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4)화 (4/129)

4.

넨시는 공작성에서 일한 지 10년이 지난 하녀였다.

넨시의 어머니가 로렌디스의 유모였고, 넨시는 유모인 엄마를 따라서 공작성을 드나들며 성의 하녀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넨시는 헬렌가에 자부심이 컸다. 표정 하나하나에 그런 자부심이 묻어났다.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캐서린은 그녀의 물음에 방 안을 훑어보고 답했다.

“응. 마음에 들어.”

“아가씨께도 이 공작성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그래도 북부에 오셨으면 목욕이 먼저예요. 북부에 처음 온 손님들은 꼭 몸살감기에 시달리더라고요.”

북부 헬렌 공작령은 봄여름가을을 스치듯 보내고 겨울을 맞이하는 만큼, 혹독한 겨울로 유명했다.

‘아픈 건 질색이니까.’

그래서 캐서린은 넨시의 도움으로 목욕부터 가볍게 끝냈다. 따뜻한 물로 몸을 녹였더니 몸이 나른하게 가라앉았다.

“막 목욕을 끝내서 노곤하십니까?”

“목욕보다는 방이 따뜻해서 약간 졸려.”

캐서린은 젖은 머리카락을 타월로 꼼꼼히 말리고, 기다란 머리카락을 허리 아래로 늘어트렸다.

“어쩜, 아가씨 머리카락이 참 곱네요. 타월로 물기만 말리고, 금방 빗질해 드릴게요.”

캐서린은 화장대에 앉아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막 목욕을 끝낸 몸에서 따끈따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넨시는 빗질로 엉킨 머리카락을 풀고,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었다. 캐서린은 거울 너머로 그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금발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하게 내려앉은 모습이 비 맞은 강아지 같다.

“넨시는 공작님이랑 일한 지 10년이나 됐으면, 그분과 알고 지낸 지 오래됐겠네.”

“네. 조금은 압니다. 혹시 궁금한 게 있으세요?”

“공작님께서는 어떤 분이야?”

넨시는 캐서린에게 착실히 답했다. 다만, 아주 교과서적인 답이었다.

“각하께서는 차가워 보이지만 속은 따뜻한 분입니다.”

“따뜻, 하다고?”

의구심으로 말이 띄엄띄엄 끊겼다. 따뜻하다고? 당신 혹시 다른 사람 이야기하냐며 멍하니 넨시를 올려다보는데, 그 뒤로도 넨시의 말이 이어졌다.

“좋은 분인데 그걸 주변에서는 잘 몰라주시죠. 그래서 저희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각하께서는 전장만 떠돌지, 폐하께서는 작년부터 결혼 압박을 넣으시지……. 그런데 각하께서는 전장에 가 계시지, 얼마나 살얼음판이었는지 아십니까?”

이 이야기가 하녀 입에서 나올 정도라니, 로렌디스가 황제에게 결혼 압박을 받은 건 사실 같다.

로렌디스는 얽매이는 걸 싫어한다. 그런 로렌디스에게 결혼이란 족쇄다. 로렌디스가 전장을 오랫동안 떠돈 부분만 봐도 그랬다. 그럼 차라리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을 긋는다면, 로렌디스도 좋아할까?

‘로렌디스라면 좋아할지도……?’

빗질이 끝나고, 캐서린은 연한 연보랏빛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실내용 의복인지 옷차림이 가벼웠다. 그래도 북부 특성상 따뜻한 털 장식이 달려 있었다.

“아가씨께서 따로 챙겨 온 여벌옷이 없으셔서, 손님용 여벌옷을 준비해 드렸습니다. 잘 맞습니까?”

“고마워.”

“북부 옷이 아주 잘 어울립니다.”

자작저에서 입던 옷보다 고급스러웠다. 보들보들한 안감 덕분에 감촉도 좋았고, 따뜻하게 겹쳐 있는 숄도 편안했다.

“머리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그냥. 편하게 올려 줄래?”

“올림머리를 원하시는 거군요. 마침 적당한 머리 장식이 있네요. 나비 핀인데 어떠세요? 이거로 해 드릴게요.”

가볍고 고급스러운 핀으로 머리를 고정했다. 옆머리를 빼서 내리자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바깥바람이 선선하네요. 잠시 걷겠습니까?”

“밖에 나가도 돼?”

자유는 완전히 억압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구나. 캐서린이 되묻자 넨시가 당혹스럽게 답했다.

“그런 건 제게 허락받을 일이 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저택 밖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캐서린은 숄을 두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후원 주변을 걸으며 바람을 쐬었다. 푸른 하늘에 흰색 구름이 예쁘게 퍼졌다. 언제 봐도 예쁘구나. 하늘 한 번 올려다보기 뭐가 힘들었다고 그간 땅만 보면서 걸었는지. 픽-웃는데, 지난 시간이 우스워진다.

‘천천히 움직이자.’

캐서린은 차근차근 계획을 되짚었다. 그녀는 시한부다. 언제 죽을지 모를 몸이라도 일단 진단부터 받아 보는 게 맞다. 그러려면 내부인보다는 외부인이 낫다. 내부인은 로렌디스의 사람이니까, 그의 귀를 피하기가 어려워진다.

“공작님은 지금 어디 있어?”

“지금 이 시각이면 어디 계실 시간이더라……. 지금이면 훈련장에서 기사단을 봐 주고 계시려나요?”

넨시는 답해 주면서도 조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다만, 주인님께서는 훈련 중에 방해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서…….”

로렌디스가 오랫동안 전장을 떠돈 만큼, 기사단의 훈련이나 검을 다루는 공간에서는 엄격하게 군다.

로렌디스에게 훈련장이란, 신전이나 황궁보다 더 엄숙하고 경건한 자리다. 그런 부분에서 그의 신념을 엿볼 수 있었다.

―캉캉!

훈련장 외벽은 튼튼한 벽돌로 지어 올렸다. 벌써 저 안쪽에서부터 사납게 부딪치는 목검 소리가 아득하게 울렸다.

“괜찮아. 방해된다 싶으면 멀리서 보다가 돌아갈게.”

“그럼 모셔다 드릴게요. 헬렌의 기사단 건물은 웅장하고 거대하기로 유명한데, 헬렌의 군사력도 다 거기서 나옵니다.”

헬렌은 정복 전쟁으로 제국에 영광을 가져다줬고, 그 영광의 시초가 되는 게 군력이다. 약소국 입장에서는 포식자이자 난폭한 지배자였다.

“여기서부터 쭉 걸어가면 훈련장입니다. 안쪽에서 먼지가 많이 이는데, 직접 보실 건가요?”

캐서린은 외벽을 따라서 찬찬히 걷다가 훈련장 전망대 위에 섰다. 그리고 그 아래를 내려다봤다. 탁 트인 시야가 시원스러웠다.

“영애.”

아래를 한창 내려다보는데, 뒤에서 그녀를 잡아끄는 손길이 있었다.

“엇, 오셨어요?”

“성벽에 너무 붙어 있지 마. 목검이 부러져서 이쪽으로 날아오는 경우도 많으니까.”

로렌디스는 기사단의 훈련을 봐주던 중인지, 가벼운 셔츠에 손목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보호대는 철갑이었는데 단단한 끈으로 묶어서 고정해 뒀다.

“여기까지는 왜 왔지?”

“공작님께 묻고픈 게 있어서요. 바쁘신가요?”

기사단장을 중심으로 훈련이 재개됐다. 합을 맞출 때마다 묵직한 기합이 터졌다. 캐서린이 그때마다 움찔하는데, 로렌디스가 훈련소 쪽 시야를 가리며 답했다.

“필요한 건 집사에게 이야기해도 돼.”

“직접 물어야 할 것 같아서요. 혹시, 외출이나 이런 부분도 집사에게 부탁하나요?”

밖에서 외부 의사와 접촉하려면, 외출이 자유로워야 한다. 이런 꿍꿍이를 모르는 로렌디스가 되물었다.

“외출은 왜?”

“너무 급하게 떠나 와서요. 그게, 여성용품이나 필요한 짐들이 많아요. 자작저에서 가져온 짐도 없고요.”

“내일 호위를 붙여 줄 테니까 다녀와.”

캐서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게 별거 있나. 아름답게 이번 생을 마감한다면 그게 아름다운 이별이지.

이 결혼을 쉽게 수락한 이유도 그거다. 어쩌면 삶을 더 안락하게 마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삶의 마지막 순간에 눈송이 하나만 내려 줘도 좋겠는데. 딱 그거면 된다. 더 바랄 것도 없다.

“호위는 여자 호위로 붙여 주면 되나?”

“내일 시간 비는 사람으로 적당히 보내 주세요.”

“어제는 그냥 내 기분 탓이라고 여겼는데 말이지.”

로렌디스는 경계심을 푼 캐서린을 보며 혼란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도 그럴 게, 캐서린은 경계심 없이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로렌디스를 대했다.

“그대는 꼭…… 어딘가 떠날 사람 같군.”

캐서린은 뜨끔하며 그의 눈을 피했다.

* * *

다음 날, 로렌디스가 호위를 보내 줬다. 이름은 데보라, 진갈색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기사인데 일전에 본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오늘 아가씨의 호위를 맡게 된 데보라입니다. 마차가 준비됐으니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헬렌의 기사단은 월계수가 그려진 검은색 제복을 입는데, 월계수 견장의 개수로 계급을 나눈다. 월계수의 개수가 높을수록 계급도 높은 건데, 데보라는 월계수가 두 개였다.

두 개는 헬렌의 정식기사라는 표식이었다. 데보라가 거수경례로 예를 올리고 캐서린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잘 부탁해요.”

캐서린은 레이스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마차에 탔다. 첫 외출인 만큼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영애, 도착했습니다.”

헬렌의 수도는 눈이 녹은 설원에 자리 잡은 도심지 같았다. 흰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지붕이 죄다 뾰족뾰족했다.

“신기하십니까?”

“네. 제가 살던 곳은 지붕이 거의 평평했거든요.”

“헬렌은 눈이 잦은 지역입니다. 그래서 눈의 무게를 이겨 내기 위해서 지붕을 높고 가파르게 만든답니다.”

헬렌은 눈이 자주 내린다는 기후 때문인지 건물 모양이 비슷비슷했다. 지붕은 뾰족뾰족하고 건물 벽은 두꺼웠다. 벽돌로 높게 지어 올린 건물들은 고급스러웠다.

흰 벽돌부터 자색 벽돌까지. 색색의 벽돌들로 쌓아 올리고,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이 거리를 빼곡하게 채웠다. 겉으로 봐서는 모두 비슷해서, 자칫 길 잃기도 쉬워 보인다. 그래서 하녀인 넨시도 같이 따라와서 길 안내를 맡았다.

‘일행은 단출하게 두 명.’

캐서린은 이들을 뒤따르며 레이스 모자를 손끝으로 들추었다. 살랑살랑 레이스가 보폭에 따라 흔들렸다.

“조심해 주세요, 아가씨. 이 주변은 사람이 많아서, 잠깐만 넋 놓아도 길 잃기에 십상이거든요.”

2