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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9)화 (9/129)

9.

캐서린은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벤치에 기댔다. 시한부 삶에 큰 미련도 없고, 삶은 이미 내려 두었다. 미련은 발목을 붙잡는 법이고, 욕심보다는 포기가 삶을 이어 나가기 더 수월했다. 그래서 다 내려놓고 시간이 지나는 대로 흘려보냈다.

하녀들은 그런 캐서린을 걱정했다. 사람이 너무 조용해지고 생기를 잃어 가니까, 하녀들 입장에서도 걱정이 점점 더 느는 거다.

‘결혼식을 앞두고 마음이 싱숭생숭하신가?’

‘친정집이 그리우신가?’

걱정은 고맙지만 모두 다 아니다. 캐서린은 조금 지쳤고, 혼자만의 휴식이 필요할 뿐이다.

‘덧없지.’

인생은 짧게 왔다가 짧게 떠난다. 그럼, 무릇 사고방식도 단조롭고 단순해지는 거다. 하녀들은 그런 캐서린을 위로한다며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인생 최고로 아름다운 날이 될 겁니다.”

“결혼식을 앞둔 새신부님께서 왜 울적해 보이십니까?”

넨시가 울적해 보이는 캐서린을 다독였다. 옆에는 웨딩드레스가 마련됐다. 그리고 드레스 주변에 장미꽃을 흩뿌려 두었다.

꽃길만 걸으라는 뜻이다. 웨딩드레스 곁에 장미꽃을 뿌려 두는 건, 헬렌의 결혼 풍습이었다.

웨딩드레스도 마련됐고 결혼 준비도 끝나 간다. 그런데 캐서린은 여전히 초연했다.

“왜 이렇게 초연하십니까?”

“글쎄. 햇살이 좋아서?”

“햇살이 나빠도 여기서 잠만 주무시잖아요. 차라리 산책이나 하면서 좀 걷는 건 어떠세요?”

“나중에. 지금은 이대로 쉬고 싶거든.”

하녀들은 결혼식 준비로 바쁘게 뛰어다니는데, 결혼 당사자들은 무덤덤하게 평온을 지켰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찾지 않으며 각자 시간을 보냈다.

당장 결혼식만 해도 성급하게 잡혔건만, 두 부부는 결혼식 전부터 서로를 내외했다. 하녀들은 그런 모습에 아쉬움을 토로하고, 캐서린은 못 들은 척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로렌디스는 오늘도 바빠?”

“출정식 준비로 하루 종일 집무실에 계세요.”

로렌디스는 요즘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어지고, 그사이에 집사는 캐서린에게 헬렌의 역사를 가르쳐 준다며 열의를 불태웠다. 미안하게.

‘나는 숨만 쉬어도 좋아.’

캐서린은 비스듬하게 벤치에 기대서 마사지만 받았다. 어차피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 그래도 제임스 박사에게 받은 영양제가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다. 요즘 한라원에서 받은 영양제를 먹고 있는데 효험이 좋은 것 같다. 하녀들도 그걸 느낀 건지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낯빛이 좋아지셨어요.”

넨시도 캐서린의 낯빛이 좋아졌다고 이야기했다. 피부나 머릿결이 부드러워지고 혈색도 좋아졌다. 영양제 하나로 몸이 이만큼 차이가 나나? 이 몸도 어지간히 엉망이었던 모양이다.

“이번 기회에 주치의께 한번 연락드려 보는 거 어떠세요?”

캐서린은 흠칫 굳었다. 여기서 왜 주치의 이야기를 꺼내지. 캐서린이 시한부인 건 헬렌에 아직 비밀이다. 그래서 캐서린은 말을 둥글게 피했다.

“주치의는 왜?”

“낯빛이 밝아지셔도, 아가씨가 쉽게 피로해지시고 잠이 많으셔서. 혹시나 어디 아픈가 걱정됩니다.”

캐서린은 뺨을 멋쩍게 가렸다.

“아픈 건 아니야.”

“각하께 말씀 올려 볼까요?”

아픈 걸 숨기는 입장이라서 더 뜨끔했다. 캐서린은 마른하늘을 올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나중에.”

“알, 알겠습니다.”

이제는 떠난다고 마음먹었는데, 이상하게 주변에 사람들이 더 다가오는 느낌이다. 미련 없이 놓는다고 놓으니까, 세상이 내 발목을 잡는 기분이랄까. 말 몇 마디로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에, 괜히 싱숭생숭해졌다.

결혼식을 하루 앞둔 날에도,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이번 혼담은 그저 수단일 뿐이다. 수단은 수단으로만 다뤄야 한다. 로렌디스에게 캐서린이 결혼 도구이듯, 캐서린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괜찮다.

* * *

늦은 시각이었다. 해는 이미 저물었고, 달빛도 구름 뒤에서 숨어서 날이 쌀쌀하기까지 했다.

헬렌의 북풍은 밤이 되면 더 혹독해진다. 그래서 북부는 매서운 북풍을 막아 내려고 견고한 성벽을 쌓았고, 북풍을 막아 내는 성을 지어 올렸다. 그게 헬렌 공작성, 로렌디스가 머무는 본성이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집무실에 걸린 벽시계가 정각을 가리켰다. 로렌디스는 야간 업무를 끝내 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출정식에 오르기 전에 공작성 업무를 끝내 둔다고, 로렌디스는 늦게까지 집무실에 머물렀다. 그래서인지, 보좌관도 내내 퇴근하지 못했다.

로렌디스는 아직까지도 곁에서 잔업을 보는 브레디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며칠 내내 무리했군. 너는 기사도 아닌 놈이 왜 그리 무리해?”

“보좌관의 본 업무입니다. 각하께서 집무실에 남아 계시는데 보조관이 무슨 수로 퇴근합니까.”

브레디가 안경을 스윽, 올려 쓰며 이야기했다. 짙은 피로감에도 냉정하게 주인을 보필하는 게 보좌관의 몫이었다.

요즘 로렌디스는 결혼식보다 출정식에 집중하고 있었다. 전장에서는 계속 밀서를 보내왔다. 그만큼 그의 온 신경이 야만족에게 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렌디스는 밀서를 펼쳐 읽고 관자놀이를 또다시 꾹꾹 눌렀다. 그래도 머리가 뻐근하다.

밀서에 빼곡하게 적힌 글씨는 야만족의 동태를 담아내고 있다. 빽빽한 글을 읽다가 로렌디스가 눈두덩이를 마사지하며 밀서를 덮어 뒀다.

“전장에서 뭐랍니까?”

“야만족의 규모가 예상보다는 작은가 보군. 예정보다 더 일찍 끝내고 올 수 있겠어.”

브레디는 로렌디스의 일정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다녀오면 몇 년은 또 조용하겠군요.”

긴 악연이다. 이 지긋지긋한 악연은 몇십 년째 이어졌다. 그 세력은 작지만, 또 그렇다고 놔두기엔 거슬리니까.

“이 지겨운 족속들은 어디 눈 속에 파묻히지도 않나?”

“잡초 같은 근성으로 버텨 내는 게 질립니다.”

경계선에 보내 둔 병사들이 잘 해 주지만, 그래도 사령관이 직접 가는 것과 효율 차이가 크다.

“자작저는 어떤가?”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의붓딸은 지금 칩거했고, 자작 부인이 극심한 불안 증세에 시달린다더군요. 캐서린 아가씨를 계속 찾는답니다.”

서류를 정리하던 로렌디스는 뜻밖의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의붓딸이 칩거한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계모는 왜 캐서린을 계속 찾을까.

자작가에서는 이미 캐서린을 노귀족에게 팔려던 전적이 있다. 지금 그런 딸이 헬렌의 이름으로 보호를 받는데, 계모는 불안 증세에 시달린다.

로렌디스는 탁자를 툭툭― 두들겼다.

“그 둘이 그런 살가운 사이였나?”

“세상에 그런 악연도 없을 만큼 사이가 나빴습니다. 각하께서도 지난밤에 보셨잖습니까. 어느 집 부모가 딸아이를 칠순을 훌쩍 넘은 노귀족에게 팔아넘긴답니까? 그 집안사람들은 인간도 아닙니다.”

캐서린과의 첫 만남 때도 그랬다. 캐서린은 세상의 미련을 놓고 모두 포기한 사람같이 로렌디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받고 지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캐서린은 이 집안에서 빼 주겠다던 이야기에 흔쾌히 따라나섰다. 계모를 따르고 있었다면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네가 더 화가 났구나.”

“헬렌의 예비 마님입니다. 각하께서 빌어먹을 비혼주의자를 운운하며 혼인을 피한 시간이 십여 년……! 죄송합니다. 빌어먹은 부분은 못 들으신 거로 해 주십시오.”

“나중에 자작저로 사람을 보내서 혼인 동의란에 부모의 서명이나 받아 와라.”

제국에서는 여자가 결혼할 때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된다. 황제의 인가로도 충분하지만, 뒷말을 최소화하려면 자작가의 서명도 받아 두는 게 낫다.

설득하는 게 아니다. 이건 압박이다. 시골의 자작가 하나를 압박하는 건, 로렌디스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 입을 막아 버리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다. 헬렌의 권력이란 그렇다.

로렌디스는 심드렁하게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잊었던 걸 물었다.

“밀던 자작의 시신은 아직 찾지 못했나?”

브레디는 가슴에 손을 얹고 묵념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이미 5년 전 실종된 분입니다. 그 시신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 눈 속을 다 걷어 내서 찾을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헬렌은 추운 북부 지방이었고, 한겨울에도 전쟁이 치러지는 곳이었다. 야만족과의 싸움으로 국경선을 지키기까지, 헬렌의 안녕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지켜져 왔다. 그리고 밀던 자작도 헬렌의 가신으로 전장에 올라 불꽃을 틔웠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추가 수습을 시작하겠습니다. 밀던 자작님의 시신 또한 찾을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그만 가자. 밤은 이미 늦었다.”

로렌디스는 제복 단추를 풀며 집무실에서 나왔다. 밖은 이미 어둑해졌고, 사람들도 다 조용히 물러났다. 집무실에서 침실로 몸을 트는데, 복도 끝 편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저쪽은…… 캐서린, 그의 피후견인이 머무는 방이었다.

“오늘은 예비 마님께서도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시군요.”

“새벽이 다 지났는데 왜?”

“그건 저도 모르겠는데……. 한번 들르시겠습니까?”

“너는 이만 퇴근해.”

브레디가 조용히 물러났다. 로렌디스는 텅 빈 복도를 한 번 둘러보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걸음은 캐서린의 방문 앞에서 멈췄다. 그는 조용히 캐서린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 야차처럼 표정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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