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슬슬 의사를 찾아야 해.’
헬렌의 거리는 복잡했다. 거리마다 번호를 매겨 뒀는데, 헬렌 1번에서 5번 구역까지 길목도 혼잡했다.
캐서린은 헬렌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골목 여기저기서 영지민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리고 캐서린은 파도에 떠밀리듯 휩쓸렸다.
‘아가씨 넋 놓으면 길 잃기 쉬워요.’
그 순간 ‘넋 놓으면 길 잃기 쉬워요.’라는 데보라의 경고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캐서린의 발이 우뚝 멈췄다. 낯선 길목에 인파도 많고 거기서 발을 잘못 디뎠더니…….
“진짜 길을 잃었잖아.”
캐서린은 길 한복판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얕게 탄식했다.
* * *
캐서린이 책을 통해 엿본 몇 가지 사실이 있다. 헬렌은 건물도 비슷비슷하고 골목도 비슷하다. 그래서 골목길의 숫자를 잘 봐 둬야 한다.
예시로 헬렌 1번 거리부터 헬렌 5번 거리로 구분해 뒀는데, 그 숫자를 확인할 줄 알아야지 헬렌에서는 길을 잃지 않는다.
캐서린이 찾는 ‘그 사람’은 헬렌 3번 거리의 사람이다.
‘제임스 박사.’
책 속에서 지나가듯 묘사된 사람이다. 실력 좋은 의사이지만, 성격이 드세고 돈만 밝혀서 학계에서 퇴출된 의사.
지금은 음지에서 불법 왕진을 보며, 돈과 자본을 따르는 의사가 됐다.
그를 움직이는 건 첫째도 물욕이고, 둘째도 물욕이며 셋째도 물욕이다. 그리고 이런 그가 음지에 의료원을 차렸는데 그게 ‘한라원’이었다.
[한라원]
오늘, 캐서린은 여기서 ‘사람’을 찾을 예정이다. 그리고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 책 속에서 묘사된 대로다. 괴짜 의사가 운영하는 음지의 의료원이었다.
입구는 막 새로 바꾼 듯이 깔끔했고, 막 새로 단 것처럼 녹색 문에 비닐 포장이 그대로 되어 있었다. 문고리를 돌리자 딸랑― 하며 종소리가 들렸다. 그 문을 열자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선생님께서 진료를 안 보십니다.”
“문은 열려 있던데?”
“문을 안 열어 두면 무식한 용병 놈들이나 범죄자 족속들이 문짝을 때려 부수니까…… 흠흠! 아무튼! 오늘 제임스 박사는 바쁠 예정이라서 안 됩니다.”
입구에서 먼저 사람을 걸러 내는 건, 제임스의 제자인 니콜인가? 니콜은 노골적으로 지루해하며 얼른 꺼지라며 손을 휙휙 내저었다.
캐서린은 오히려 그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제대로 찾았다.’
입구 문이 새것처럼 깨끗한 건, 앞전의 ‘무식한 용병’이나 ‘범죄자 족속’이 수시로 이 문을 때려 부숴서인 듯싶고.
“내가 좀 급해.”
“…….”
“몰래 나온지라 시간도 얼마 없고.”
니콜이 손을 우뚝 멈췄다.
“제임스 박사에게 전해. 불법 왕진 의뢰라고.”
짤랑― 금화가 가득 담긴 돈 주머니가 둔탁하게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니콜은 그 소리만 듣고도 큰 액수라 짐작했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캐서린이 시큰둥하게 돈 주머니를 턱짓하자, 니콜이 액수를 확인하고 맑게 웃었다.
“고객님, 그래서 환자는 누구입니까?”
“환자는 지금 눈앞에 있는 나고, 어디로 가면 되지?”
“이대로 2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고객님.”
캐서린은 곧장 2층 계단을 딛고 올라갔다. 2층 곳곳에서 어지럽게 널브러진 서류와 의료 서적들이 나뒹굴었다. 그걸 발로 슥슥 치우는데, 방 한쪽에서 문이 삐그덕―하며 열렸다. 그쯤 안쪽에서 버럭 호통 소리가 들렸다.
“이 자식들이 허구한 날 싸우더니 또 어디서 칼에 찔려 온 게야! 나는 외과 의사가 아니라니까! 그리고 암흑조직이면 좀 더 점잖게 싸우고 다니면 안 되나! 너희가 이 구역의 주인이라면서 왜 허구한 날 다쳐와! 내가 연구 시간에는 방해하지 말……!”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안경을 집어 던지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캐서린은 작게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아아……. 성격 나쁘다더니 사실이구나.
남자는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후우, 빌어먹을……! 나는 또 그 음침한 놈들이 어디서 사고치고서 다쳐온 줄 알았지. 오늘은 환자 안 받는다! 다음 기회에 와!”
음침한 놈들이면 그의 뒤를 봐주는 암흑조직을 말하는 것 같고, 그들이 시시때때로 다쳐서 제임스를 찾아오는가 보다.
“뭔가?”
“스승님!”
니콜이 의료실 문을 열고서 빠르게 선수 쳤다.
“귀한 고객님입니다. 성실히 접대해 주세요. 불법 왕진 의뢰라는데, 우리 의뢰 못 받은 지 오래돼서 금고가 텅텅 비었습니다.”
니콜이 차와 다과를 가져오더니 캐서린 앞에 내려 두며, 접대용 미소를 매혹적으로 지었다.
니콜은 푸석푸석한 곱슬머리를 가졌는데, 짧게 머리를 잘라내서 시원하면서도 맹랑한 이미지를 풍겼다.
캐서린은 소파에 앉아서 레이스 모자를 슬쩍 들추었다. 캐서린을 흘끔거리던 제임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캐서린을 잠자코 들여다봤다.
“그럼 스승님, 진료 보세요.”
니콜이 나가고, 캐서린은 용건부터 꺼냈다.
“은밀히 진료를 받으려는데, 비밀리에 가능할까?”
“환자 진료 정보야 당연히 비밀로 붙이지. 그런데 잠시만……?”
제임스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조용히 읊조렸다.
“너 죽어 가고 있네.”
제임스가 캐서린의 손목을 가져가더니 진맥을 하고 낮게 탄식했다.
“진짜 죽어 가는 게 맞는데.”
캐서린은 모자를 벗고 소파에 느른하게 기댔다. 제임스가 캐서린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긴가민가하며 코를 킁킁거렸다. 그게 꼭 개가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 것 같아서 심오했다.
“이건 분명 독초 향인데 이상하다.”
잠시 뒤, 제임스 박사가 고요하게 중얼거렸다.
“……귀족 영애 같은데, 몸에서 왜 독초 향이 나지? 산에서 나는 독초를 뜯어먹고 살 만큼 궁핍해 보이지는 않다만.”
“그게 지금 내 몸과 관련 있니? 처음 보자마자 죽어 가고 있다고 한 이유 말이야.”
캐서린이 제임스를 찾은 이유는 하나다. 왜 대뜸 요절하는지 이유라도 한 번 들어볼까 싶어서다. 그런데 이 의사 숨겨진 명의인가? 의외로 유능하다. 음지에서 불법 왕진이나 보면서 사는 사람치고는 너무 유능한데……?
“그, 살사초라는 독초가 있어. 어디지, 남서부 산에서 자주 나는 풀인데…… 향이 달콤하긴 해도 독초라서 위험해.”
“나한테서 그런 향이 난다고?”
“남서부 음지에서 의료원을 잠깐 한 적이 있거든. 남서부 아이들 중에서 이 독초에 중독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상하지. 그건 가난한 애들이 먹을 게 없어 칡뿌리 캐 먹듯 뭣 모르고 먹는 독초인데, 그 향이 왜 귀족 아가씨 몸에 뱄지?”
독초의 향이라니, 무슨 죽음의 향 같다. 그래서 모자를 벗을 때 죽어 간다고 그랬나?
“그 몸에 아주 짙게 뱄어. 그간 느끼지 못했나? 아주 오랫동안 노출됐는데 말이지.”
“확인은?”
“일단 피부터 뽑지. 뭐가 됐든 피검사부터 한번 해 봐야지 약을 처방하든 하니까……. 몸에서 나는 쌉싸름한 향은 독초가 맞는데 말이지.”
괴짜라고 학계 의사들에게는 배척받고, 의사 면허까지 정지당했지만 그는 유능했다. 제임스는 피를 뽑아서 용기에 넣고 웬 안경을 쓰더니, 휙휙 용기를 흔들었다.
“치료약은 나도 몰라. 억제제나 진통제는 처방해 줄 수 있어도.”
“나도 내가 시한부인 건 알고서 찾아온 거니까…… 치료보다는 고통 억제에만 집중해 줘.”
이 미래는 어딘가 아파서 아는 게 아니다. 책 속에서 읽어서 대충 짐작할 뿐이다.
치료약이 없다니 그럼 진짜 죽는다는 뜻이구나. 나 죽는구나. 캐서린은 벗어 뒀던 모자를 쓰고 천천히 일어났다.
“검사 결과는 언제 나와?”
“검사 결과는 다음 주면 나와. 그래서 어디 가문이지? 가문을 알려 주면 내가 일주일 뒤에 그쪽으로 몰래 찾아가지.”
캐서린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캐서린 밀던. 아아. 곧 캐서린 헬렌이 되겠다. 로렌디스 헬렌 공작과 결혼할 예정이거든. 검사 결과가 나오면 헬렌 공작성으로 찾아와.”
제임스는 ‘그래?’라고 조용히 되묻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헬렌…… 헬렌 공작이라고.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뚝 멈추더니, 다시 ‘헬렌 공작?’이라고 되물었다. 캐서린이 맞다고 답하자, 제임스가 사색이 됐다.
“그런데 아직 남편이나 가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라서. 조용히 찾아오렴. 우리 결혼에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거든. 그래서 내가 아픈 게 소문나서 결혼이라도 파투났다간…… 그쪽 목부터 달아날 거야.”
* * *
시한부의 마지막 준비가 끝났다. 몸을 봐줄 의사도 구했고, 헬렌에 이 소식이 알려지면 이런저런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제임스에게 입단속도 시켜 뒀다.
“독초라니,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나름 그래도 귀족가의 영애로 집안에서만 지냈는데, 독초를 접할 일이 어디 있다고. 독초를 접했어도 그건 집안이고. 집안은 계모의 영역이라서…….
“으음. 어머니 짓이겠구나.”
이럴지도 모른다고 이미 예상해서일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남은 미련까지 다 으스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