 어려워한다고? 내가 어렵나? 캐서린은 딱히 어려운 성격도 아니었다. 캐서린은 그저 삶에 무기력할 뿐이었다.
그간 캐서린은 조용히 지내면 조용히 지냈지, 이들과 가깝게 지낸 적도 없다. 일부러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히 거리를 뒀다. 아아. 아닌가? 나는 이들에게 가까워질 빌미조차 안 줬구나. 그래서 그랬나? 하녀들의 시름은 더 깊어졌다.
“마님, 허리가 아프십니까?”
“그냥 피곤해서.”
캐서린은 앓는 소리를 내며 멋쩍게 웃었다. 초야 날은 잠을 거의 못 잤다. 침대가 넓어도 둘이서 잠든 건 처음이었다.
캐서린이 허리를 콩콩― 두들기자, 하녀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캐서린으로서도 지금의 몸 상태는 뭔가…… 이들에게 직접 의논하기 난감한 일이었다. 하녀들의 낯빛이 점점 붉어지더니, ‘어머어머’ 하며 표정을 수습했다.
“따뜻한 물로 목욕 준비라도 해 드리겠습니다.”
“목욕물만 준비해 줘. 씻는 건 혼자서 씻을게.”
“근육통을 호소하시면서…….”
넨시도 조심스러워하기에, 한 번 더 거절하려던 캐서린은 그냥 이들에게 맡겼다.
침실 중문을 지나자 침실 내 욕실이 나왔다. 내성의 주인내외가 쓰는 욕실로, 하녀들의 손이 닿아서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유리서랍장에는 비누와 향유를 종류별로 가져다 놓고, 구분하기 좋게 상품 이름까지 적어 두었다.
캐서린은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지금도 눈꺼풀이 무거웠다.
하녀들이 준비해 준 목욕물로 몸부터 가볍게 씻었다. 목욕이나 몸치장은 혼자 끝내고, 나머지는 하녀들에게 맡겼다.
“근육통약을 드릴까요?”
“아니야. 며칠 쉬면 돼.”
“각하께서는……. 후우, 배려심이 너무 부족하십니다.”
이들의 한숨이 깊어진다. 하나둘 목소리를 섞더니, 이들의 속삭임은 곧 하소연으로 이어졌다. 몸을 씻기고 닦으면서도, 그날의 농밀한 기운까지는 닦아 내지 못했다.
“하루를 꼬박 일어나지도 못하게끔…….”
“오랫동안 못 본다더라도 배려라는 걸 하셔야지…….”
하녀들이 말끝을 흐렸다. 잠결에 드문드문 듣긴 했는데, 꾸벅꾸벅 졸다가 모두 흘려들었다.
캐서린은 목욕을 끝내고 가벼운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다른 하녀들도 서둘러 따라붙었고, 보송보송한 머리를 빗겨 주었다.
거울 너머로 침실 전경이 비쳤다. 침실 벽 한쪽에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헬렌의 지도였다. 지도의 테두리도 모두 순금이었다. 캐서린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소파에 깊게 기댔다.
‘잠 와.’
캐서린이 턱을 괴고 소파 팔걸이를 톡톡 두들기는데, 넨시가 캐서린의 어깨를 마사지하며 이야기했다.
“피곤하신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여기서 더 주무셨다간 밤에 한숨도 못 잘 겁니다. 오늘은 날씨도 좋잖습니까? 산책이라도 나가보는 게 어떠세요?”
“역시 잠을 더…….”
“근육통은 조금 더 움직여야지 낫습니다. 주치의를 불러 기력을 보강하는 약을 지어 올리라 이야기하겠습니다.”
캐서린은 주치의 이야기에 흠칫했다.
“그럼, 서재라도 다녀올게.”
“책을 좋아하십니까?”
멋쩍게 답을 얼버무리며 숄을 둘렀다. 복도로 나오자 촛불이 잔잔히 일렁였다.
“본성 서재로 가는 길을 아십니까?”
“이미 한 번 길을 봐 뒀어. 서재까지는 혼자 다녀올 거니까 쉬어.”
로렌디스를 배웅한 게 새벽이었는데, 벌써 해가 저물었다. 로렌디스도 지금쯤이면 전선에 도착했을까. 밤바람이 차갑다. 감기를 조심할 만큼, 약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은 된다.
“그분은 무사할까?”
“각하께서는 무탈히 돌아오실 겁니다.”
그는 전쟁영웅이다. 이번에도 무탈히 돌아올 것이다. 다만, 너무 일찍 오는 건 아직 고려해 보지도 못했다. 재회한 뒤의 일 따위 잊고 지냈다.
재회하면 이혼하고 헤어질 마음만 먹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