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로렌디스가 면사포를 걷어 냈다. 그리고 턱을 기울였다.
“내가 할 테니까 눈 감고, 입술에 힘 빼.”
아주 담백했다. 여과 없이 꺼낸 이야기에, 캐서린은 입술만 뻐금거렸다. 캐서린이 멍하게 그를 올려다보는데, 커다란 손이 한쪽 뺨을 가렸다. 손도 투박했다. 검을 잡는 손이라 그런지, 굳은살이 박인 손이 딱딱했다. 그래도 뺨을 감싸는 손아귀는 가벼웠다. 턱을 받치는 손가락이 목 주변을 감쌌다.
―츱
짧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담백했다. 입술 사이로 숨결을 나눴다.
혀가 입안을 가르고 들어왔다.
이건 조금 짙다. 예상보다 더 짙다. 입천장을 쓸고서 뿌리를 툭, 건드리는 혀가 입가를 간질였다. 짙고 깊은 입맞춤에 숨이 턱 막혔다. 그저 시늉만 할 줄 알고서 짧게 끝날 거라고 여겼다.
목덜미를 감싼 손아귀가 목을 받치고, 몸을 뒤로 젖혔다. 캐서린은 파르르 떠는 손을 품속에 감췄다.
그는 시종일관 건조했다. 짙은 눈동자에서는 어떤 감정도 엿볼 수 없었다.
‘감정 없이도 가능하구나.’
허울뿐인 사이에 다른 사감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객들은 숨을 참고서 경악했다. 여기저기서 헉헉거리는 탄식이 들리고, 몇몇은 얼굴을 붉히며 부채를 펄럭였다.
“출정식으로 바로 떠난대서, 그저 허울뿐인 아내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가 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끼리끼리 모여서 속닥거렸다. 예식을 약식으로 치렀다면, 허울뿐인 아내라며 뒤에서 이야기하려 했구나.
딱딱하게 굳은 몸이 파르르 떨렸다. 예식이다. 결혼의 과정일 뿐이다.
너는 지금까지 아주 잘 견뎠어.
예식이 끝났다. 면사포를 걷어 올리며, 캐서린은 나지막하게 신음했다.
‘나 지금 맨정신이 아닌 것 같다.’
여기서 맨정신을 유지한다면 그게 더 대단한 거다.
“잘 버텼어.”
“저, 지금 주저앉을 것 같아요.”
“그건 안 되고.”
로렌디스가 부축해 주는 대로 그에게 몸을 기댔다. 얕은 숨이 터졌다. 결혼식이 끝나간다. 그럼 계모가 캐서린에게 보호자라며 접근할 명분도 사라지게 된다.
‘아버지, 저 이제 밀던 자작가에서 빠져나왔어요.’
이제는 기억에도 없는, 어린 시절에 잠깐 본 아버지다. 이제는 너무나 까마득해서 얼굴도 기억 안 난다. 어린 시절을, 아주 잠깐이지만 함께 해 준 친아버지.
‘내게 남은 가족은 이제 진짜 없구나.’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면사포를 내려 주며 물었다.
“무슨 생각 중이지?”
“다 끝났다고, 그런 마음이 들어서요.”
예식장의 저 멀리, 구석진 곳에 계모가 서 있었다. 어머니도 왔구나. 멀리 서 있어도, 어머니는 한눈에 들어온다. 캐서린은 괜스레 멈춰 서서 계모와 눈을 맞췄다. 계모는 희게 질린 낯으로 입술을 더듬거렸다.
‘당신이랑 얼굴 볼 날도 얼마 안 남았어요.’
가족들은 이제 캐서린에게 아무런 위험도 되지 못한다. 그들은 캐서린에게 아무런 가치도 되어 주지 못하고, 의미가 되어 주지도 못한다.
* * *
어맨다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일이 왜 이 지경까지!’
지금 그 아이는 독에 중독돼서 죽어 가고 있는데……. 살사초라는 독에 중독돼서 하루하루 죽어 가는 중이다. 아무도 알면 안 된다. 그 아이를 독살하려고 한 건, 어맨다만 아는 비밀이다.
처음에는 그 아이를 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죽일 때 죽이더라도 몸값은 받자는 마음에, 곧 죽을 아이를 노귀족에게 팔아 치울 계획도 짰고.
‘그런데 왜 쟤가 저기 있어?’
노망난 노귀족의 첩실이 죽는 건 가벼운 일이다. 아이가 죽어도 금방 잊힐 것이다. 그런데 공작가의 정실부인이 죽는 건 다르다. 그 위치도 그 무게도 다르다.
혹시나 저 계집애가 죽어서 독살이라는 게 알려진다면, 이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 아이는 몰라. 절대.’
모른다. 모르는 게 맞다. 독초도 음지의 더러운 족속들에게서 얻어 냈다. 그것도 아주 악독한 독초였다.
캐서린은 얼마 못 가 죽는다. 그럼 그냥 그 아이가 병약했다고 이야기해서 그 죽음을 묻으면 된다.
“엄마, 캐서린이 나중에 캐빈 백작 일을 문제 삼으면 어떡해요?”
“그건 괜찮을 거다. 노귀족에게 팔려 나갈 뻔한 일은 창피한 일이다. 제 입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낼 리 없지.”
캐빈 백작은 이미 죽었으니 됐다. 그런데 캐서린 그 아이가 남았다.
“그 애는 모를 거다. 우리는, 그저 그 아이가 죽기면 기다리면 된다. 오늘은 조용히 가자. 그 아이가 우리에게서 수상한 기색을 느끼지 못하게끔.”
* * *
“신방으로 드십시오.”
캐서린은 흰 침의 차림으로 침실 앞에 섰다. 침의는 얇았다. 그래서 숄을 덧입어서 몸을 감쌌다. 캐서린은 숄로 몸을 덮고 숨을 깊게 뱉었다. 숄은 결혼식 때도 썼던 헬렌의 인장이 들어간 그 숄이었다. 나름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서인지, 하녀들도 숄을 입혀 줄 때는 더더욱 조심스러워했다.
‘후우-’
침실 문을 열자 로렌디스가 문 앞까지 가까이 다가왔다.
“먼저 와 있었네요?”
“한동안 오래 기다려야 할 건데, 오늘까지 기다리게 하는 건 못할 짓 같아서.”
로렌디스도 침의 차림이었다. 그는 흰 셔츠에 검은 면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게 낯설었다. 지금 그는 제복을 입을 때보다 더 자유로웠다. 체격이 워낙 커서 그런지, 대충 걸쳐 입은 셔츠도 옷매무새가 근사했다. 흰 셔츠는 더 나른해 보였고, 면바지도 빳빳하게 몸에 맞았다.
마침 로렌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왜 서 있어?”
로렌디스가 침대에 앉으며 이야기했다. 긴 피로연 때문에 피곤했다는 듯, 로렌디스의 눈 속에도 피로감이 가득했다. 결혼식 전까지도 회의실에서 지냈다더니, 그 피로감이 캐서린에게까지도 전해진다.
“서 있지 말고 앉아.”
로렌디스의 곧은 손짓이 캐서린을 이끌었다.
“어떻지?”
“어떤, 게요?”
“지금 기분이랄까.”
그런 건 잘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른 아침부터 몸을 씻고 닦으며 경건히 했고, 그 위에 흰 예복을 입어서 꾸몄고, 이제는 얇은 침의 차림으로 그의 앞에 섰다.
침대 맞은편 간이소파에 앉자 그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이제야 자유네요.”
“후련하다는 표정이네.”
소파 옆에는 포도주와 청포도 한 송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투명한 와인 잔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 눈이 뭘 보는지 영 모르겠어. 나중에 어쩌려는 거지? 가문과도 등지고 헬렌까지 떠난다면, 어디로 가려고?”
로렌디스가 궁금증을 가지는 건 이해한다. 가문과도 등졌다. 헬렌은 곧 떠날 예정이다. 그럼 그다음은? 그다음은 작별이지 뭐. 세상과도 작별하고, 가문과도 작별하고, 당신과도 작별하고.
“가문을 버린 건 아니에요. 자작가는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이에요. 새어머니와 의붓언니를 내쫓고…… 제 마음속에 간직할 거예요.”
시한부 마지막 삶에 다 떠안고 떠난다면 모를까, 양보는 그녀의 길이 아닌 것 같다. 가족들에게서 다 빼앗을 거다.
새엄마 가족에게는 자작가의 먼지 한 톨이라도 양보해 줄 마음이 없다. 지금부터라도 하나하나 빼앗으면 된다.
처음에는 계모에게 기대란 걸 했다. 세상이 캐서린에게 이만큼이나 잔혹할까. 그래도 딸이다. 딸을 돈 받고 팔아 버리는 어머니가 어딨어. 그럴 리 없다고 여겼다. 잠시나마 엿본 그 미래가 망상이라고 믿고 싶었다.
“다만, 기대는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더라고요.”
캐서린은 다 놓았다. 지나간 인연에 미련을 가지기엔, 캐서린은 너무 지쳤다. 곧 떠날 세상이다. 이제껏 이어 온 인연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시겠나?”
“아니요.”
“한 잔 마시는 게 좋을 것인데…….”
캐서린은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창밖 멀리 두는데,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팔을 당겼다. 이끌리듯 끌려온 몸은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다음은 캐서린도 잘 안다.
“마실게요.”
“독하니 조금씩……. 포도주를 음미할 생각으로 마셔야지, 목구멍에 때려 넣듯 넣어 버리면 어떡해?”
포도주는 씁쓸했다. 그 향이 예상보다 독했다. 헬렌의 술은 독하구나.
겨울을 길게 보내는 지방의 술은 독하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났다. 씁쓸한 향과 아득한 기분이 꽃잎처럼 몸을 감쌌다. 그 향이 은은히 풍겼다.
“그럼 침대로 와.”
“……잠자리를 꼭 같이 해야 하나요?”
이미 아는데도 되묻는다. 이런 낯선 기분은 죽어서도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온몸이 뻣뻣하게 옥죄어 오는 기분이었다.
“초야가 없으면 부부더라도 혼인 관계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캐서린은 조심히 고개를 가로질렀다. 그런 건 아니에요.
“어차피 이 결혼은 깨져요. 없던 일로 만들려면…….”
“그간 영애가 하는 말이 왜 거슬리는지 고민해 봤어. 그 입술이 조잘거릴 때면 꼭 내 심기에 거슬리는 말이 나왔거든. 이젠 알겠어. 너는 이미 끝을 논하고 있어. 계약하자며 내게 손을 뻗어 두고, 너는 도망갈 길부터 찾잖아.”
캐서린이 고요히 읊조리는 이야기는 낭독문 같았다. 계약 관계에서 나눌 만한 계약 조항 같았다.
이건 이해관계로 맺은 계약이다. 그리고 그 이해관계의 가치가 없어지면 계약은 끝난다. 이번 계약은 헤어짐을 위해서 맺은 계약이었으니까.
로렌디스가 전장으로 떠나면, 앞으로 긴 시간 보기 힘들 것이다. 그 긴 시간은 연락도 닿지 않는 먼 곳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을 보낼 것이고, 그 긴 기다림이 끝나면 또 헤어질 준비를 시작할 거다.
‘어차피 깨질 혼담, 당신이 빠져나갈 길이라도 주려던 건데……. 나는 떠나더라도 당신은 헬렌에 남으니까.’
로렌디스가 그 속마음을 읽어 내듯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1년이면 끝날 인연이지. 당신이 초야를 거부한다면 나도 조용히 넘길 거야. 거절한다면 지금 거절해.”
입술이 닿았다. 혀끝이 아랫입술을 훑자 씁쓸한 포도주 향이 풍겼다.
“싫나?”
“잘 모르겠어요.”
싫다거나 좋다거나. 그런 개인적인 기분을 다룬 적이 극히 드물었으니까. 그런 걸 선택할 기회도 없었고, 설령 싫더라도 캐서린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사소한 감정들은 잊고 지냈다.
“아픈가요? 다들 아프다던데…….”
“글쎄. 충분히 젖는다면 그리 아프기만 하진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