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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10)화 (10/129)

10.

그 시각, 캐서린은 가슴을 다독이며 삶을 되짚었다.

힘든 시간이었다. 모두 다 잃었다. 가족도 집도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예전보다는 마음이 편하다.

이제 요양지 찾아 떠나서 덧없는 죽음을 맞이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건너면 될 일만 남았다. 그건 아주 사소한 일이다. 죽음이란 가깝고…….

“아빠, 그냥요. 저도 때 되면 아빠한테 갈래요. 아빠가 나 좀 받아 주세요.”

거울 앞에서 뽀얀 뺨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뺨이 희고 맑다. 뺨이 동글동글해졌다. 헬렌에서 먹고 자면서 몸에 살집이 붙은 것 같다. 캐서린이 무념무상하게 뺨을 만지작거리는데, 인기척이 났다.

“그게 무슨 소리지?”

“……로렌디스?”

“그 입으로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인 건지 세세히 이야기해.”

로렌디스가 야차 같은 얼굴로 뒤에 서 있었다. 검은 제복과 크라바트는 평소보다 간소했다. 그런데도 서늘한 낯빛은 여전했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렸지만, 짐승 같은 저 눈매는 다 가리지 못했다.

다 엿보고 있다. 속속들이 다 파헤쳐서, 그 속마음까지 다 읽어 버리는 것 같다.

“무, 무슨 말씀이신가요?”

“누가, 어딜 따라가느냐는 이야기야. 곱게 자란 아가씨가 그딴 말을 지껄일 만큼, 자작의 죽음이 덧없었다는 뜻이었나?”

로렌디스가 머리카락을 건성으로 쓸어 넘기며 시선을 흘겼다. 서늘한 시선이 캐서린에게 꽂혔다. 캐서린은 그게 또 위협적이라서 뒷걸음쳤다.

“아버지께서 제 곁을 비운 지 5년이 더 됐어요. 그냥, 오늘따라 아버지 생각이 유난히 나서 그래요. 결혼식을 앞뒀으니…… 제 심경이 조금 복잡하더라도, 로렌디스가 이해해 줘요.”

“비단 그것뿐이라고.”

그뿐이다. 당신에게 해 줄 이야기가 그것뿐이니, 그것뿐이라 이야기하는 게 맞다.

“겁먹었나?”

“그건 아니고요. 내일이면 캐서린 밀던이 아니라, 캐서린 헬렌이 되니까요. 그 이름을 지워 낸다는 게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그것 모두 내 건데…… 나는 무덤에 가져가는 것밖에 못 하니까.

캐서린이 속으로나마 억울함을 토로하는데, 로렌디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캐서린의 이마를 손끝으로 툭툭― 다독이며 이야기했다.

“밀던 또한 네 것이다. 너는 자작의 딸이었으니 밀던 또한 네 것이지. 자작에게 딸은 너 하나니까.”

“맞아요. 마지막 남은 밀던은 나예요. ……그러니, 다 빼앗아 올 거예요.”

계모에게 빼앗길 바에야 그냥 다 뺏어서 묫자리까지 가져갈 것이다. 그 재산은 오롯이 다 뺏어서, 그 앞에서 한 줌의 흙으로 다 없애 버릴 것이다. 내가 못 가지면 어머니도 못 가져요.

로렌디스가 잊을 뻔했다며 이야기 꺼냈다.

“어머니께서 영애를 걱정하는가 보더군.”

“……그 여자가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떨어진다.

“외딴 영지에 보내 둔 딸이 걱정돼서 아주 불안 증세에 시달린다던데. 사이가 나쁜 건 맞나?”

사이 나쁜 가족 이상이다. 딸을 죽이려던 가족이니까.

“사이 나빠요.”

“그랬을 것 같아.”

계모와 의붓언니는 캐서린을 치우지 못해 안달이었고,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아버지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계모의 핍박도 심해졌다.

아버지께서는 전장을 오랫동안 누볐고, 그만큼 집안에서의 빈자리도 컸다. 나중에는 아버지께서 전장에서 실종되면서, 캐서린은 살아남기 위해서 혼자서라도 버텨야 했다.

“어머니와 언니도 결혼식장에 초대해야 해. 허울뿐이더라도 호적상의 보호자니까. 그리고 또한…….”

로렌디스가 고민하며 말끝을 흐렸다. 캐서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와 눈을 맞췄다.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이전까지의 일은 수면 아래로 묻힐 거야. 캐빈 백작가의 일도 포함해서 말이야.”

“제가 매매혼으로 갈 뻔했던 일은 조용히 묻힌다는 뜻이죠? 저도 이해해요.”

로렌디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새로운 안주인이 노귀족에게 팔려 갈 뻔했다는 이야기는 약점이 되면 약점이 됐지, 알려져서 좋을 건 없다. 이 결혼식은 탈 없이 조용히 끝나야 한다.

“이해했어요. 이 결혼식, 무사히 잘 끝내라는 이야기잖아요?”

그 또한 맞는 말이다.

“시간이 조금 더 남았어도, 조사라도 더 했을 것을…….”

“조사했으면, 당신은 나랑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로렌디스도 몰라서 캐서린을 헬렌으로 데려온 거다. 다 알고도 시한부 아내를 제 손으로 집안에 들이는 사람은 없을 거니까. 그래서 들키면 안 된다. 엉망이 된 몸도, 계모와의 일도 숨겨야 한다.

‘뭔가 있군.’

로렌디스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혀를 찼다.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할 거야. 이 혼담이 엎어질 일은 없으니까, 혼담이 잘못될까 하는 걱정은 내려 두고. 도망치고 싶다고 마음먹었다면 그것 또한 내려 둬.”

그는 건조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식과 혼례 절차는 예정대로 밟고, 신방에서 잠자리를 가지면 결혼 절차는 끝나.”

신관의 맹세 앞에 결혼식을 치르고, 피로연을 하고, 신방에서 초야를 가지면 결혼 절차는 끝난다.

“그때까지만 버텨.”

“…….”

“그 세상 초연한 표정 좀 그만 짓고.”

곧 떠날 인연.

곧 끝날 만남.

그뿐이다. 긴 침묵이 이어지고 로렌디스가 낮게 웃었다. 그는 이미 캐서린을 속속히 다 들여다본 듯 여유로웠다.

“또 숨기는 눈빛인데. 걱정하지 마. 지금 그 눈으로 내게 거짓을 말하든 무엇을 숨기든, 나는 특별히 괘념치 않아. 대신, 내 눈에 밟히지 마. 가급적이면 숨겨. 꼭꼭 숨겨서 들키지 마.”

로렌디스가 묵직하게 한 마디씩 뱉었다. 그 무게감은 감히 캐서린이 가볍게 여길 수준이 아니었다. 또한, 로렌디스도 가볍게 입을 연 게 아니었다,

“뭐가 됐든.”

그다음에도 그의 말은 이어졌다. 그 말은 고즈넉하고 조곤조곤했지만, 감히 흘려 넘기지 못할 힘이 실려 있었다.

“그걸 내가 아는 날에는, 네가 이 집에서 나가는 것 또한 어려워질지도 모르니. 어디까지나 내 예감이지만 그런 예감이 들더군.”

캐서린은 로렌디스에게 대답하지 못했다. 로렌디스와 비슷한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계약이 순조롭게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 * *

시간은 흘러서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황실에서 보내 준 사자가 헬렌가의 혼담을 축하해 주고, 헬렌의 가신들이 공작성에 모여들었다.

캐서린은 하얀 면사포를 썼다. 면사포의 얇은 천이 눈앞에서 살랑거리고, 하녀들이 캐서린에게 예복을 입혔다. 흰 예복은 캐서린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아름다우십니다.”

“이미 한 번 봐 두시고는.”

“예복은 원래 결혼식 당일 날 가장 빛나는 법입니다.”

예복은 하얀 원단이 몸의 굴곡에 맞춰 흘러내리는 식이었다. 물결 같았다. 몸 선이 가늘기도 했고, 몸의 곡선을 그대로 살리는 재봉사의 솜씨가 출중하기도 했다.

하얀 드레스 사이사이에 작은 보석들이 반짝이고, 은실로 자수를 수놓았다. 그래서 조금씩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은실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어깨에는 망사 천을 덧대서 가녀린 어깨가 희게 비쳤다.

잘록하게 허리가 들어가고, 허리에 덧댄 천도 얇았다. 북부의 추운 계절보다는 따뜻한 봄 날씨에 더 어울렸다.

“그런데…… 춥긴 하겠습니다.”

“예식은 금방 끝나잖아. 그리고 어깨에 헬렌의 인장이 새겨진 숄을 두를 거고. 괜찮아.”

“그래도…… 아가씨께서는 북부 사람이 아니라서, 이런 차림으로 바깥바람을 쐬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넨시가 걱정을 내비치며 캐서린에게 따뜻한 팩을 건넸다.

“일단 이거라도 쥐고 계시면 각하께서 곧 오실 겁니다.”

“고마워.”

“오늘 참 아름다우십니다. 최고로 멋진 날이 될 겁니다.”

캐서린은 면사포를 내려 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헬렌은 남편이 직접 와서 아내를 모셔 가는 게 결혼식의 법도란다. 그래서 법도대로 절차를 지켜서 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헬렌의 가신들도 속속히 도착했다.

“저분이 헬렌의 새로운 안주인…….”

그리고 가신들 사이를 가로질러서 ‘그’가 왔다.

“로렌디스.”

“안 춥나?”

로렌디스가 제복 차림으로 다가왔다. 청색 제복에는 헬렌의 인장이 박혀 있었다. 헬렌을 뜻하는 월계수 나뭇잎 휘장이었다. 기본적인 체격이 있어서인지, 결혼식 예복도 수월하게 소화했다.

“숄을 줘라.”

로렌디스가 헬렌의 인장이 들어간 숄을 캐서린의 어깨에 둘러 줬다. 숄을 덮자 따뜻한 온기가 퍼졌다.

“헬렌의 가호가 영애를 지켜 줄 거야.”

“따뜻해졌어요.”

“이걸 두고 헬렌의 가호라 하지. 외부인에게 추위를 이겨 낼 기운을 주는 의식 같은 거야.”

북부는 지역 특성상 폐쇄적이었다. 헬렌을 둘러싼 산 때문에도 그렇고, 겨울 내내 눈이 내리기도 해서 타지인에게 헬렌은 특히나 혹독했다.

다행히도 오늘은 날씨가 맑다. 눈발이 날린다면 바깥에서 하는 예식을 취소해야 했을지도 모른댔는데, 오늘 같은 날씨면 예식은 계획대로 진행될 것 같다.

“그만 가자.”

하얀 비단길을 따라서 걷자, 헬렌의 기사단이 검을 뽑아서 머리 위로 높게 올렸다. 신전의 공증을 받은 예식이 진행되고,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건 계약이다.’

서로의 이해관계를 놓고 나눈 계약 결혼.

“무슨 생각해?”

“그냥, 계약서라도 써 둘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요.”

시간이 지나면 로렌디스와 이별하게 될 것이다.

로렌디스도 허락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캐서린을 놓아주기로. 그럼 캐서린은 그길로 헬렌을 떠나면 된다.

‘합의 이혼.’

계약서로 공증을 받아 둔 게 아니라서 걱정되긴 하는데, 때 되면 계약대로 이혼 절차를 밟을 거다. 그래도…… 계약서가 없어도 괜찮을까? 이혼 계약서라도 미리 적어둘 걸 그랬다. 어쩐지 그랬어야 했을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예식이 막바지로 흘러가고, 로렌디스가 면사포를 조심히 걷었다. 흰 면사포를 쥔 그의 손가락이 목덜미에 닿았다.

“눈.”

“……네?”

“감아.”

예식의 마지막 절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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