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로렌디스가 손을 내밀어서 햇볕을 가려 주고 있었다. 무심하게 손을 거둬들이고 팔짱을 끼는 모습은 군더더기 없이 말끔했다. 그는 셔츠 소매를 접어 올리고 커다란 손아귀로 두꺼운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깼나?”
“깜빡 잠들었는가 봐요.”
적막한 공기가 방 안을 채웠다.
방이 텅텅 비어 있었다. 하녀들도 다 자리를 비운 뒤였다.
캐서린은 느릿하게 눈동자를 깜빡거리다가, 몸을 슬금슬금 일으켰다. 그리고 멀거니 로렌디스를 올려다봤다.
‘이분이 왜 여기 계시지?’
로렌디스는 흑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내려오는 상의가 몸에 꼭 맞았다. 군대를 이끌고 국경선 주변을 넘나들어서일까? 로렌디스는 가만히 서 있어도, 군인 특유의 기세를 지우지 못했다. 캐서린이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는데, 로렌디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이젠 내 예상이 맞는 듯하군. 꼭 내가 무언가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거든.”
로렌디스가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나한테 숨기는 게 있나?”
로렌디스가 고요한 눈짓으로 캐묻는다. 이야기하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쟁영웅이다. 보통 그런 이들일수록 사람을 관찰하고 꿰뚫는 부분에서 능숙하다. 어설프게 그를 속이려 들면, 그 거짓말은 오히려 스스로의 목을 옥죌지도 모른다.
“너는 나를 두려워해. 이번 혼담을 논하면서도 그랬지. 네 입으로 직접 내게 계약하자는 이야기까지 꺼내 두고 왜일까? 이번 혼담이 뜻대로 성사되지 못할까 봐서? 아니면, 이번 혼담으로 네 삶이 내게 종속될 게 두려운가?”
어설프게 그를 속여도, 그건 마지못해 속아 주는 것에 가깝다. 여기서 거짓으로 대답한들, 어설픈 대답으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건 어렵다.
캐서린은 지금 두렵다. 이 혼담이 이대로 이뤄지고, 그 끝이 어떨지 몰라서.
‘당신이 내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우리 사이가 조금 더 복잡해질지도 몰라요.’
당신은 시한부 아내를 밖으로 내몰 수 없으니까, 아마도 이혼을 거부할 거고.
캐서린도 본능적으로 느꼈다. 로렌디스가 지금 이 모든 사실을 알아 버리면, 그는 캐서린을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그래서 끊어 냈다. 어차피 끝날 인연이다.
“1년이잖아요. 로렌디스가 돌아오면, 곧 끝날 인연이에요. 그 인연에 너무 깊게 발을 딛지 마세요.”
당신이 전장에서 돌아올 때면, 계약 기간도 이미 만료됐을 것이다. 그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헤어질 사이다. 로렌디스에게 개인적인 짊을 짊어지울 마음도 없고, 덮어 둔 데는 이유가 있다.
“1년이었나?”
처음에는 그의 중얼거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짧으면 반년.”
“네?”
“반년 내로 돌아오지.”
캐서린이 이 계약에 문제점이 생겼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직감했다. 일이 꼬이고 있다. 아주 예전부터 차츰차츰 꼬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 도화선이 선명하게 보인다.
“계약 기간은 1년이잖아. 그럼, 그때 설명해야 할 거야.”
이대로 조용히 끝내면 될 일을. 서로 못 본 척 못 들은 척 넘기면 될 일을. 당신은 왜 눈에 담고 귀에 담을까. 손끝이 저릿해져 온다.
“왜 저를 신경 쓰세요?”
로렌디스는 고요히 답했다.
“죽은 가신에게 보이는 예우지.”
“……아버지요?”
로렌디스의 표정은 무덤덤했으며, 그 목소리는 우는 아이를 달래는 듯 캐서린을 어르는 것 같았다. 흑색 제복은 그런 무던한 말투와 표정에도 잘 어울렸다. 딱딱하고 정적이었으며, 덤덤하고 삭막했다.
“내가 좋아서 그런 건 아니네요.”
아버지께서 전장에서 실종되어서 죽은 건 사실이지만, 그 전장에서 실종되거나 죽은 건 비단 아버지만의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많은 희생자 중 하나다.
로렌디스는 고요히 침묵하다가 느지막하게 답했다.
“이 결혼에 감정은 없어.”
“아아…….”
“이해관계가 있을 뿐이지.”
물론 결혼에 꼭 감정이 필요한 건 아니다. 이해관계가 잘 맞는다면 그걸로 된 거다.
서로의 실리로 서로를 묶는 건 일종의 계약 행위이기도 하며, 이 혼담도 계약 행위다. 그리고 그 1년간의 계약 기간을 채우고 이곳을 떠날 채비를 끝내면. 캐서린의 책무도 거기서 끝난다.
그러니 로렌디스의 말에 새삼스러울 필요는 없다.
* * *
이른 아침부터 하녀가 뜻밖의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아가씨 재봉사가 왔습니다. 마담 니콜과 제자 제임스라는군요.”
“이름이 익숙한데…….”
캐서린은 며칠 전에 음지에 나갔던 일을 떠올렸다. 불법 왕진 의료를 부탁했고, 한라원에서 약속한 일주일이 지났다. 즉, 제임스 박사와 니콜이 올 때다.
‘좀 더 자고 싶건만.’
세상 모든 게 성가시다. 숨만 쉬면서 여생을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상살이가 그리 녹록지는 않다.
헬렌의 공작성은 요즘 하루에만 손님이 몇백 단위로 드나들었다. 모두 결혼식 준비로 불러들인 손님이었다. 그리고 이번 손님은 아주 먼 길에서 찾아온 손님이었다.
“마담, 인사를 올리십시오. 헬렌가의 예비 안주인, 캐서린 님입니다.”
세련된 정장을 입은 남녀가 걸어왔다. 제임스 박사와 조수 니콜이었다. 제임스 박사는 꼬질꼬질한 가운을 벗고 흰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를 입었는데, 모자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까지 가렸다.
“마담 니콜입니다. 이쪽은 제 조수, 제임스입니다.”
“아가씨께서 직접 찾은 재봉사라고 입구에서 이야기했답니다. 아는 얼굴이십니까?”
캐서린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재봉사가 아닌 한라원의 의사들이지만, 아는 얼굴인 건 맞다.
제임스 박사는 허리를 짚고 ‘윽-’ 소리를 얕게 냈다. 진료실에서 연구만 하더니, 등이 굽어서 그런 모양이다. 허리를 짚고 끙끙 앓는데, 저절로 측은지심이 든다.
어쩐다. 캐서린은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 나가 줘.”
니콜이 몽글몽글한 곱슬머리를 만지며 서 있었다. 응접실이 빈 뒤에도 복도가 비워지기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캐서린은 그대로 이마를 짚었다.
“그쪽은 목숨이 두 개인가? 니콜만 보낸다더니?”
“여벌로 들고 다니는 편은 아니지. 검사 결과는 직접 전하는 게 맞아서 급히 찾아온 거다. 빌어먹을. 허리가 아파서 오래 나다니지도 못해.”
제임스 박사는 진단서를 시큰둥하게 훑어 내리며 답했다.
“독이 맞다. 피에서 살사초의 독이 발견됐어. 이건 나나 되니까 알아본 거고, 나나 되니까 억제제를 구해 온 줄 알아라.”
제임스는 품에서 약제와 진단서를 꺼내더니 진단서부터 내밀었다. 살사초 중독반응에 동그라미로 양성 표기를 해 뒀다.
제임스는 품에서 이것저것 꺼내다가, 드레스 자락이 걸리적거리는지 팔을 버둥거리며 품에서 무언가를 탈탈 털었다. 빨갛고 파란 약병이 후두두 쏟아졌다. 제임스가 눈짓하자, 니콜이 품에서 약 봉투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 탁자에 올려 두었다.
“이게 살사초라는 독초입니다.”
약 봉투를 열자 붉은 꽃이 달린 약초가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예쁜데…… 이게 독초라고. 꽃잎은 동글동글하고, 들꽃처럼 향긋한 향을 풍겼다. 달콤한 꿀을 꽃에 발라 둔 것 같았다.
“향이 좋네.”
“향 자체는 유해하지 않습니다. 만지거나 향을 맡는 거로는 중독될 일이 없거든요.”
어디서 자주 맡아 본 향이다. 달콤 쌉싸름한 향.
어디서 맡았을까? 익숙하다. 꼭 화원에 와 있는 것처럼 향이 은은히 퍼졌다.
“살사초는 말리면 그 독성이 짙어진다고들 하더군요. 그런데 그 향이 좋아서 식용으로 착각하기 좋습니다.”
그리고 니콜이 마른 살사초 꽃잎을 꺼내 내밀었다.
붉은 꽃잎을 말리면 은은하니 향긋한 향이 나는 게……. 그래. 이건 익숙한 찻잎이었다.
“어디서 본 건지 알겠습니까?”
“집에서 어머니께서 챙겨 주던 꽃차야.”
달콤 쌉싸름한 향이 참 좋았지. 새어머니가 자작저에서 자주 끓여 주던 꽃차인데, 꽃잎을 넣으면 찻물이 붉게 변한다.
새어머니가 꽃차 수집에 취미가 생겼다며 타 주던 거다. 꽃차를 마실 때만큼은, 우리도 여느 모녀지간처럼 지냈으니까. 차라리 그 침묵이 좋아서…….
“색이 참 예뻤어.”
마침 따뜻한 찻물도 있고. 캐서린은 찻물에 꽃잎을 띄웠다.
“처음에는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는가 했더니, 지금이라도 그 이유를 알았으니까 다행이지. 살사초라니.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살 수도 있었을까?”
“고객님?”
“지금은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말이야. 내가 죽고 난 뒤의 이야기보다는, 죽기 전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풀어냈으면 지금과는 달랐을까? 그럼 그 결말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잖아.”
착한 딸아이는 관뒀으니, 이제 패륜아가 되더라도 아버지께서는 이해해 주실 거다. 어머니, 저는 이제 떠날 사람이라서 두려울 게 없답니다.
“너, 곧 죽더라도 고통 없이 지내게끔 도와주지. 내가 그 정도 해 주는 건 된다. 약병을 잘 봐 둬. 이건 다른 의료원에서는 조제도 못 할 약이니까.”
제임스가 억제제와 진통제를 내밀고, 약병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빨간 약통에 든 게 억제제고, 파란 약통에 든 게 진통제 같았다.
“나름 꼼꼼하구나.”
“이깟 약 하나 조제하는 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부족한 약은 내가 때맞춰서 다시 보내 주지. 적당히 먹어!”
왜 화를 내지.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아프면 먹으라고 약발 잘 듣는 진통제부터 소화제, 영양제까지 막 서랍장에 챙겨 넣었다. 그러고는 이게 진통제! 이게 소화제! 이게 영양제! 하며 또 버럭 화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