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주 짧은 생이다. 허락된 시간도 짧다. 1년이라니. 너무 덧없지.
‘아빠, 나, 아무래도 심술을 부려야겠어요.’
아빠 용서하세요. 저 좀 못난 딸이 될 것 같아요. 새어머니와 의붓언니를 다 내쫓고…… 그냥 자작저도 제 무덤으로 가져갈게요.
시한부로 삶이 마감되더라도, 그 가족들에게 아주 작은 심술이라도 한 번 부려 두고 떠날래요. 그 정도 심술은 괜찮잖아요?
이건 고해성사다. 이제는 곁에 없는 아버지께 올리는 죄스러움이랄까.
“아가씨!”
캐서린은 큰 길목에서 따돌렸던 일행들과 재회했다.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음, 길을 잃어서…….”
캐서린은 적당히 둘러대고 마차로 돌아갔다. 날은 벌써 저물었다. 하늘 위로는 뉘엿뉘엿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해가 저물자 공기가 한 층 더 차가워졌다.
“헬렌의 치안은 좋기로 유명하지만, 그래도 초행길이잖습니까. 조심하십시오.”
데보라는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캐서린은 잔소리가 끝나갈 무렵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이 노을을 머금고 점점 흐려졌다.
“비라도 쏟아지려나?”
“지금 이 시기면 비보다는 눈이 쏟아질 것 같네요.”
헬렌은 봄여름가을을 스쳐 보내고 겨울을 맞이하니까. 북부의 겨울은 그만큼 혹독하다.
지금 이 시기면 눈이 내릴 시기일까?
헬렌의 눈은 소문으로만 들었지, 직접 볼 기회는 없었다. 자연재해 수준이라는데……. 그래도 흰 눈이 눈꽃처럼 내린다면 예쁠 테지. 눈 속에 파묻혀서 천사를 그리고 눈사람을 만들며 여생을 보내도 좋을 거다.
마차가 공작성에 도착했다. 로렌디스도 외출에서 돌아온 길인지, 마부가 로렌디스의 흑마를 마구간으로 데려가는 길이었다. 로렌디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늘 그랬듯 제복 차림이었다.
“공작님께서 왜 여기…….”
캐서린은 쭈뼛쭈뼛 팔을 웅크렸다. 넋 놓고 그를 빤히 내려다보는데, 로렌디스가 팔을 매끄럽게 내밀었다.
“언제까지 공작님이라고 부를 거야.”
“네?”
“이름으로 부르라고.”
캐서린이 로렌디스라고 부르자, 로렌디스가 팔을 눈짓하며 이야기했다.
“손, 안 잡나?”
“……왜요?”
캐서린은 마차에 앉아서 그의 팔을 빤히 내려다봤다. 아. 에스코트구나. 캐서린은 민망한 마음에 그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로렌디스가 매끄럽게 캐서린을 에스코트했다. 레이스 장갑 위로 손가락이 맞닿았다.
“어디 다녀오는 길이세요?”
“황궁에. 또 혼담 때문인지 부르시더군.”
캐서린이 입가에서 옅은 입김이 터졌다.
“폐하께서 걱정이 많으시군요.”
오늘 낮에 먹구름이 잔뜩 껴 있더라니, 데보라가 이야기해 준 대로 눈이 한바탕 쏟아질 작정이구나. 하아-한숨을 내쉬자 뽀얀 입김이 솟았다.
“추워?”
춥던가. 캐서린은 고개를 대충 가로저었다. 로렌디스가 뺨에 손등을 툭 얹더니 쯧-혀를 낮게 차고서, 캐서린을 본성 안으로 이끌었다.
당신은 세상 차갑다가도 따스해진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또 긴장감을 풀리게 해서…… 그게 또 해롭다.
캐서린은 손을 맞잡고 한창을 가만히 있었다.
“오늘, 바쁘신가요?”
로렌디스는 며칠간 항상 바빴다. 그는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되물었다.
“내게 할 말이라도 있나?”
“식사할 시간 되나요?”
로렌디스는 여전히 바쁘고, 전쟁영웅 로렌디스를 찾는 서신이 꾸준히 공작성 성문을 넘나들었다. 황실에서도 그를 찾고, 전장에서도 그를 찾는다. 그래서 로렌디스가 바쁘다고 거절하면, 캐서린도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만찬장을 마련하라 지시하지.”
조심스러웠던 마음이 무색하게도, 로렌디스는 흔쾌히 제안을 승낙했다.
* * *
만찬장에 식사 자리가 마련됐다.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식탁 가득 올라오고, 향긋한 향신료 향이 만찬장을 은은히 채웠다. 상큼한 과육으로 맛을 낸 샐러드와, 부드럽게 양념에 저린 칠면조 구이까지.
하얀 식탁보에 촛불까지 어우러져서 분위기도 기대 이상이었다. 캐서린은 로렌디스의 맞은편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 때문에 억지로 시간 낸 거 아니에요?”
“저녁 한 끼 먹을 시간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
매끄럽게 답하던 로렌디스에게서는 짙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전장을 떠도는 동안 쌓인 업무를 공작령에서 잠시 머물 때만이라도 처리해 두느라, 요즘 유난히 바쁘다 전해 왔다.
로렌디스가 바쁘게 지내는 건 이미 익숙하게 아는 내용이라 가볍게 넘겼는데, 지금 저 표정을 보니까 그간의 업무가 많긴 했던 모양이다. 로렌디스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도 공작령의 행정과 업무가 유지되는 건, 모두 이 덕분이었다.
“식사는 입맛에 맞나?”
“담백해서 좋았어요. 향신료 향도 자극적이지 않고요.”
칠면조 고기를 한 점 잘라서 입안에 넣자 부드럽게 입속에서 녹았다. 부드러운 양념이 입속에 골고루 퍼지고, 고기가 연하게 씹혔다.
“사람들을 물려 주세요.”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주변을 비워야 한다. 로렌디스가 식기를 내려 두고 가볍게 손짓했다. 하녀와 집사가 물러나고 만찬장 문이 닫혔다. 로렌디스는 그럼 이제 이야기해 보라며 느긋하게 캐서린에게 턱짓했다.
“있잖아요. 공작님께서는 저를 신부로 데려오셨잖아요?”
“이름으로 불러.”
“로, 로렌디스”
이름을 지적하는 타박에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캐서린은 멈칫하며 숨을 골랐다. 로렌디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더니 캐서린을 빤히 응시했다.
“응. 이제 이야기해.”
“그런데 이 이야기를 가신들도 동의한 건가요? 밀던 자작가는 시골 외진 곳에 있어서, 이름도 모르는 분들이 더 많아요.”
그런 걱정은 무의미하다는 듯, 로렌디스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들은 내가 뭘 하든 다 동의하는 놈들이라서.”
아차. 헬렌가의 가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잊을 뻔했구나.
헬렌 공작이 전쟁 영웅으로 유명하다면, 가신들은 그의 추종자로 유명했다. 이들에게 로렌디스의 명령은 무조건적인 지침이었다.
‘그 이름의 무게가 가벼울 리 없지.’
그의 명령에 불복이란 없고, 의문은 죄악이다. 헬렌 공작령에서 ‘로렌디스 헬렌’이란 이름이 가진 무게는 캐서린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무거울 것이다.
“넨시에게 대강의 상황을 전해 들었어요.”
“무슨 이야기?”
“폐하께 결혼 압박을 받고 계신다면서요? 헬렌 공작가의 유일한 핏줄에 폐하의 조카시잖아요. 그런데 아직 제대로 된 후계도 없고, 이런 시기에 전장을 떠도는 건 로렌디스에게도 위험부담이 크죠. 그래서 황실에서도 우려가 크고요.”
“그냥 폐하께서 늙더니 걱정만 느신 거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면 황권 모욕이라며 걱정할 법한 발언이지만, 로렌디스는 그냥 나이든 늙은이를 성가셔하는 쪽에 가까웠다.
‘황실과 가깝게 지낸다더니 사실이구나.’
황실에서 일방적으로 로렌디스에게 치근대는 쪽에 가깝지만, 그건 아주 사소한 일이니 잊어 두자.
“정식으로 혼인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전장으로 오르지 못하게 압박을 받으셨다더니. 전쟁영웅이란 이름이 무색하게도 제약이 붙으셨네요.”
“그런 이야기도 들었나?”
보통 황실에서는 강한 권력을 견제하며, 더 험난한 전장으로 내몬다. 그건 전장에서 죽으라는 뜻을 함유하는데, 이 황실은 반대다.
‘오히려 황제는 그를 걱정했지.’
그런 가족애를 이용해서 미안하지만……. 캐서린은 이 이해관계를 철저하게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로렌디스는 결혼식을 올리면 다시 떠날 생각이신가요?”
캐서린은 배시시 웃었다.
“맞아. 영애.”
“역시.”
“야만족과의 긴장감이 점점 더 높아지는 중인데, 폐하께서는 내가 전장만 떠도는 게 걱정인지 결혼 전에는 전장 출전을 금한다고 하시더군. 그 전장에 꼭 나를 세울 필요는 없다는 게 폐하의 입장이지만…… 쯧. 그거야말로 속 편한 이야기지.”
이상한 사이다. 북부 세력을 경계할 법도 한데, 황제는 그 세력을 배척하는 대신 보듬기를 택했다.
“앞으로 1년간, 나는 또 전장에 서야 해.”
앞으로 1년간 로렌디스가 자리를 비운다.
“그럼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결혼이 폐하를 설득하기 가장 쉬운 길이고, 밀던 자작은 헬렌의 가신이었으니까, 예우 차원에서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지.”
거창하게 포장해도 맥락은 하나다.
결혼 압박을 피하려고 일시적인 눈속임을 꾀한 것.
혼담은 가문과 가문의 계약이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그런 종류의 계약. 이해관계가 아무리 복잡할지라도,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접근한다면 의외로 또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1년이면 되네요. 이 결혼이 필요한 건 앞으로 1년……. 로렌디스가 전장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네요.”
1년. 전장에서 오기까지 1년이면 된다. 1년이면 계모나 의붓언니도 정리될 거고, 시한부 삶의 마지막 순간이 눈앞에 펼쳐질 테지.
억제제로 증상을 억누르며 로렌디스를 기다리다가, 적당한 때에 공작성을 떠나면 된다.
그럼 예정된 1년보다는 더 오래 살려나. 그럼 한적한 산골이나 시골 마을에서 집 한 채를 얻어서 풀이나 뜯어 먹으면서 여유롭게 지내련다.
캐서린은 배시시 웃으며 턱을 괬다. 이 1년은 우리를 위해서 계약하고, 남은 기간은 나만을 위해서 지낼게.
“1년간만 계약직 아내가 되어 드릴게요.”
“어째서?”
“제가 그 뒤면 좀 멀리 떠날 예정이라서.”
그 1년이 지나면…….
“그때는 저를 놓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