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를 놓아주세요.’
우리들의 결혼 계약이 끝나면, 그때는 나를 놓아주세요.
짧은 자유라도 한 번 느껴 볼까 싶어서. 그래서 로렌디스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했다. 아니지. 이건 계약 이혼에 더 가깝다. 이별을 마음먹고 맺은 계약이었으니까.
“그 기한을 채운다면 이혼해 주세요.”
로렌디스는 침묵했다. 속모를 표정으로 캐서린을 바라보더니, 턱을 괴고서 느긋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영애는 언제라도 떠날 사람처럼 지냈나?”
“혹시, 기분 상했어요?”
“기분 상할 건 없지. 예전부터 짐작했거든. 너는 이곳의 누구에게도 마음을 줄 생각이 없었잖아. 하물며 나에게조차 말이야.”
캐서린은 멋쩍게 웃었다. 이곳 사람들과는 언젠가 헤어질 사이니까, 떠날 때 미련이 없도록 거리를 뒀다.
나름 잘 숨긴다고 숨겼는데, 그게 다 숨겨지는 건 아니구나. 캐서린은 어색함에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한숨을 내쉰 로렌디스가 식탁을 느릿하게 두들기며 이야기했다.
“그럼 결혼식은 빠른 시일 내로 치르고. 1년 뒤에 전쟁이 끝나면, 이혼은 당신 뜻대로 해.”
그 뒤로는 조용히 식사를 끝냈다. 우리는 디저트까지 가볍게 먹은 뒤, 후원으로 나왔다. 후원은 이미 어둑해졌다.
캐서린은 고요히 그의 뒤를 따랐다.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 걷는데, 보폭이 맞는 걸 보면 로렌디스가 일부러 천천히 걷는 것 같았다.
‘이런 부분에서는 세심하네.’
세상 무심해 보이면서도 의외의 면에서 세심하다. 캐서린이 멀뚱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로렌디스가 지나가듯 이야기했다.
“그 뒤로도 머물러도 좋고, 떠날 거면 떠나도 좋고.”
캐서린의 뜻대로 해 주되, 캐서린이 원한다면 전쟁이 끝나고도 공작성에 머물러도 좋다는 뜻 같다.
으음. 떠날 미래가 이미 정해진 마당에 공작성에서 오래 머물 이유도 없지.
“로렌디스, 저는 눈에 띄기 싫어요.”
캐서린은 존재감 없이 자리만 지켜 주다가 떠날 생각이었다.
그래서 남은 1년간은 계약 기간을 채워 계약직 아내 역할을 맡아 주기로 한 거다. 존재감 보였다가 나중에 발목 잡혔다간……. 어우. 벌써부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조용히 지낼게요.”
“어쨌든 떠난다는 뜻인가?”
“어차피 결혼식을 올리면, 로렌디스는 전장으로 오르시잖아요. 그때까지만 자리를 지켜 드리면 될 거니까.”
로렌디스에게만 들리게 나른한 귓속말을 속삭였다. 당신이 내게 기대한 역할도 딱 거기니까. 자리만 지키면 될 허울뿐인 아내. 캐서린은 배시시 웃으며 로렌디스와 눈을 맞추었다.
그는 캐서린을 빤히 바라보더니 눈살을 왈칵 찌푸렸다.
할 말 있나요? 당신도 그럴 목적으로 나 데려다가 놓은 것으로 압니다만.
캐서린이 싱긋-웃으며 마주 보는데,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둑해진다.
그쯤, 보좌관 브레디가 급하게 로렌디스를 찾았다.
“각하, 전선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
“급합니다. 각하?”
그의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
그렇지만요, 당신에게 필요한 건 허울뿐인 아내잖아요? 그래서 그 역할에만 충실하기로 한 거랍니다.
캐서린이 나른하게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예의를 보이자, 로렌디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가지.”
캐서린이 배시시 웃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넨시를 바라보며 또다시 배시시 웃었다. 아아-피곤해. 됐어. 방에 가서 쉴래. 잠도 오고 몸도 나른하고 목욕 좀 하고 잠이나 잘까?
그 뜻을 넨시도 알아차렸다.
“장미꽃을 띄워서 목욕물을 준비해 드릴까요?”
“그럴래?”
캐서린이 막 방에 도착했을 때, 못 보던 편지가 탁자에 올려져 있었다.
“아가씨, 자작저에서…… 편지를 보내왔답니다.”
넨시가 캐서린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자작저에서 소식을 보내왔다고. 서신은 밀랍으로 꼼꼼히 밀봉되어 있었다.
자작저를 떠나오며 인연은 다 끊었다. 계모도 의붓언니도 캐서린에게는 없는 사람이다.
“아빠, 내 가족은 모두 죽었어요.”
아버지 죄송해요. 저는 착한 딸이 되지 못했어요. 계모께서 내 손을 놓았을 때, 우리의 인연은 이미 끝났어요.
미련을 버렸다면 그다음은 과감하다. 그길로 자작저에서 온 편지를 벽난로에 던졌다.
* * *
집무실 문이 덜컹대며 열렸다. 차석 보좌관이 먼저 와서 로렌디스를 기다리다가 거수경례를 올렸다. 그는 서둘러 서신부터 건넸다.
[야만족이 다시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서둘러 뿌리를 뽑아야지 싶습니다.]
서신을 확인한 로렌디스의 표정이 낮게 가라앉았다.
“지겹군.”
“그렇습니까.”
브레디는 그의 상관을 찬찬히 훑었다. 로렌디스는 제복에 가죽 군화를 신고 있었다. 단단한 체격에 꼭 맞은 옷차림은 같은 남자라도 한 번씩 훔쳐보게 될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브레디는 전선이고 뭐고, 궁금한 것부터 해결했다.
“진짜 결혼하십니까?”
“일정 확인하고 결혼식 날짜와 준비를 서둘러. 출정식 준비도 그때 같이 해결한다.”
브레디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밀던 자작님께서 이 이야기를 보면 아주 통곡하시겠습니다.”
로렌디스도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강도처럼 결혼을 강행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강도처럼 사람 하나를 억지로 눌러 앉힌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아가씨께서 뭐라십니까? 역시, 결혼식 다음날 전장에 오르는 남편을 좋아할 리 없으시지요? 거기서 영애께서 각하를 원망하셔도, 솔직히 저는 각하를 감싸 주지 못합니다.”
“영애는…… 꼭 내가 떠나길 바라는 사람 같더군.”
로렌디스는 표정을 찌푸리고 속으로 덧붙였다. 본인도 떠나길 기다리는 사람 같고.
“뒷조사를 해 볼까요?”
“됐다. 필요 이상의 선을 넘지 말거라. 계획대로 결혼식을 올리면 떠날 준비를 해 둬.”
일정은 이미 잡혔다. 로렌디스는 결혼식 뒤에 떠난다. 그리고 캐서린은 헬렌에 홀로 남을 것이다.
“비혼주의자를 선언하신 분께서 결혼하신다기에 기뻐했더니…… 예비 마님께 너무 잔인하십니다.”
로렌디스는 이번 결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번 결혼은 수단이다. 이번 결혼으로 황제의 결혼 압박도 잠잠해질 것이다. 그래서 이번 결혼에서도 후견인으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보이려고 그런 건데…….
브레디가 조심히 로렌디스를 불렀다.
“그래도, 아가씨께서 결혼식을 올리고 공작성에 적응하실 때까지 성을 지키는 게 어떠십니까?”
로렌디스가 그만 나가 보라며 브레디에게 손짓하고, 브레디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투덜거렸다. ‘각하 그러다가 후회하시지 말입니다.’라고.
* * *
결혼드레스는 캐서린의 뽀얀 피부에 잘 어울리게, 여리여리한 이미지에 힘을 줬다.
“각하께서도 이 모습을 보셔야 하는데…….”
넨시는 캐서린의 드레스를 만져 주면서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바쁘신 분이잖아. 이해해 주는 게 맞아.”
캐서린은 전신거울 앞에서 빙그르― 돌았다. 드레스 밑자락이 아름답게 퍼지다가 내려앉았다. 드레스 원단 사이사이에 박아 넣은 보석이 드레스자락이 퍼질 때마다 살랑대며 모습을 비쳤다.
하녀들의 손을 타면서 피부도 보들보들해졌다. 향유를 듬뿍 발라 두어서 머리카락도 매끈매끈하고 향도 좋았다.
“서운하진 않으십니까?”
“경계선의 야만족의 약탈이 다시 시작됐으니, 그분께서 바빠진 건 어쩔 수 없어.”
“이러다가는 결혼식을 끝내자마자 출정식에 오를지도 모릅니다…….”
이쯤 되니까 캐서린도 점점 의아해졌다. 이들이 예상 이상으로 아쉬워한다.
“그분이 전장에 오르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잖아.”
“결혼식이잖습니까. 마님께는 일생에 한 번뿐인 순간인 것을요. 너무 무심히 지나 보내는 듯싶어서.”
일생에 한 번뿐인 순간은 지금도 비슷하다. 그래도 넨시는 아쉬워하는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헬렌의 하녀들은 다 마음씨가 착하다.
‘내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당신들이랑도 친하게 지냈을지 몰라요.’
배시시 웃던 캐서린은 드레스를 벗고서 여행 책자를 꺼냈다. 소파에 앉아서 여행 책자를 펼치자, 하녀들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여행 책자는 왜 찾으십니까?”
“휴양지나 요양지로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 해서.”
“요양지로 유명한 건 여기…… 호박꽃의 숲입니다.”
호박꽃의 숲이라. 이름 한번 시골스럽다. 그 모습을 상상하며 책자를 펼치자, 호박꽃이 넓게 펼쳐진 휴양림이 커다란 사진 속에 펼쳐졌다.
“나중에 각하와 여행이라도 떠나시려고요?”
혼자 떠날 건데…….
헬렌 공작령을 떠나게 된다면, 그때는 헬렌의 이름도 버려두고 떠나지 싶다. 여기로 떠날 때쯤 되면, 이미 이혼하고 요양지나 찾아서 다니려나.
할미꽃이 피는 숲속이라니, 요양지로 제격이다. 책자를 덮어서 톡톡― 두들겨 주고 서랍장에 따로 챙겨 두었다.
수십 벌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벗느라 온몸이 근육통을 호소했다. 결혼식도 간소화해도 되지만…… 그건 캐서린의 개인적인 욕심이었다.
아아-그냥 나른한 햇살 아래서 낮잠이나 자면서 지냈으면 좋으련만. 그거도 욕심 같고.
깜빡 잠이 들었을까. 그림자가 머리 위에서 아른거렸다. 그 인기척에 잠기운이 스멀스멀 물러났다. 익숙한 인기척이었다. 흰 피부에 서늘한 낯, 며칠 만에 보는 로렌디스 헬렌이었다.
“로렌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